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한겨레21

우리는 생존자가 아니다

입력 2012. 03. 02. 18:10 수정 2012. 03. 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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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표지이야기] 대구 지하철 참사 9주년, 부상자 8인이 증언하는 오늘도 끝나지 않은 그날의 공포, 불안, 자책…끈질긴 후유증, 만성이 된 절망에 시달려도 생존자라는 이유로 차마 말하지 못했던 그들의 슬픔

지난 2월16일 63살의 한 여성이 정신병동에 들어갔다. 그 옆에 펜과 카메라 기자는 없었다. 9년 동안 여성의 마음 지하에서 '괴물'이 자라났다. 그가 입원하고 이틀 뒤인 2월18일이 괴물이 태어난 날이다. 9년 전인 2003년 2월18일, 대구에 기자들이 몰려왔다. 한 중년 남성이 전동차에 불을 붙였다. 수많은 사람이 숨지고 다쳤다. 여성도 그날 마음을 다쳤다. 그러므로 이 기획 기사는 반성에서 출발한다. 전국의 언론이 대구지하철 참사 이후 대책을 촉구했지만, 여성의 마음 상처는 방치됐다. 900호를 맞는 < 한겨레21 > 은 '지금 대구지하철 참사 부상자들이 무엇을 겪고 있는가'라고 질문을 확장했다. 그간의 보도를 검토했다. '사망자 192명'이라는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 보도는 대부분 사망자들을 향했다. 부상자 인터뷰는 표피적이었다. 특히 트라우마(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관한 보도는 드물었다.부상자들을 전수조사해 접촉했다. 트라우마의 심각성을 알리려고 < 한겨레21 > 은 전형적인 스트레이트 단신 기사 작법을 배반하기로 했다. 대구지하철 참사는 압도적 폭력이었다. 재난 트라우마에 대한 대책 마련을 성마르게 계몽하기보다, 부상자들이 지하에서 느꼈을 공포를 조금이나마 독자가 '느끼도록' 하고 싶었다. 추상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개성을 가진 한 인간이 무엇을 느꼈는지 파악하려고 개인적 배경을 물었다. 트라우마와 직접 관련이 없어도 인터뷰 대상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에피소드는 모두 담았다. 경상도 사투리를 표준어로 바꾸고 답변 순서를 바꾸는 것 외에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반영했다. 어떤 문장의 기교도 사용하지 않았다. 평범한 문장의 행간에,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_편집자

살아서 용서를 구합니다

자책1 수녀

불붙은 열차 바로 옆 1080호 전동차에 한 수녀(43)가 있었다. 그는 현재 대만 교구청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신앙인은 재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했을까. 부산이 고향입니다. 바다와 함께 자랐습니다. 광안리 바다가 제 놀이터였습니다. 밑으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결혼하신 지 8년 만에 어렵게 낳은 자식이라 부모님의 사랑이 각별했습니다. 그런 제가 수녀원에 가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많이 반대했습니다. 수녀원에 입회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결혼한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워하십니다.

모태신앙은 아닙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세례를 받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 수녀원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 생겼습니다. 1989년 대학에 입학한 뒤 신앙은 액세서리 같은 것이었습니다. 노동문제 연구 동아리에 들어가 사회과학 스터디도 했고, 시위에 참여하는 한편 클래식 기타에 빠져 지냈습니다. 대학 2학년 때 휴학한 뒤 1년간 대만에서 어학연수를 했습니다. 어느 날 선배와 함께 한인성당에 주일 미사를 하러 갔습니다. 미사 내내 이유를 알 수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잊고 산 성소에 관한 기억이 살아났습니다. 결국 대학 졸업 뒤 수녀원에 입회했습니다.

사고 당시 저는 제주도에서 소임(수도회 안에서 임무를 맡는 것)하고 있었습니다. 저희 수녀원 연중 피정(일정 기간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묵상하는 것) 참석차 제주도에서 2월17일 대구에 올라와 동촌성당에서 자고, 2월18일 아침 동촌역에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안지랑역으로 향하는 길이었고 동행은 없었습니다. 3호나 4호 차량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저는 앉아서 잡지를 읽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고개를 들었는데 맞은편 전동차에 불이 난 것을 보았습니다. 불이 난 것을 보고 제가 탄 차량이 중앙로역을 지나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동차가 섰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불을 보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묵주를 꺼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불이 났을 땐 승객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전동차 내 방송에서 (기관사가) "문제가 금방 해결되고 다시 출발한다"고 했으니까요. 어느 순간 전동차 문이 열리고 객차 내부가 가스로 가득 찼습니다. 그때부터 지하철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저 빼고 다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 화재 신고를 하는 소리도 들렸고, "엄마, 불났어!"라는 소리도 들은 것 같습니다.

영원한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당시 저는 화재에 관한 기본 지식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몸을 아래로 굽히고 있었지만 저는 그냥 멍청히 서 있다가 숨을 쉴 수 없을 때에야 머리에 쓰고 있던 베일로 입만 막고 있었습니다. 객차 안이 아수라장이 되자 '무슨 일인지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앞 차량으로 계속 걸어갔습니다. 기관사가 있는 차량까지 갔는데 그때 이미 기관사는 중앙과 연락이 두절됐는지 욕을 하며 기계를 팍팍 치고 있었고 제정신이 아닌 듯했습니다.

