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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외무, 1938년 비밀전문서 "난징에서 최소 30만명 살육"

베이징 입력 2011. 07. 08. 03:07 수정 2011. 07. 0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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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난징 대학살 사료집' 10년 만에 완간.. 日 군부 조직적 지시 밝혀내

"특별소식: 믿을 만한 목격자들의 직접 추산과 신뢰도 높은 일부 인사들이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일본 군이 저지른 모든 행위와 폭력 수단은 아틸라왕과 흉노족을 연상시킨다. 최소 30만명의 민간인이 살육됐고, 많은 수는 극도로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전투가 끝난 지 수주가 지난 지역에서도 약탈과 아동 강간 등 민간에 대한 잔혹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1937년 일본군의 난징(南京) 대학살 직후인 1938년 1월 히로다 고키(廣田弘毅) 일본 외무대신이 주미 일본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또 학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난징에 있던 서방 외교관들을 불러 맛있는 음식과 공연을 제공하며 매수를 시도했다는 기록도 들어 있다. 이 전문은 지난 6일 완간된 중국의 '난징 대학살 사료집'에 실려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됐다.

◆"일본 군부의 조직적 지시"

중국 장쑤(江蘇)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가 지난 10년간 전 세계를 누비며 수집한 난징 대학살에 관한 방대한 1차 사료를 모아 집대성한 총 78권 규모의 '난징 대학살 사료집'을 지난 6일 완간했다고 중국청년보 등 중국 언론이 7일 보도했다.

본 사료집 72권, 부록 6권으로 구성된 이 책의 글자 수는 무려 4000만자에 이른다.

역사서 사기(史記·50만자)의 80배, 자치통감(資治通鑒·300만자)의 13배로 중국 역사상 전례를 보기 드문 규모이다. 이 사료집에는 난징 대학살이 일본 군부의 조직적인 지시에 의해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사료가 포함됐다고 중국 언론은 전했다.

◆웅덩이마다 산처럼 시신

당시 일본군의 잔혹한 행위를 보도한 이탈리아 와 구소련 언론의 보도가 처음 발굴돼 수록됐고, 상부의 학살령이 있었다는 당시 일본군 장교와 병사들의 일기와 증언도 대거 실렸다. 한 병사는 "항저우(杭州)에서 난징에 이르는 길 주변 물웅덩이마다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1946~1948년에 진행된 일본 전범 재판 당시의 검찰 공소 기록과 변호인의 반론을 담은 변론 기록 등도 포함돼 이 사건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 가능하도록 했다고 연구소 측은 밝혔다.

이번 사료집 편찬을 위해 중국은 2000년대 초반부터 팀을 구성해 세계 각국을 누볐다.

미국 의 국립문서고와 국회도서관,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일본의 외교사료관과 방위성전사연구실 등은 물론, 영국 · 독일 · 덴마크 ·이탈리아· 러시아 등의 외교문서 보관시설도 샅샅이 뒤졌다고 한다.

◆일본 자료 촬영·복사 거부…손 붓도록 베껴 써

이에 따라 수록된 자료도 중국어와 영어, 일본어, 독일어, 덴마크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등 다양한 언어로 돼 있다. 자료 고증과 번역, 편집 등에 투입된 전문가만 해도 100명에 이른다고 연구소 측은 밝혔다. 장쑤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왕웨이싱(王衛星) 연구원은 "일본에서 자료를 조사할 때는 일본 측이 사진을 찍거나 복사를 할 수 없도록 해 전부 베껴 쓰느라 손이 퉁퉁 붓기도 했다"고 말했다. 중국은 2년 뒤 이번 사료집의 핵심 내용을 추려 일반인도 쉽게 볼 수 있는 '난징 대학살 전사(全史)'를 출간한다는 계획이다.

편찬팀은 이번 사료집 완간으로 일본 우익세력이 더 이상 난징 대학살을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어려울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일본 학계는 난징 대학살을 사실로서 인정하지만 당시 사망자는 아무리 많아도 20만명을 넘지 않는 것으로 보며, 학자에 따라서는 2만~4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사료집 편찬을 주관한 장셴원(張憲文) 난징대 교수는 "이번 사료집 발간으로 많은 역사적 사실이 분명해졌다"면서 "올바른 교육으로 중·일 양국 젊은 세대 간 우호적인 관계를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중국사회과학원 세계사연구실의 탕중난(湯重男) 교수는 "사료집 완간의 공은 당대에 있지만, 그 이익은 천추(千秋)에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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