[이웃 품은 신앙一家 (中) '한국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 고향 고치 앞바다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2011. 3. 3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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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아래 구로시오 해류가 흘렀다. 푸른 산을 비켜가는 시만토강은 청류(淸流)였다. 108년 된 전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동안 생선 가게 주인은 넙적한 칼날을 힘 있게 도마위로 내리쳤다. 어촌 고치의 풍광은 그랬다. 고치는 일본 열도의 가장 작은 섬인 시코쿠(四國)의 4개 현 중 한 현이다.

이 고장 특유의 기질은 호쾌하고 대범하며 심지가 굳은 것이라고 했다. 에도막부 시대 개혁가이자 무사였던 사카모토 료마가 고치 출신이며 맹견 도사견의 원산지라는 점을 만나는 사람마다 강조했다. 그리고 '목포의 어머니' 다우치 지즈코(한국명 윤학자·1912∼1968년)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전도사와 결혼해 3000명의 전쟁고아를 길러낸 위대한 여성이 고치 출신이라며 자랑스러워했던 사람들. 일곱 살 때 고향을 떠나 한국에서 고아들과 한평생을 산 일본 여성의 삶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지즈코의 고향

지난 9일 오후 도착한 다우치 지즈코의 고향 고치.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약 1시간 반이 걸렸다. 늦은 밤, 지즈코 여사를 추억하는 사람들과 통화했다. 도의원도 민간협회장도 조각가도 95세 할머니도 반가워했고, 직접 현장을 안내하겠다며 서로 나섰다.

10일 아침. 고치TV를 은퇴한 언론인이자 조각가인 요시오카 사토스구(69)씨가 소형 밴을 끌고 나왔다. 그는 '윤학자사랑모임'의 회장을 7년째 맡고 있다. 회원은 60여명. 청년부터 노인까지 연령 폭이 넓다. 60년대 결성돼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단체의 안내서를 그가 건넸다. 표지엔 '고치와 한국을 이어준 사랑과 공생의 가교, 3000명의 한국고아를 길러낸 목포의 어머니 윤학자 여사'라고 적혀 있었다. 총 4페이지의 안내서엔 그녀의 삶과 약력, 대한민국과 고치현 간 교류 현황표까지 한국어로 잘 정리돼 있었다.

기념공원으로 이동했다. 네거리 한가운데 자리 잡은 다우치 지즈코 기념공원. 기념비와 작은 화단 정도가 전부였지만 뜻은 깊었다. 기념비엔 '한국 고아들의 어머니' '사랑의 고향'이라는 글자가 앞뒷면에 각각 한글과 일본어로 새겨져 있었다. 이 공원이 조성된 때는 97년. 세대를 지나 지즈코 여사가 잊혀져 갈 무렵 고치 도의회 의장이었던 니시모리(현 도의원)씨가 앞장서 기념비 건립을 추진했었다. 당시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돼 일본 전역에서 모금 활동을 벌여 1200만엔을 모았고, 목포에서 15t 무게 돌을 배로 운반하는 정성을 들여 기념비를 완성했다. 비석 아래엔 3000개의 깨알 같은 돌도 박았다. 그녀가 전 생애를 바쳐 뒷바라지했던 3000명의 고아를 생각해서였다.

기념비는 바다 건너 목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고향을 떠나면서 아버지 손 붙잡고 지났을 둑과 선착장도 한눈에 보였다.

그녀는 기념비가 세워진 지점에서 500여m 떨어진 곳에 살았다. 생가는 안타깝게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됐기 때문이다. 생가 터엔 인쇄공장이 들어섰다. 바로 앞은 부둣가였다. 둔치엔 어린 소나무가 빼곡했었다니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녀의 흔적

고치신문사로 향했다. 1층 안내데스크 앞 소파에서 기다리는데 사회부 야마오카 마사시(46) 부장과 히로슈 도모코(42) 기자가 뛰어 나왔다. 마사시 부장은 자신은 잘 모르지만 전문가가 있다며 즉석에서 15년간 지즈코 여사를 취재해 왔다는 다카마쓰시 지사 대표와 통화를 연결해줬다. 마사시 부장은 젊고 유능한 데스크로 후배기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고 도모코 기자가 귀띔해줬다.