제가 1호 차량에 갔을 때 전동차 문이 열린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오는 순간 불이 꺼진 것 같고요. 앞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옆으로 몇 명이 부딪히는 느낌만 들었습니다. 차량에서 나오기 전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아이는 아마 그냥 차량 안에 있었을 겁니다. 그 사실이 지금까지도 저를 제일 괴롭히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와서는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암흑이었으니까요. '이렇게 하느님께로 가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까지도 숨을 쉬고 있더라고요. 비록 숨 쉬기 힘들었지만 무작정 걸었습니다. 벽을 더듬은 것 같기도 하고요. 어느 순간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점 같은 빛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살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방관이 보였습니다. 저에게 "소방 호스를 잡을 힘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소방관은 "다른 사람들을 구하러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며 "호스를 잡고 있으면 위에서 잡아당길 테니 잡고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앰뷸런스 안에서 정신이 가물가물하고 숨도 쉬지 못했습니다.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을 생각하니까 죽지 못하겠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봤던 바다를 상상했고 '바다에서 긴 호흡을 하는 거다'라고 생각하며 끝까지 숨을 놓지 않으려 했습니다. 경북대병원에 있다 며칠 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포항 성모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한동안 중환자실에 있었습니다. 3개월 동안 아예 말을 못했고, 6개월 지나서도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죄책감에 한참 동안 힘들었습니다. '눈이 마주쳤던 그 아이를 왜 데리고 나오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많이 약해지고 감정 기복이 심해졌습니다. 병원에 있을 땐 지하철 이야기만 나와도 울었습니다. 수녀님들이 신문과 텔레비전을 못 보게 하셨지요. 지금은 트라우마에서 많이 회복됐습니다. 딱 한 번 후유증을 느꼈습니다. 몇 년 전 대만에서 귀국해, 며칠 뒤 2월18일이 되어 병원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응급실 앞에서 한 발도 내딛지 못하고 주저앉은 적이 있습니다. 제 안에 아직 치유되지 않은 게 있다는 증거겠지요. 신앙인으로서 제게 이 사고가 오히려 인생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줬고, 감사할 줄 아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방화범을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방화범이 정신이상자란 것을 알고 안타까워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기관사에 대해서는 '책임의식을 갖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회 전체 가치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식한 이유 중 하나가 불에 잘 타는 재료로 만들어진 지하철 의자 천 때문이라는 것을 기사에서 봤습니다. 돈보다 생명을 중시하고 신중하게 전동차를 만들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고나무 기자dokko@hani.co.kr

자책2 김호근

김호근(76)씨는 지난해 위암 수술을 받았다. 암 발병이 사고 당시 들이마신 유독가스 탓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1079호 전동차의 1호칸에 방화범 김대한씨와 같이 타고 있었다. 집에서 나온 시각은 아침 9시10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부산행 기차를 타려고 안지랑역에서 동대구역으로 가던 길이었어요. 평소 부산을 갈 때는 아침 7시쯤 나오는데, 그날따라 많이 늦었습니다. 열차가 중앙로역에 정차할 때쯤 객차 안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불이야" 하고 소리쳤습니다. 방화범 김대한이가 내가 타고 있던 객차 안에서 불을 지른 겁니다. 그때 문이 열렸습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앞다퉈 출입구 쪽으로 몰렸습니다. 저는 문 앞에 서 있다가 뒷사람들에게 밀려 얼굴을 쇠 손잡이에 심하게 부딪치고는 기절해버렸습니다. 아래쪽 앞니 6개가 그때 다 나가버린 겁니다.

10분쯤 기절해 있다 호흡곤란을 느껴 눈을 떴습니다. 연기는 자욱한데다 주변은 깜깜하고 입 주위는 온통 피투성이였습니다.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코와 입을 틀어막고는 벽을 더듬으며 위로 올라갔습니다. 다행히 중앙로역 근방에 제가 운영하는 가게가 있어 역사의 내부 구조가 머릿속에 훤했습니다. 군에서 화생방 실습을 했던 대로 자세를 낮추고 지하 2층 개찰구까지 갔습니다. 올라가며 2분30초 정도 숨을 참았던 것 같습니다. 워낙 연기가 심해 한 모금이라도 들이마셨다간 곧바로 질식해버릴 것 같았으니까요.

지하 2층 매표소 앞 차단기를 통과하려는데, 누가 제 허리춤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더니 "아저씨, 저 좀 살려주세요" 하는 겁니다. 50대 아줌마 목소리였습니다. 도저히 데리고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손을 뿌리치려는데, 이분이 허리띠를 꽉 잡고는 놓지 않았습니다. 본능적으로 허리띠를 풀어버렸습니다. 그 사람을 끌고 나가려고 조금만 시간을 지체했으면 저도 죽었을 겁니다. 지하 1층으로 올라갔는데, 상가 쪽으로 통하는 셔터가 닫혀 있고, 그 앞에 수십 명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연기가 차오르니 방화 셔터가 자동적으로 내려와버린 거지요. 반대편 화장실로 갔습니다. 내부 구조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가능했지요. 거기서 수건에 물을 적셔 지상으로 통하는 계단 쪽으로 기어갔습니다. 소방관의 플래시 불빛이 보이더군요. 10초만 더 있었으면 질식해 죽었을 겁니다.

곽병원에서 3개월간 입원치료를 받았습니다. 여러 차례 폐를 씻어냈지만, 기침할 때마다 검은 가래가 나왔어요. 퇴원한 뒤엔 서울 영동세브란스 병원을 다니며 통원치료를 받았는데, 아무리 병원을 다니고 좋다는 약을 먹어도 사고 전의 몸상태를 회복할 순 없었습니다. 사고가 날 때 제 나이가 예순일곱이었는데, 그 나이에 동네 공원에서 평행봉을 했어요. 웬만한 40대와 팔씨름을 해도 지지 않았지요. 그런데 요즘은 30분만 걸어도 숨이 찹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운동이라도 부지런히 하면서 건강을 돌봐야지.

