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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젠테이션 열풍] 소통에 목마른 세대, 디지털 시대 아고라의 부활

입력 2011. 04. 24. 19:07 수정 2011. 04. 24.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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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지금 공부 중이다. 때로는 수천명, 때론 대여섯명이 프레젠테이션 모임을 갖고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자신의 경험을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웃음이 터지고, 눈물이 흐르고, 박수가 쏟아진다.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인터넷을 통해 자발적으로 모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는 홀연히 흩어진다.

초등학생부터 대학교수, 지방자치단체장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멋진 사진 찍기'부터 '더 나은 나라를 만드는 아이디어' '세계 평화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까지 주제도 제한이 없다. 각자 몇 장의 그림과 글씨를 대형 화면에 띄워놓고 짧은 시간에 자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왜 지금 프레젠테이션일까?

정지훈 관동대 정보기술융합소장은 "지식과 경험은 나누고 공유했을 때 사회적 가치가 더 커진다"며 "개인이 가진 재능과 지식을 자신의 소유로 꽁꽁 감싸고 있거나 상품으로 판매하던 사회에서 공유와 확산의 사회로 변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터넷과 정보기술의 발달로 이런 모임이 지극히 쉬워진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프레젠테이션 모임 '이그나이트'가 좋은 예다. 인터넷에 모임 장소와 날짜만 올리면 나머지는 참석자들이 결정한다. 발표할 사람과 주제를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온라인 투표로 모든 내용을 결정한다. '이그나이트 서울' 모임을 열어온 정진호 SK커뮤니케이션 차장은 "뜻 맞는 사람들 몇 명이 장소를 준비할 뿐 뒤풀이도 없고 사전 작업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냥 재미있어 매년 이 모임을 개최한다"며 "일종의 취미생활"이라고 말했다.

프레젠테이션 모임은 스토리텔링, 즉 이야기를 강조한다.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이준환 교수는 "원래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은 시각 청각 후각 등 오감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라며 "활자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쇠퇴했던 '오감 커뮤니케이션'과 구술로 지식을 전해온 고대의 전통이 디지털 시대에 부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형 스크린과 스피커로 시청각 정보를 전달하는 프레젠테이션 형식이 주는 역동적인 체험도 매력이다. 청어람아카데미 코디네이터 정수현씨는 "현재의 대학생들은 수업시간에 프레젠테이션 방식으로 발표하는 데 익숙한 세대"라며 "책 읽기는 힘겨워해도 멀티미디어 자료를 수집해 정보를 정리하고 프레젠테이션이라는 형식으로 펼쳐내는 것은 손쉽게 해낸다"고 말했다.

강연자의 옷차림은 캐주얼이 권장된다. 발랄한 유머가 곁들여진 강연이 환영받는다. 테드엑스명동 오거나이저 최웅식씨는 "재미가 중요하다"며 "재미 위에 공유할 만한 가치를 담으면 그 아이디어는 쉽게 확산된다"고 말했다.

왜 모여들까?

23일 열린 테드엑스해운대에 참석한 윤지회씨는 "단조로운 생활과 좁은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왔다"고 말했다. 전문가들 얘기도 비슷하다. '프레지를 사용하는 한국인 모임'을 이끄는 안영일(DCG 대표)씨는 "사람들이 지식을 넘는 지혜, 자신의 일상을 설명해 줄 카타르시스와 동기부여를 원해 찾아오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비영리 기관을 위한 강연 모임 '체인지온'을 개최해 온 박남호(다음세대문화재단)씨는 "일터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으면 모든 것이 보장됐던 시대가 끝나면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개성을 찾기 위해 다양한 것을 접하고 싶은 욕구와 여유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거품도 있다. 유명 강연자를 보기 위해 몰려들고, 프레젠테이션 모임에 참석했다는 것을 하나의 브랜드를 소유한 것처럼 여기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최웅식씨는 "테드엑스에 오는 청중의 70%가 대학생인 것은 한국만의 현상"이라며 "테드엑스에 참여했다는 것을 이력서에 한 줄 추가할 수 있는 이른바 스펙으로 활용하려는 경우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테드엑스 모임은 기존의 연구단체 콘퍼런스에 테드엑스라는 브랜드를 차용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후속 모임 개최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하다. 안영일씨는 "내실을 채우지 못한 채 유행처럼 외형만 커지면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며 "마음을 보여주는 성찰과 공유의 문화 위에 기술이 더해져야 하는데, 이런 문화 없이 기술적인 스펙터클만 반복해 보여준다면 결국 시들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프레젠테이션이 세상을 바꾼다?

프레젠테이션 모임을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볼 수 있을까. 정지훈 소장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미래 사회의 트렌드가 우리 사회에서 일찍 시작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미래 사회는 공유하고 나누는 가치가 더 힘을 받는 사회"라며 "자본주의 중심 사회에서 자발적 나눔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로 변해가는 현상으로 본다"고 말했다.

정치적인 활동으로 범위를 넓혀 가려는 움직임도 있다. 대부분의 프레젠테이션 모임은 정치·종교 등 사회적 이슈는 금기시하고 있지만 '씽크카페'는 고용·통일·여성 등을 의제로 삼아 5분씩 발표하는 모임을 열고 있다. "사회 변화와 혁신에 관한 정보와 사람을 연결하는 일, 세상을 바꾸는 일을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방법으로 시작한다"는 것이 이 모임의 취지다. 테드엑스봉하 개최를 추진해 온 봉하재단은 곧 '청년 포럼'이라는 이름으로 프레젠테이션 모임을 개최할 것으로 알려졌다.

총선과 대선이 있는 내년에 이 같은 모임들이 소셜네트워크를 타고 확산되면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정지훈 소장은 "프레젠테이션 모임을 통해 사회적 이슈가 만들어지고 확산되고 증폭되면 파장이 일어나고 일정한 변화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며 "이 같은 효과는 참여자 전체의 이익을 상부상조 형태로 대변하는 간접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끌리고 들끓는' 미래의 트렌드?

프레젠테이션 모임이 확산되는 현상은 사회 변화의 차원으로도 해석된다. 지식의 공유, 쌍방향 소통, 네트워킹은 시대의 화두다. 뉴욕대 클레이 서키 교수는 저서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에서 "사회가 조직되고 운영되는 방식, 즉 사람이 참여하고 협동하고 생산하고 행동하는 패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씨는 "파편화된 경쟁과 위계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선 서로 다른 리듬을 가진 존재와 어울리고 맞서는 삶의 재배치가 필요하다"고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에서 역설했다. 화폐 중심 경제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세상의 비전을 탐구하고, 더 좋은 사람을 더 많이 만나고, 인색해선 안 되고, 말솜씨가 뛰어나야 한다는 그의 지적은 프레젠테이션 모임의 확산과 맥락이 닿는다.

지난 1월 30일 서울 독산동에서 열린 '테드엑스금천'은 그런 대안적인 모임의 사례다. 금천예술공장이라는 예술가 집단이 주도한 이 모임은 지난해 9월부터 지역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살면서 고마움을 느낀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됐다. 주민들이 털어놓은 일상의 이야기를 인터넷에 올리고, 그 주인공을 다시 찾아가 강연자로 섭외했다. 지역 고교 교사, 지역 신문 제작자, 공장 노동자가 무대에 올라왔다. 예술가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주민들이 청중으로 참석하는 형식을 뒤집은 것이다. 이 모임을 기획한 시각디자이너 민성훈씨는 "공론의 장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연결해 주면서 비로소 주민들과 예술가가 연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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