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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호남][이종범 교수의 호남인물열전](14) 김굉필

입력 2011. 09. 29. 03:28 수정 2011. 09. 29.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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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언의 참스승, 순천 유배와 도학 실천

15세기 말 도학(道學)운동은 왕실의 정통성 훼손과 훈구공신의 권력독점에 대한 철학적 대응이었다. 성현의 가르침을 마음 삼는 '경전의 내면화'를 추구하였다. 또한 공부의 목표를 하늘을 따르는 사람의 길, '인도(人道)'에 두었다. 국정참여에 앞서 도덕실천이 먼저라는 '선수기후치인(先修己後治人)'을 유독 강조하였다.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이 선구였다. 한양에서 생장하고 경상도 달성군 현풍 본가와 합천군 가야면 처가를 오갔다. 본관은 황해도 서흥. 20대 초반 김종직에게 배우며 '소학(小學)'의 가치를 터득하였다. 주자의 교시에 따라 문인 유청지(劉淸之)가 펴낸 수신학의 고전이었다. 각오는 대단하였다. "앞으로 소학의 자식노릇 다하면서, 구차히 부귀를 부러워하지 않으리."

성종 11년(1480) 생원이 되었건만 재능을 감추고 자취를 흐렸다. "세태를 만회할 수 없고 세도는 실행할 수 없다." 시문을 즐기지 않고 거의 말이 없었다. 나랏일을 물어도 "소학동자가 어찌 대의를 알겠는가!" 오직 소학의 실천과 보급에 열심이었다. 한편의 의혹과 비방에도 어느덧 덕망은 높았다.

연산군 2년(1496) 성균관 대사성 반우형(潘佑亨)도 스승으로 모셨다. 네 살 연하, '한빙계(寒氷戒)'로 징표로 건넸다. 이런 구절이 있다. "의리를 살피지 않고 출세에 조급하면 처녀총각이 구멍 뚫고 담장 넘어 간통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음식남녀(飮食男女)만한 욕심이 없는데, 예(禮)로 누르지 않으면 탐욕과 음탕에 이르지 않겠는가. 벼슬과 재물을 둘러싼 분노가 가장 큰데, 의(義)로 마름질 않으면 이리와 살쾡이 같은 간사한 도둑이 되지 않겠는가." 얼음보다 차갑다.

무오사화로 유배를 갔다. 묘향산 넘어 청천강 상류 평안도 희천, 이웃 어천역 찰방의 아들을 가르쳤다. 17세, 조광조(趙光祖)였다. 그리고 2년, 전라도 순천으로 옮겨졌다. 압록강 의주에 있었던 조위(曺偉)도 같이 왔다. 김종직의 처남이며 제자로 '조의제문'을 실은 문집을 간행한 죄였다. 간혹 읍성 남문 밖 옥천, 노거수 아래 돈대에서 만났다.

조위는 편안한 듯 부로들과 바둑 두거나 술 마시며 때로 시를 읊조렸다. 그러나 내심은 억울하였다. 장편 '만분가(萬憤歌)'는 디아스포라의 명품으로 회자된다. "높고 높은 하늘, 구름 위를 나는 새야. 네 알잖느냐? 아아, 이내 가슴. 산이 되고 돌이 되어 어디어디 쌓였으며, 비가 되고 물이 되어 어디어디 울며 가는지를."

김굉필은 유계린(柳桂隣), 유맹권(柳孟權) 등을 계도하였다. 유계린은 성균관 시절 '정지교부계'의 동지인 최부의 제자이며 사위였다. 유맹권의 모친 설씨(薛氏)는 자식교육에 감동하여 정성으로 식사를 이바지하였다.

연산군 9년(1503) 겨울 조위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렀다. "자녀도 없고 조문하는 사람도 없으니 하늘도 어질지 못한가?" 이듬해 갑자사화, 임사홍(任士洪)이 '한빙계' 때문일까, '위선(僞善)'으로 모함했다. 잠깐이라도 흘금거렸다면 비수에 꽂힌 듯싶었을 것이다. 참형을 받고 가산은 적몰되었다. 설씨 부인이 장례비를 감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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