사고 보상금 1억5천만원은 운영하던 가게를 처분하면서 빚을 갚는 데 대부분 써버렸고, 나머지도 지난해 암수술비로 다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시에서 기초생활보장수급권자로 지정해줘 한 달에 60만원 정도 보조금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돈으로는 매달 들어가는 약값을 부담하기가 버거워요. 그러니 아내가 처형이 운영하는 작은 가내공장에 나가 일을 해 생활비를 보탭니다. 이래저래 아내가 고생이지요.

요즘 가장 고통스러운 건 잠을 잘 못 자는 겁니다. 새벽 2시30분까지는 무슨 짓을 해도 잠이 오지 않아요. 그때까지 혼자 텔레비전을 보거나, 불을 끄고 누워 배호나 나훈아의 노래를 듣습니다. 문제는 잠이 든 이후지요. 지난해까지 일주일에 사나흘은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개찰구에서 허리띠를 붙잡았던 아주머니가 피투성이가 돼 나타나선 "사지에 여자를 버려두고 가더니, 당신 얼마나 잘 사는지 보자"고 합니다. 악몽을 하도 자주 꾸니, 지난해엔 600만원을 들여 굿을 했습니다. 5년 전까지는 한낮에 집안에서도 그 아주머니를 봤어요. 텔레비전을 보다가 갑자기 소름이 돋아 주방 쪽을 보면 그 아주머니가 서 있는 겁니다. 잘 아는 스님한테 얘기했더니 호랑이 그림과 달마도를 주시더군요. 그걸 걸어놓고 삽니다. 대구=이세영 기자monad@hani.co.kr

자책3 김재범(가명)

김재범(52·가명)씨가 20여 년간 소방관 생활을 하며 다른 소방관에게 구조된 건 대구지하철 참사 때가 유일하다. 2시간 동안 사람을 구했고, 마지막 구출자를 짊어지고 중앙로역 2층에서 탱크의 산소 공급이 멈췄다. 고향이 경북 청도입니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출퇴근 시간대도 좋고 부모님 일을 자주 도울 수 있어서 1992년 대구에서 소방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는 대구 시내 119구조대 인명구조반장이었습니다. 그날도 출근해서 다른 날처럼 구조차량의 출동 준비를 막 끝내니 오전 9시50분쯤 됐을 겁니다. 화재가 났다는 지령을 듣고 바로 출동했습니다.

중앙로역에 도착해 뛰어 내려가니 불낸 사람(그는 방화범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을 몇 사람이 끌고 나오더라고요. 불이 나고 20분쯤 지나니 지하 2층 통로 계단에 '굴뚝효과'(건축물 내부의 온도가 바깥보다 높고 밀도가 낮을 때 아래에서 위로 공기가 흐르는 현상) 때문에 농연이 가득 찼습니다. 고개를 숙여서 손을 뒤로 짚고 낮은 자세로 지하로 들어갔습니다. 30분이 지나니 2층 개찰대 플라스틱이 녹아내렸습니다. 연기가 자욱한 중앙로역 2층에 내려가니 찬송가 소리(뒤에 등장할 정영자씨다)가 들리고, "나무관세음보살" 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지하 3층의 불난 1079호 차량에 가니 사람들이 위를 보고 누워 있었습니다. 일단 바닥에 물을 뿌려야겠다 싶어 소화전으로 물을 뿌렸습니다. 바닥에서 "앗, 뜨거워"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화전 물도 뜨거웠던 겁니다. 한 할머니가 머플러를 코에 대고 바닥에 탁 붙어 있었습니다. 연기와 열기가 위로 올라가서 산 겁니다. 할머니에게 산소호흡기의 보조마스크를 줬습니다. 저 혼자 숨을 쉬면 (산소탱크) 30분 정도 견딜 수 있는 양인데, 보조마스크를 주고 할머니를 메고 나오니 2층 가장 뜨거운 데서 산소가 떨어져버린 겁니다. 본능적으로 마스크를 던졌습니다. 숨이 막혔습니다. 기도에 화상을 입어서 날숨이 안 나왔습니다. 눈을 떠보니 서너 시간이 지난 듯했고 병원이었습니다. 제가 구한 고명애(78·가명) 할머니(할머니는 인터뷰를 거절했다)를 1년이 지나 부상자 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고맙다"고 하시더군요.

한동안 병원에 누워 눈을 감아도 "살려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떠올라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사람이) 바닥에 누워 있는 꿈이… 죽어서 흰옷을 입고요. 지금은 잊고 삽니다. 평소 홍수 같은 재난 피해자를 많이 봅니다. (소방관) 제복을 입고 있다는 것이 무서운 게, 소방관이니까 사명감으로 합니다. 그래야 트라우마를 빨리 털고 일어납니다. (재난 구조는)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고,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명감이 저도 모르게 마음에 박힙니다.

