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과 사람] "선상폭력이 빚은 조선족의 우발적 범행.. '운명' 처럼 변호 맡았다"

2011. 10. 15.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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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이 본 페스카마호 사건조선족 선원 6명이 남태평양서 한국인 선원 11명 집단 살해배 기름 떨어져 표류중 日서 발각

"조선족 동포들은 조국에서 도움을 받고자 하는데 우리는 이들에 대해 은연 중에 멸시나 깔보는 심리가 있습니다. '페스카마15호' 사건의 가해자들도 동포로서 따뜻하게 품어줘야 하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1996년 8월2일 한국인 간부 선원 7명 등 11명이 남태평양 해상에서 목숨을 잃은 국내 최악의 선상 살인 사건인 페스카마15호 사건. 97년 초 이 사건 재판의 2심부터 재중동포(조선족) 선원들을 변호했던 문재인 변호사(현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술회다. 그가 변호를 맡은 것은 '운명'이었다.

페스카마의 비극은 단순한 이유에서 출발했다. 원래 중국에서 교사로 일했던 전재천(당시 38세)씨는 다른 재중동포 5명과 함께 돈을 벌기 위해 참치잡이 원양어선인 254톤급 페스카마15호에 승선했다. 하지만 한국인 간부 선원들은 이들의 어로 작업이 서툴다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했고 재중동포 선원들이 반발하자 선장은 징계위를 열어 하선을 결정했다.

중국으로 돌아갈 귀국 경비와 사모아 체류비 걱정 등을 하던 이들은 한국인 간부 선원을 모두 살해한 후 외국에 밀입국해 배를 팔고 귀국 경비를 마련하기로 모의했다. 8월2일 오전 2시 이들은 한국인 간부 선원 7명을 조타실로 유인해 흉기와 둔기로 잔인하게 살해한 후 시신을 바다에 유기했고 인도네시아 선원 3명과 난동에 가담하지 않은 조선족 선원 1명도 살해했다.

잔인했던 선상 살인 사건은 8월24일 오전 11시 동경 도리시마 동방 18마일 해상에서 기름이 없어 표류 중이던 페스카마15호가 일본 어업조사지도선에 발견되면서 만천하에 알려졌다. 당시 선상에는 한국인 선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인석 1항사(당시 27세)가 나머지 인도네시아인 선원과 합세해 전씨 등 6명을 어선 내 창고 안에 가둬 놓은 상태였다. 잡은 고기가 썩지 않게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이들 조선족들을 창고로 유인하는 기지를 발휘해 겨우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조타기술을 보유한 이 1항사는 항로를 짚을 수 있는 선원이어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1심에서 부산지법은 96년 12월24일 페스카마15호 사건의 주범인 전씨 등 6명의 조선족 선원들에 대해 해상강도살인과 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모두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경제적 여력이 안 돼 국선변호인이 선임되는 등 이들이 제대로 된 변호를 받지 못했다는 여론 때문에 중국의 조선족 동포 사회가 술렁거렸다.

문 변호사가 전씨 등을 맡은 것도 조선족 사회의 부탁 때문이었다. 당시 문 변호사는 부산변호사회 인권위원장이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부산경남 대표를 지내는 등 인권 변호사로 일했다. 문 변호사는 "조선족 사회에서 피고인들을 돕기 위해 중국인 법률가를 한 명 보내기도 했지만 이 사람은 국내에서 변호사 자격이 없어 결국 내가 변호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항소심과 상고심 재판의 쟁점은 전씨의 주범 입증 여부였다. 문 변호사는 "페스카마15호 사건은 수사기관의 발표처럼 조선족 선원들이 치밀하게 모의한 것이 아니고 우발적 부분이 있었다. 전재천은 2항사로서 가장 직급이 높은 선원이었고 학력도 있어 대표급이긴 했지만 범행 주모자로 보기는 어려웠다"고 말했다. 전씨도 재판 과정에서 이 부분을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변호인단은 이들이 어로 경험이 없어 일이 서툴렀고 당시 일반화돼 있던 선상 폭력이 평등주의가 강한 중국의 사회주의 문화와 달라 멸시와 모욕으로 받아들이면서 사건이 우발적으로 발생했다고 변론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전씨에게 사형을, 나머지 5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문 변호사는 "법정에서 사형이 확정됐지만 우리나라가 10년 넘게 사형집행을 안 해 실질적으로 사형 폐지국이고 전씨가 2008년 특별감형으로 무기징역을 살게 돼 결과적으로 변론이 결실을 봤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문 변호사는 재판 이후에도 이들을 돕는 데 앞장섰다. 그는 "죄는 무겁지만 사정이 딱하고 그들을 도와줄 사람이나 가족도 없었기 때문에 부산의 인권단체들이 나섰다"며"영치금도 조금씩 넣어주고 중국에 있는 가족을 초청해 교도소에서 만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인 생존자 중 유일하게 살아 남았던 이인석 1항사는 2003년까지 배를 타다 하선한 후에는 배를 타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되고 있다. 전씨 등 수형자들은 대전교도소와 광주교도소, 부산교도소 등에 분산, 수감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부산 해양경찰서 배재규 정보과장(당시 형사계장)은 "30년 넘게 해경 생활을 해 온 입장에서 그 같은 끔찍한 사건은 보지 못했고 봐서도 안 된다"면서 "그 사건 이후 선상폭력을 없애자는 분위기가 형성됐지만 아직도 문제는 남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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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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