그간 고치신문사에서 지즈코 여사에 관해 보도한 기사는 3000여건에 달했다. 도모코 기자는 그중 주요기사 100여건을 복사해 가져다줬다. 대화는 점심식사 자리로 이어졌다. 한국의 분단 현실이 가슴 아파 통일전망대에서 구입한 기념품을 머리맡에 두고 잔다는 이야기, 예전에는 기자들이 낮술을 마셨는데 요즘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은 극대화됐다.

고치신문사 기자와 인상적인 만남을 뒤로 하고 지즈코의 어머니, 야스오카 하루(1984∼1970년)씨의 친구를 만나러 갔다. 하루씨의 친구는 이치하라 마사코(95) 할머니. 할머니는 일찌감치 약속장소인 호텔 로비에 와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걸음을 떼는 할머니는 "괜찮다"며 부축을 사양했다. 할머니는 희미해진 기억을 끄집어내기 벅차했다. 대신 A4 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 종이 양면 가득 친구에 대한 기억이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딸 지즈코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했다. 그때 지즈코 여사의 장남 윤기(69·일본 사회복지법인 마음의가족 이사장)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마사코 할머니께서 어머니가 일본에 가면 머물던 사촌 무라타 도시코씨의 집을 아십니다. 알려달라고 해보세요."

할머니는 길 안내를 자처했다. 고치 시내 변두리 골목이었다. 사촌 집은 일본식 단층 가옥이었다. 지금은 폐가가 됐지만 고치에선 유일하게 지즈코 여사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 지즈코 여사는 45년 해방 후 처음 고향에 돌아와 이곳에서 셋째 윤향미를 낳았다. 윤기씨는 기념관으로 바꾸기 위해 집주인을 설득 중이라 했다. 담 너머 방치된 정원에도 꽃은 피었다.

신앙의 어머니, 그리고 딸

마사코 할머니는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지즈코가 어머니를 따라 이곳에 나왔을 겁니다." 개혁파 고치교회. 아담한 목조 건물이었다.

할머니는 지즈코의 어머니와 교회에서 알고 지낸 사이였다. "하루씨는 크리스천의 거울 같은 분이었습니다. 지즈코의 신앙도 하루씨의 신앙과 꼭 같았을 겁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

"1951년 4월 어느 날 갓 부임한 사토 신지 목사님이 우리 집에 번쩍이는 자전거를 타고 왔지요. 목사님이 하는 말씀이 야스오카 하루씨가 전도활동에 써 달라고 헌납한 겁니다라는 거예요. 깜짝 놀랐지요. 하루상은 부자가 아니었고 셋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엔 자전거 한 대가 신차 한 대 값이었거든요."

지즈코의 어머니 하루씨는 남편을 여의고 병원에서 산파로 근무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녀는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교회 일에 헌신적이었고, 목포에 있는 딸을 목포고등여학교 졸업 때까지 홀로 뒷바라지했다.

지즈코가 목포의 거지대장으로 불린 전도사 윤치호와 혼인하겠다고 했을 때 모두가 뜯어말렸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오히려 고아를 돌보는 전도사와 결혼하겠다는 딸을 기특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일제치하의 현실을 고려해 치호를 데릴사위로 입적시키기도 했다.

"딸의 이야기를 많이 하진 않았습니다. 아마 사무치게 그리워했을 겁니다. 하지만 남편을 잃고도 한국에 남아 고아를 기르겠다고 했을 때 그 정신을 높이 샀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지즈코와 어머니 하루씨의 숭고한 생애는 분명 굳은 신앙이 뒷받침했을 겁니다."

다우치 지즈코 탄생 100년

해가 졌다. 도의원 니시모리 시오소오(71)씨를 만났다. 니시모리 의원은 의회기간 바쁜 와중에도 밤늦도록 자리를 함께해줬다.