종교는 불교 쪽을 믿긴 한데 꾸준히 절에 나가진 않습니다. < 반야심경 > 이나 좀 보는 정도지요. 사건 이후로 건강 관리 때문에 술과 담배를 안 합니다. 이 사건의 책임이라면 글쎄요, 사회 전체의 안전 불감증이 아닌가 합니다. 방화범에 대한 무기징역 판결이 합당하냐고요? 그건 제가 답할 문제는 아닙니다. 대구=고나무 기자dokko@hani.co.kr

돌이켜본 대구지하철 화재 사건

끔찍한 실수가 거듭돼 나온 참사 2003년 2월18일 오전 9시53분,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서 발생한 사상 최악의 지하철 화재 사건. 승객 등 192명이 숨지고 148명이 다쳤다. 뇌질환을 앓아온 50대 남성이 객차 안에 지른 불이 맞은편에 정차한 다른 열차에 옮아붙어 대형 인명사고로 번졌다. 처음 불이 난 1079호 열차의 승객 대부분은 열려 있던 출입문을 통해 빠져나갔지만, 맞은편 1080호 열차는 기관사와 지하철 사령(중앙상황실 책임자)이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사이 전원이 끊기고 출입문이 닫혀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초동 대응부터 허점투성이였다. 처음 불이 난 1079호 열차 기관사는 지하철 사령에게 화재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채 대피했고, 지하철 사령은 화재 경보가 울리는데도 오작동으로 간주해 1080호가 불이 난 역사로 진입하는 걸 방치했다. 사령이 뒤늦게 화재 사실을 파악하고 열차에 대피를 지시했을 땐 이미 역사 안 전원 공급이 끊긴 뒤였다. 여기에 사령의 대피 지시를 받은 1080호 열차 기관사가 승객들의 안전을 확보하지 않은 채 마스터키를 빼들고 탈출해 피해를 키웠다.

사고 직후 소방차 84대, 소방관과 경찰 등 3200명이 현장에 출동했지만, 방재 시스템의 부실함만 드러냈다. 분진 마스크, 방독면, 방역복, 연기 강제배출 장비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대규모 지하시설 화재를 진압하는 기술과 경험이 없어 실속 있는 조처가 이뤄지지 못했다.

정부는 사고 발생 다음날 대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현장 수습과 피해 보상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대구시와 지하철공사는 사건의 축소·은폐를 시도하고 화재 현장을 훼손하는 등 부적절한 처신을 일삼아 유족과 부상자, 시민들의 비난을 자초했다. 불을 지른 50대 남성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2004년 지병이 악화돼 숨졌다. 열차 기관사와 지하철 사령 등 지하철공사 관계자들에겐 짧게는 1년6개월, 길게는 6년까지 금고형이 선고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 대도시에서 운행 중인 철도차량의 좌석과 내장재가 불에 강한 재질로 교체되고, 지하철과 역사 등 대규모 지하시설의 방재 시스템도 대대적인 정비에 들어갔다. 한국의 재난 방지 시스템이 얼마나 부실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 시민의 안전을 책임질 공공기관의 안전 불감증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만천하에 까발려진 뒤였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해마다 이맘때면 몸이 알아요

불안1 김은혜(가명)

김은혜(31·가명)씨는 인터뷰 장소를 직접 골랐다. 칸막이가 있는 커피전문점이었다. 열린 공간에서 대화하는 게 여전히 힘들다. 인터뷰하며 내내 울었다. 사건 당시 김씨는 20대 초반의 직장인이었다. 대학에 뒤늦게 합격해 대학에 다닐 예정이었다. 다니던 직장은 중앙로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1년여 동안 늘 오전 9시20분 방촌역에서 출발하는 같은 열차의 같은 칸에 올랐다. "중앙로역은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머니한테는 "대학 가기가 싫다"고 말했지만, 집안에 경제적 도움을 주고 싶은 게 더 큰 이유였죠. 어머니를 돌봐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지금도 어머니와 함께 살아요. 직장에서는 7년 만에 과장급 중간관리자가 됐고요.

그날도 9시20분 방촌역에서 항상 타는 전철 칸에 올랐어요. 늘 똑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남자 동료 ㄱ씨가 있었던 것까지요. '언니는 옆 칸에 타고 있겠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니'라고 부르는 절친한 동료 ㅂ씨랑 ㄱ씨랑 통근 지하철을 늘 함께 탔습니다. ㅂ씨는 옆 칸에 탔다가 옮아오곤 했어요. ㄱ씨를 사랑했거든요. 부끄러운 마음에 같은 칸에 타지 못한 겁니다. 얼핏 보니 그날도 옆 칸에 있는 것 같더라고요. ㄱ씨랑 얘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중앙로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중앙로역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연기로 가득했습니다.

겁이 나진 않았습니다. 쓰레기통이 타나 했죠. 눈을 감고도 나가는 길이니까 불안할 것도 없었어요. 그 문만 열리면 되니까. 건너편 전동차(1079호)에서 소란이 빚어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비명도 들렸고요. 그때 지하철역에 단전이 됐는지 바깥이 암흑이 되니까 우리 칸에 있는 사람도 웅성거렸어요. 하지만 어느 누구도 큰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옆 칸 언니에게 전화를 걸까 해서 전화기를 만지작거렸죠. 하지만 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후회는 되지만 이유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때 역 플랫폼처럼 지하철 전원도 나갔습니다. 연기가 차올라 답답해졌고요. 암흑이 됐는데 그때까지도 죽는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갑자기 늘 내리던 문이 아닌 건너편 문이 열렸습니다. 누군가가 강제로 열어젖힌 것 같아요. 그쪽으로 사람들이 몰려나갔습니다. 다시 옆 칸 언니가 생각났어요. ㄱ씨에게 "함께 가야 한다"며 옆 칸으로 가려고 했는데 ㄱ씨가 강제로 끌더라고요. "그럴 상황이 아니다"라면서요. 문을 통과하니 플랫폼은 비명 소리로 가득했어요. 전동차 밖으로 나와서 숨을 들이쉬니 짙고 뜨거운 연기로 숨이 막혔습니다.

