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악의 사법살인, 조작부터 사형까지 '박정희 작품'

2011. 11. 14.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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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정남의 '증언, 박정희 시대' ③ 인혁당 재건위 사건 <상>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정권 퇴진운동 일자 용공조작검사들 "양심상 기소 못해"의혹제기 잇따르자 대상 축소10년뒤 "민청학련 배후" 올가미대법판결 18시간만에 8명 사형재심기회 뺏고 진술 조작고문흔적 감추려 주검 탈취도그 배후엔 박정희 있었다박정희 "극형에 처할수 있다"수사과정도 직접 보고받아훗날 술취해 '후회했다' 기록

'1975년 4월9일',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정했다. 이날은 한국 현대정치사에서도 가장 어두웠던 하루, '야만의 날'이었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정권의 살인행위가 벌어진 날이다. 도예종·여정남·김용원·이수병·하재완·서도원·송상진·우홍선, 무고한 사람들을 여덟명씩이나 서둘러 처형한 이 장면은 차라리 찢어버리고 싶은 역사의 한 장이다.

20년이 지난 95년 4월, 한 방송사의 '근대 사법제도 100주년 기념 설문조사'에서 현직 판사 315명이 인혁당 사건을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으로 꼽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느 누구 하나 공개적으로 그 잘못을 반성하거나 그 수치를 고백한 적은 없다.

■ 강신옥 변호사의 '사법살인' 예언

75년 4월8일 오전 10시, 대법원 전원재판부(재판장 민복기)는 피고인은 물론 변호인조차 출석하지 않은 가운데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계자 등 39명에 대한 판결문을 10분 동안 읽은 뒤 상고를 기각한다는 주문으로 재판을 끝내고 퇴정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한 사법살인은 이렇게 간단히 확정됐다. 한순간 어안이 벙벙했던 방청석의 가족들 사이에서 분노와 비통의 절규가 쏟아졌고, "전부가 조작이다" "이것이 재판이냐"는 항의가 이어졌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때 법정에서 본 피고인들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미 74년 7월11일, 강신옥 변호사는 여정남 등이 관련된 민청학련 사건 결심공판에서 변론을 통해 '사법살인'을 예언했다. "법은 권력의 시녀, 정치의 시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나, 본인은 법의 임무는 정의를 실현시키는 데 있는 것이라는 이상주의적 견해를 믿어왔습니다. 이번에 이 사건에 관여하면서 본인은 법의 기능에 대해 크게 실망하였고, 과연 법은 정치나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느끼게 되었습니다. … 지금 검찰관들은 나라 일을 걱정하는 애국학생들을 내란죄,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등을 걸어 빨갱이로 몰고 사형이니 무기징역이니 구형하고 있습니다. 증거도 없이 형식적 절차만으로 피고인들에게 사형까지 구형한다면 이는 우리의 기초적인 법감정인 정의의 이념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재판이어서 결과적으로 형식적인 재판을 통해 법의 이념으로 처단하려는 '사법살인'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 변론 때문에 강 변호사가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그 몇달 뒤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이 전격 집행되는 충격적인 사태가 진짜로 벌어진 것이다.

사실 대법원 판결 이전부터 피고들에 대한 사형집행 계획은 치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인혁당 사건을 수사지휘한 당시 중정 6국장 이용택은 훗날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 곧바로 (사형)집행명령을 내리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이미 국방부에 전달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서울구치소의 교도관들도 4월8일부터 퇴근하지 못하고 대기했고, 수감자들 사이에는 '다음날 처형당할 것 같다'는 예감이 번지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피고인들의 재심 기회를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유언(사형집행 때의 최후진술)조차도 위조했다. 도예종은 '조국이 하루속히 적화통일 되기를 바랄 뿐이라 했다'고 보도됐지만, 입회 교도관은 '통일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억울하다'는 한마디만 했다고 증언했다. 또 8명 모두가 "종교의식을 거부했다"고 기록돼 있지만, 교도관들은 그런 이야기를 그 누구한테서도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천주교계의 구명운동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변조한 것이다.

정권은 주검까지 빼앗았다. 경찰은 사형집행 다음날인 75년 4월10일, 연미사를 올리기 위해 함세웅 신부의 응암동성당으로 향하던 송상진의 주검을 탈취하려고 녹번동 삼거리에서 4시간20분 동안 승강이를 벌이다, 크레인까지 동원해 영구차를 강제로 끌어가 일방적으로 화장 처리했다. 이를 막으려던 문정현 신부는 영구차 바퀴에 깔려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고 지금껏 장애를 겪고 있다. 서도원의 가족도 응암동성당에서 마지막 미사를 올리려 했으나, 경찰에서 관을 실은 차를 고향 창녕으로 몰고 가는 바람에 허사가 됐다. 이수병의 주검은 손톱·발톱·발뒤꿈치와 등에 시커멓게 탄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을 함 신부가 흑백사진으로 찍어 외신에 공개했다. 경찰의 주검 탈취 소동은 이런 고문 흔적을 감춰야 했을 뿐만 아니라, 장례미사 과정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인혁당 사건 조작 의혹'의 증폭과 국민적 항의를 차단·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 유일·최고의 범죄자는 박정희

1, 2차 인혁당 사건은 모두가 정권 차원의 조작사건이었다. 64년의 1차 사건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점차 박정희 군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기에 이르자 위기를 느낀 정권이 6월3일 계엄령을 선포한 데 이어 8월14일 검찰총장 신직수가 '북괴의 지령을 받고 있는 대규모 지하조직 인혁당이 학생들을 조종해 국가변란을 기도했다'고 발표함으로써 비롯됐다.