목포 공생원에 찾아갔던 일이며, 처음 기념비를 세웠을 때의 에피소드며, 당시 모금활동을 돕던 할머니가 지난해 102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등 많은 대화가 오갔다. 그는 고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기념하라며 줬고, 박준영 전라남도 도지사와는 둘도 없는 친구라며 한국과의 각별한 인연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과 관련한 일이라면 만사 제치고 달려가는 친한파다. 합석한 기업인 야마사키 게이스케(70)씨는 자신도 니시모리 의원에 붙잡혀 한일친선협회장까지 맡게 됐다며 웃었다.

니시모리 의원은 내년엔 일본인 3000여명이 목포 공생원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중 1000명은 고치 사람들이 가는 것으로 윤기 이사장과 논의 중이라고도 덧붙였다.

내년은 다우치 지즈코, 윤학자 여사의 탄생 100년을 맞는 해다.

"우리 고치 출신으로 목포 고아들의 어머니가 됐던 지즈코 여사를 대단히 존경합니다. 인류애의 상징이지요. 아마도 기독교인이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겁니다."

11일 오전 니시모리 의원의 주선으로 오자키 마사나오(42) 고치현 지사와 미팅을 갖게 됐다. 오자키 지사는 도쿄대 출신의 엘리트로 39세에 고치현 지사에 당선, 현재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일정에 없던 일이다. 현청에서는 100년 주기로 도래할 지진에 대비해 내진 공사가 한창이었다. 오자키 지사는 취재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한국의 여배우 이영애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가 다우치 지즈코 여사로 화제를 돌리면서 "그분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럴 정도로 대단한 분이다"고 고개를 숙였다. 오자키 지사도 올해 11월 선거에서 재선된다면 내년 10월 31일 목포 공생원에서 열리는 윤학자 여사 탄생 100주년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다.

전해야 할 역사

고치신문사 사회부장이 연결해준 전문가, 아시와 기요시(57) 고치신문사 다카마쓰시 지사장을 신문사 8층 식당에서 만났다. 다카마쓰시에서 고치까지는 차로 2시간여 걸린다. 그는 97년 사회부장 시절 니시모리 의원을 통해 다우치 지즈코를 알게 됐다. 그때부터 기자로서의 신념을 갖고 한국 일본의 역사적 문제 속에서 지즈코 여사의 생애를 연구해 왔다고 덧붙였다.

"다우치 지즈코는 한·일 관계 해결의 실마리, 열쇠 같은 인물입니다. 그녀를 알게 됨으로써 한국의 역사를 바로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일본 침략을 사죄하는 정치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출간한 한국요리 책과 고치 지방 특산물인 견피 과자(도사견을 연상케 하는 과자)를 선물로 줬다.

마지막 일정만 남았다. 요시오카 회장을 다시 만났다. 그는 고치 시내에서 차로 50여분 떨어진 고난시 도아샤마 마을의 작업실로 안내했다. 지즈코 여사의 부조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100평 남짓 되는 큰 작업실이었다. 3개월째 뜨고 있는 작품. 찰흙으로 빚은 기초 작업은 마무리 단계였다. 그 위에 석고로 본을 뜨고 청동을 입히면 완성된다.

"제가 40년 전 방송국 기자 시절에 윤기 이사장을 처음 만났답니다. 우린 동갑이어서 통했습니다. 그는 일본말을 못했어요. 공생원에서 소학교 중학교 여학생들을 데리고 고치에 와 합창 공연을 하고 돌아갔지요. 그때 지즈코 여사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71년 윤기 당시 공생원장은 수선화합창단과 함께 고치를 방문했고, 공연을 취재한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었다. 요시오카씨는 "사진과 닮았냐?"고 수차례 물었고, "똑같다"는 대답을 듣더니 아이처럼 기뻐했다.

요시오카씨가 100주년을 기념해 준비한 선물. "기념비만 보고는 지즈코 여사가 누군지 알 수가 없잖아요. 일본에서도 점점 잊혀져 가는데 그분을 기억하려면 모습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짧은 기간 많은 사람을 만났다. 모두가 고인의 사랑과 희생정신을 기렸다. 고인의 생애를 통해 기독교와 한국을 더 깊이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거듭 당부했다.

"그녀의 삶은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윤학자가 베푼 예수의 박애정신은 시대, 민족, 언어를 떠나 민들레홀씨처럼 그렇게 멀리멀리 퍼지고 있었다.

고치(일본)=글·사진 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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