'못 나가면 죽겠구나' 싶었습니다. ㄱ씨의 팔을 단단히 잡았습니다. 계단 난간을 잡고 몸을 낮춰 오르는데 사람들의 발에 차였습니다. 점퍼 안에 입은 후드티 모자를 잡혀 중심을 잃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2층을 기다시피 오르는데 ㄱ씨가 넘어졌습니다. 서너 명이 한꺼번에 ㄱ씨에게 매달려 넘어진 듯했습니다. 순간 '이 사람을 일으키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번쩍 안아 일으켰습니다. ㄱ씨가 나중에 병원에서 저한테 생명의 은인이라 하더라고요. 그 사람은 180cm가 넘고 저는 아담하니까(김씨의 키는 150cm를 조금 넘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믿기지 않습니다. 계단 난간을 다시 찾았고, 그때부터는 익숙한 길이었습니다. 바깥으로 나오니 119 구급차가 의식이 없는 사람들을 나르고 있었어요.

9년 동안 지하철은 단 2번 이용

바깥에 나가보니 아무도 우리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119나 병원 차량이 의식 없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느라 우리를 길가 연석에 방치했습니다. 택시 기사가 곽병원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어요. 병원 치료는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얼굴도 손도 몸도 온통 까맸습니다. 그리고 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내가 전화만 했다면, 우리 칸으로 넘어왔더라면, 언니도 살았겠죠. (눈물)

사고 이후 성대·기관지·폐 등 연기가 들어간 곳은 성한 데가 없었고, 피부 알레르기가 심해져 고통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 밤에 불을 끄고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꿈에 언니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꿈이라고 느끼면 깜깜한 지하철 안입니다. 저는 걸어다니는데 언니는 공중에 떠 있어요. 웃으며 저를 내려다보죠. 언니에 대한 자책을 떨치기 힘들었습니다. 사고가 나고 얼마 뒤 언니 ㅂ씨의 영결식에 참석했어요, 주변에서는 다 말렸지만. 버스 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갑자기 물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거예요, 저한테만. 그때 "독한 년"이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지만 살아나와서 여기까지 왔네, 독한 년" 이러더라고요.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터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 뒤로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석 달 정도 입원했거든요. 석 달 만에 정신병원에서 나왔지만 호전돼서 나온 건 아닙니다. 의사가 귀찮아하는 느낌이 싫어서였습니다. "무조건 다 겪는 일"이라며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무책임하게.

요즘도 여전히 불을 끄면 잠들지 못합니다. 영화관에 가면 비상구부터 찾고, 어떻게 탈출할 것인지 계획합니다. 사고가 나면 자의로 탈출하기 힘든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기차나 비행기 등을 이용할 때면 큰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9년 동안 지하철은 두 번 이용했습니다. 부상자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사람들이랑 몰려가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탔죠. 하지만 그 이후에는 절대로 안 탑니다.

그래도 몸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만 예민해졌죠. 암도 자가 진단으로 발견할 정도입니다. 의사가 신기해하더라고요. 인간이 자각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닌데 발견했다고. 그런데 저는 배가 계속 아팠습니다. 그래서 발견한 거예요.

언론에서는 사고가 일어난 지 10년이 돼간다고 하지만, 이맘때면 여전히 힘들어요. 몸이 반응합니다. 피부는 부어오르고, 목이 잠겨요. 비염도 재발해요. 남자친구가 있지만 결혼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아요. 2세 때문입니다. 아이가 저 때문에 잘못되면 어떡해요. 결혼하더라도 입양할 거예요. 사고 책임이오? 그 아저씨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그럴 여유가 없었달까…. 그보다 힘든 게 언니 생각입니다. 부상자라는 낙인도요. 그것만이라도 벗어났으면 좋겠어요. 대구=하어영 기자haha@hani.co.kr

불안2 정찬규(가명)

정찬규(28·가명)씨의 꿈은 패션디자이너였다. 그날 중앙로의 옷가게로 출근하다 변을 당했다. 그는 입대 영장을 받아놓은 휴학생 신분으로 선배가 운영하는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사이클을 탔습니다. "코치 노릇 하면 밥 굶을 일은 없을 것"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기본기가 탄탄했지요. 하지만 고3 때 우연히 구경한 패션쇼에 마음을 빼앗겨 사이클을 포기하고 의상디자인학과로 진학했습니다. 적성에 맞았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군복무를 위해 휴학을 했습니다. 입대일까지 시간이 남아 학과 선배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가게는 중앙로에 있었습니다.

사고 당일엔 아침 8시50분쯤 집을 나와 버스를 탄 뒤 아양교역에서 지하철로 갈아탔습니다. 러시아워를 넘긴 시각이라 객차 안에 승객은 많지 않았습니다. 지하철이 중앙로역으로 들어설 때 하차하려고 출입구 쪽에 서 있었습니다. 반대편에 열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열차가 멈춘 뒤에도 한참 동안 문이 열리지 않는 겁니다. "문제가 생겨 중앙로역을 그냥 통과하겠다"는 차내 안내 방송이 나왔습니다. 그러다 전동차 불이 깜빡거리고 타는 냄새와 함께 연기가 조금씩 객차 안으로 스며들더군요.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이 갑자기 열렸습니다. 출입구 쪽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객차 밖으로 쏟아져나왔습니다.