하지만 41명이 구속된 이 사건을 송치받은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장원찬·최대현 검사는 9월5일 증거불충분으로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며 공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이에 신직수는 당직검사 정명래를 통해 이 가운데 26명을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결성 혐의로 기소했고 이에 반발해 이용훈·김병리·장원찬 검사는 사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국회에서도 고문에 의한 조작 의혹이 강력히 제기되면서 검찰은 재수사를 통해 12명만 국가보안법이 아닌 반공법으로 재기소함으로써 애초의 발표를 뒤집었다. 사실상 반국가단체로서의 인혁당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런데 10년 만에 인혁당 사건이 다시 등장했다. 64년 사건을 지휘·주도했던 검찰총장 신직수와 중앙정보부 수사과장 이용택이 각각 중정부장과 수사6국장으로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조작해낸 것이다. 2차 사건의 조작은 1차 때 실패에 대한 보복의 성격이 강했다. 전 중정부장 김형욱의 회고록에도 재건위 사건을 "박정희와 이후락의 지령을 받은 신직수 그리고 그의 심복 이용택은 10년 전에 문제 되었다가 증거가 없어서 석방한 사람들을 다시 정부 전복 음모 혐의로 잡아넣었다"고 적고 있다.

74년 10월10일 목요기도회에서 미국인 선교사 오글 목사는 설교를 통해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는데도 아무도 그들을 구출하려 하지 않는다'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이 설교로 인해 바로 이튿날 중정에 연행당해 조사를 받았고, 그 전말을 <중앙정보부 연행기>에 고스란히 남겼다.

"아래층에 있는 이용택이라는 사람의 사무실로 나를 데려갔습니다. … 그는 64년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으며, 인혁당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됐으나 정보부가 그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할 증거를 잡지 못했다고 말을 시작했습니다. … 그는 또 74년에 다시 그들이 인혁당을 조직,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고 했습니다. 미스터 리(이용택)는 방향을 바꾸어서 왜 한국 정부가 이 8명을 처형해야만 하는가에 대해 장광설을 폈습니다. 그 사람들은 공산당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공산당과 전쟁중이며 싸움터에서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공산당과 싸우고 있으며 인혁당은 공산당이기 때문에 죽여야만 합니다.' …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더이상 토론을 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꼈습니다."

이용택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박정희 대통령도 인혁당 사건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어서 한창 수사가 진행중일 때에는 신직수 부장과 내가 청와대에 들어가 직접 보고를 드렸다"고 털어놓았다. 박정희 역시 75년 2월21일 문화공보부를 연두순시하는 자리에서 '2·15 조치'로 풀려난 사람들에 대해 격앙된 목소리로 공개적인 '탄압' 지시를 했다. "이들은 긴급조치가 아니더라도 국가보안법으로 극형에 처할 수 있는 자들인데도 감옥에서 개선장군처럼 만세를 부르고 나왔다", "민청학련 사건은 이들(인혁당)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 명백한데도 일부 정치인들은 이를 부인하고 이들을 동지니 애국인사라고 하는데 이렇게 해도 법에 안 걸리는가, 법무부와 중앙정보부는 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합법적인 정부를 뒤집어 엎으려 했다면 내란음모죄이고 이는 어느 나라 법에서든지 극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등등등.

이로 미뤄볼 때 인혁당 사건 조작과 탄압을 주도한 것은 신직수와 이용택의 중정이었지만, 그 배후에서 사법부에 대한 압력과 전격적인 사형집행을 지시한 것은 바로 박정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박정희는 애초부터 인혁당이 고문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최근 우연히 민청학련계승사업회에서 펴낸 <1974년 4월>(2004·학민사)에서 '박정희가 만년에 술만 취하면 울면서 인혁당 관련 8명을 사형시킨 것을 후회했다'는 기록을 읽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 구명에 앞장섰던 생전의 윤보선 전 대통령이 박정희 측근한테서 들었다는 얘기다. 만약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곧 그가 인혁당 사건의 조작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도 된다. 그럼에도 사법부에 압력을 가하여 사법살인을 강요하고, 서둘러 사형집행을 지시했다면 인혁당 사건의 유일·최고의 범죄자는 박정희라 할 수 있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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