불이 들어오지 않아 비명과 고함 소리로 역사 안은 아비규환이었습니다. 그나마 저는 중앙로역의 내부 구조가 익숙한 편이라 계단을 찾아 지하 3층을 거쳐 지하 2층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2층이 더 안 좋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연기 농도가 짙어지는데다, 개찰구 앞에 사람들이 몰려 병목 현상이 빚어진 거지요. 뒤에선 무작정 밀어대는데, 앞사람들은 빠지지 않고…. 그러다가 쓰러진 누군가에게 발이 걸려 넘어졌습니다. 제 위로 몇 사람이 더 넘어졌지요. '여기서 죽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정신을 잃었습니다.

만성이 된 절망, 4시간 편히 자는 게 소원

깨어보니 병원이었습니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저를 소방관이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주변 사람들은 거기서 구조된 게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개찰구 앞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기도에 화상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3개월 동안 입원해 있으며 여러 차례 폐에 쌓인 오염물질을 걷어냈습니다. 퇴원한 뒤에는 매달 서너 번씩 서울에 있는 종합병원 호흡기내과를 다녔지요. 한 달 치료비만 50만원 넘게 나왔습니다. 그 생활을 2년 넘게 했습니다. 그사이 나 좋다며 쫓아다니던 여자친구가 떠났습니다. 대학 동기와 선배, 고등학교 때 함께 운동한 친구들도 퇴원한 지 1년이 넘어가자 연락이 끊겼습니다.

요즘 가장 큰 고통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는 겁니다. 사고를 당한 뒤 2~3년간 일주일에 두세 번은 불이 나는 꿈을 꿨습니다. 잠드는 게 무서워지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턴가 새벽 3~4시는 돼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게 되더군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잠을 자려면 자꾸 몸을 움직여서 지치게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한밤중에 무작정 동네를 걷기도 하고, 불을 꺼놓은 채 집안을 서성이기도 합니다.

잠이 들더라도 깊게 자지 못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아요. 몽유병과 비슷해요. 돌아다니진 않지만 그 상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니까요. 이상한 건 수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데도 아침 7시가 넘어가면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다는 겁니다. 잠이 부족하니 낮에도 멍한 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니 공부든 일이든 대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함께 사는 부모님과도 거의 말을 안 합니다. 부모님은 제 눈치를 보느라 그렇고, 저 역시 말을 하다 보면 언제 폭발할지 몰라 대화를 삼가게 됩니다. 절망도 만성이 되다 보니, 이젠 크게 바라는 것도 없습니다. 4시간 편히 자보는 것, 그리고 매일 출근할 직장이 생기는 겁니다. 어떻게든 사람 구실은 해보려고 무리해서 군복무(공익요원)까지 마쳤는데 달라진 게 없습니다. 이세영 기자monad@hani.co.kr

외국 재난 트라우마 치유 사례

지역에 치료센터 세워 장기간 상담했다 몸의 상처만큼 마음의 상처를 보듬는 것. 선진국과 비선진국의 차이다. 미국·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앞서 재난 피해자들의 트라우마 치료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일본 국립정신보건연구소는 1952년 설립됐다. 2004년 니가타현에서 지진이 났을 때 마을 사람들에게 심리적 서비스를 실시했다. 1995년 오사카·고베 대지진이 일어났다. 6300여 명이 숨졌고 2만6804명이 다쳤다. 이재민이 20만 명에 이르렀다. 대구지하철 사건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재난이었다. 지진 피해자들의 트라우마 문제를 장기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진기금을 토대로 2000년 '마음치료연구소'가 만들어졌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시민사회가 서로 도와 수만 명 규모의 피해자 신상 파악에 나섰다. 꾸준히 심리상담과 정신과 진료를 이어갔다. 이런 심리치료 노하우는 그대로 축적됐다. 2004년과 2007년 니가타현 등에서 일어난 소규모 지진에 당시 경험이 적용됐다. 생존자들에 대해 체계적인 '심리케어 대책'이 실시됐다.

1999년 대만에서 리히터 규모 7.3의 지진이 일어났다. 2321명이 숨지고 8천여 명이 다쳤다. 실종자는 57명이었다. 피해지 내에서 활동 거점이 되는 의료기관을 지정하고 이들이 정신과 진료를 맡도록 했다. 가이드북을 인쇄해 트라우마 문제의 중요성을 홍보했다. 심리학회, 천주교 재난센터, 대만의학연맹 등 관련 민간기관이 모두 협력해 장기 심리상담 서비스를 제공했다.

미국은 여러 주에 트라우마 전문 병원과 기관이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정신적 트라우마 클리닉'은 학대, 자동차 사고, 재난, 지진 등 모든 형태의 트라우마에 대해 심리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미국 재향군인회 산하에 1989년 설립된 '국립트라우마센터'는 주로 군대와 관련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치료한다. 매사추세츠주의 '트라우마센터'에서는 예술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지역사회의 위기에 대처하는 역할을 한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불안 3 황주영(가명)

당시 황주영(70·가명)씨는 61살이었다. 적잖은 나이였음에도 생계 때문에 화장품 판매 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남편이 중풍으로 몸져누워 있었다. 그날도 중앙로에 위치한 화장품 회사에 출근하는 길이었다. 그날따라 지하철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어요. 저도 서서 갔지요. 졸업식이 있는 시즌이기도 했고, 그 시간대가 백화점에서 일하는 아가씨들 출근하는 시간이었거든요. 나는 반대쪽 창문(화재가 난 1079호 열차가 있는 방향) 쪽으로 서서 가고 있었습니다. 10시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그날따라 조금 늦었습니다. 매일 타고 가는 열차가 있는데 그걸 놓치고 뒤차를 탔지요.

대구역에서 중앙로역으로 열차가 들어갈 때 불이 나는 걸 봤습니다. "엄마야, 불났다"라고 말했는데, 젊은 애들이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잘못 봤는가 보다 생각했지요. 중앙로역에서 내리려고 출입문 쪽에 가서 섰습니다. 내리려는데 문이 금방 콱 닫혔어요. 기관사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라며 방송을 하더라고. 그런데 문이 열릴 기미가 안 보이는 거예요. 어딘가에서 새까만 연기가 조금씩 들어오는데 문이 안 열려요.

목에 하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서 얼굴을 꽁꽁 싸맸습니다. 기관사에게 가서 "빨리 문 열라"고 말하려고 다음 칸으로 옮겨갔어요. 거기서 전기가 완전히 끊어져서 가운데 문도 안 열리더라고요. 이제 '일 났구나' 하는데 출입문이 확 열렸습니다. 문이 열리니까 새까만 연기가 막 들어왔습니다. 한 치 앞이 안 보이게 깜깜했어요. 누가 도와주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전부 자기 살길 찾아서 먼저 나가려고 했지요.

벽을 더듬어서 '토큰 넣는 곳'(개찰구)까지 나왔는데, 거기서 방향을 잃어버렸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서 있으면 뜨겁고 해서 그냥 앉아버렸어요. 앉아서 막 발버둥을 쳤어요. "사람 살려달라"고…. 한참 있으니까 작은 불이 반짝반짝해요. 소방관이 날 부축하고 일어섰는데 거기까지만 기억나고 기절했어요. 눈을 뜨니 동산병원 응급실이었습니다.

5개월 정도 입원했는데 정신과 치료를 많이 받았어요. 사고당하고 처음에는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불안하고 초조하고, 무슨 일이 생길 것 같고…. 병원에 있으면서도 엘리베이터를 못 탔어요. 지하철을 못 타는 건 당연하고, 택시도 못 타고, 혼자 방에 있지도 못했어요. 매일 악몽을 꾸고, 가스불도 못 켰지요.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어요. 아직도 잠을 잘 못 자요. 지금도 불안하고 초조한 게 남아 있지요. 불낸 사람은 죽었잖아요. 지금도 생각하면 욕 나오지요. 그 사람보다 기관사가 잘못했어요. 시에서 잘못한 거야. 왜 교육도 안 받은 사람을 기관사로 쓴 건지…. 대구=이상원 인턴기자

불빛이 또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까

공포1 곽시환

곽시환(47)씨는 당시 요리사가 9명인 레스토랑의 주방책임자였다. 1080호 전동차에 타고 있었다. 지금은 대구 어린이회관 주차관리원으로 일한다. 오전 10시쯤 중앙로역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집이 있는 방촌역에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지하철이 중앙로역으로 들어서는데 반대편에 불이 붙어 있었습니다. "중앙로역입니다"라고 방송이 나오고 문이 열렸는데 검은 연기가 확 밀려 들어왔습니다.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때 다시 "열차문 닫겠습니다, 열차 곧 출발하겠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봅니다. '다음 역에서 내리면 안전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다들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하철이 움직일 생각을 않고 연기만 계속 들어오자, 승객들이 전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대편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불이 삽시간에 붙었습니다. 집에 있는 아내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다른 생각은 전혀 안 나고 아이 3명만 떠올랐습니다. "여보, 지하철 안에 불이 났는데, 어쩜 나 죽을지도 모르겠어." 아내가 잘못 알아들었는지 "빨리 내려서 택시 타고 오라"고 하더군요.

그때 정전이 됐습니다. 주변이 조용해졌습니다. 왜 이리 조용할까 했는데, 이미 질식돼서 다들 정신이 없는 상태였던 겁니다.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에 휴대전화 빛으로 문을 찾았습니다. 전동차 문을 누가 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줌마들이 내 윗옷 뒤쪽을 붙잡고 따라나왔습니다. 휴대전화 불빛으로 지하 2층으로 올라가는 출입구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더듬다 벽을 짚었는데 너무 뜨거웠습니다. 발밑에 쓰러진 사람들이 밟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겨우 지하 2층에 올라오니 바닥에 물이 흥건했습니다. 더럽다는 생각도 없이 마구 퍼서 마셨습니다. 너무 답답했으니까요. 힘이 들어서 나를 붙잡은 아줌마를 뿌리치려고도 했습니다. 결국 지하 2층에서 주저앉아 쓰러졌는데 눈을 떠보니 영남대병원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니 그때부터 고통이 시작됐습니다. 24시간 내내 기침을 하고, 시커먼 덩어리를 툭툭 뱉어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말을 못했습니다. 글로 적어서 의사전달을 했습니다. 2006년에는 기관지 내시경을 하려다가 기관지가 너무 좁아져서 호스를 집어넣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암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픕니다. 의사는 "암까지 가려고 해도 30년 이상은 걸려야 한다"고 위로합니다만.

육체적 고통이 커서 정신적 고통은 묻어둬

4년을 쉬었습니다. 일을 하려 해도 취업할 곳이 없었습니다. 목이 이러니 면접을 보면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배운 것이 요리밖에 없으니 식당을 열었는데 몸이 더 악화돼서 1년 하고 접었습니다. 그러다 2007년 11월부터 주차관리원으로 일하게 됐습니다. 주차장 한 바퀴를 돌면 숨이 차서 말을 못합니다. 정신적 고통도 많지만 육체적 고통이 있으니 정신적 고통은 그냥 묻어두는 겁니다.

사고 전에는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지금은 자주 가던 모임도 몇 개만 남겨두고 대부분 끊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잘 가지 않지만 가더라도 가장 먼저 찾는 게 비상구입니다. 사고 이후 지하철은 한 번도 안 탔습니다. 중앙로역도 안 가봤습니다. 예전에는 노래방을 자주 갔습니다. 가수 설운도의 < 원점 > 을 즐겨 불렀습니다. 노래방이 주로 지하에 있으니 가지를 못합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2층 노래방을 억지로 데려가기도 하는데, 언젠가 < 원점 > 을 부르다가 너무 바보스러워서 포기해버렸습니다.

집에서도 처음에는 넓은 거실에서 잠을 잤습니다. 안방은 밀폐됐다는 느낌에 답답했습니다. 기침이 심해서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했고요. 2년 정도 거실에서 살았는데, 이러다 부부 사이가 벌어지겠다 싶어서 꾹 참고 안방에 들어갔습니다. 정신과 치료도 많이 받았습니다. 병원에서 특별히 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마음을 우려내도록 유도하는 정도입니다. 잠을 자다가 그때 사고가 떠오르고 괴롭지만 내 스스로 이겨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이니까요.

나중에 아줌마를 봤습니다, 내 허리춤을 잡고 따라나오던 아줌마를요.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수성경찰서에서 "휴대전화를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와 같은 영남대병원에 입원한 아줌마 부상자가 주웠다고 하더군요. 알고 보니 그 아줌마였어요. 지금은 스마트폰을 씁니다. 메인 화면에는 손전등 기능을 깔아놓았습니다. 나를 살렸던 불빛이 언제 또 필요할지 모르니까요. 대구=김남일 기자namfic@hani.co.kr

공포2 정영자

1080호 전동차에 탔던 정영자(65)씨는 사고 이후 목사가 됐다. 지하 2층에서 느낀 공포가 그를 신앙에 더 밀착하게 만들었다. 1948년생입니다. 부모님 모두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모태신앙입니다. 자수를 하다 한복집을 열었습니다. 여기(반야월 동부프라자) 온 지 20년 됐으니까요. 결혼은 23살에 했습니다. 남편은 교회 장로였습니다.

사고 당시 저는 한복을 만들며 야간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날 다니던 신학교의 졸업식에 참석하려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중앙로역에서 전동차가 문을 한 번 열었다 닫았는데 안 가는 겁니다. '졸업식장에 빨리 가야 하는데 전철이 왜 안 가지?'라고 생각하며 벌떡 일어났습니다. 바깥을 보니 연기가 저쪽 차(1079호)에서 올라오더라고요. 장로님(남편)에게 곧바로 전화를 했어요. "전철에 불난 거 같은데 차가 지금 안 가고 문이 잠겼어요"라고 말하자마자 전화가 딱 끊겼습니다. 그게 마지막 말입니다.

연기가 들어와 사람들이 기침을 했습니다. 전날 저는 아이들과 교회 앞에서 전도를 했어요. 갖고 있던 전도 용지를 (연기를) 부치라고 사람들에게 나눠줬습니다. 교회를 다니면 찬양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늘 목캔디를 넣고 다닙니다. 목캔디도 나눠줬어요. 마지막 한 알은 제 입에 넣었습니다. 그 순간 전동차 문이 열렸습니다. 나갔는데 벌써 (지하 3층에) 연기가 꽉 차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앞이 캄캄한데 숨이 벌써 탁 (목에) 걸리는 겁니다.

계단을 찾았습니다. 한참을 더듬거리니 계단이 나왔습니다. 2층까지 왔습니다. 중앙로는 우리가(나이 많은 사람들이) 갈 일이 없거든요. 그래서 위치도 몰랐습니다. '죽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하고 벌떡 일어나서 찬송가 < 하늘 가는 밝은 길이 > 를 불렀습니다. 찬송가를 부르며 춤을 췄습니다. 춤을 추며 한참 몸을 도는데 손에 뭔가 걸렸습니다. 벽이었습니다. 벽을 만졌으니 제 위치를 안 겁니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지하 1층 바로 밑까지 간 겁니다. 거기에서 플래시가 왔다갔다 하는 걸 봤습니다, 연기 속에서요. 소방대원의 불빛이었습니다.

제가 전도지를 나눠준 사람을 6개월 뒤 부상자 대책위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제 나이 또래고, 또 한 명은 알고 보니 친동생 친구였습니다. 남은 생을 하나님이 살려준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뒤 2008년 대학교에 다시 들어가 사회복지와 유아교육을 배웠습니다. 2009년 교회를 세우고 목사가 됐습니다. 저야 신앙에 의지해 이만큼 살지만 (부상자 가운데) 힘든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어린 환자들이 자라며 (후유증이) 평생 가잖아요. 그런 아이들을 배려하는 대구시의 대책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대구=고나무 기자dokko@hani.co.kr

어떻게 취재했나

부상자 151명 중 대구지하철 부상자대책위원회로부터 81명의 부상자 연락처를 받아 < 한겨레21 > 기자 5명이 각각 몇 차례씩 접촉했다. 연락처가 없는 부상자는 소속 기관과 관련자를 취재해 추가로 추적했다. 대부분 인터뷰를 거절했고 어렵게 8명을 만났다. 5명은 대구에서 직접 만나 한두 시간 이야기를 들었다. 대만에 있는 수녀와 만나기를 꺼린 정찬규(가명)씨는 각각 전자우편과 전화로 인터뷰했다. 부상자대책위원회, 대구시 담당 공무원, 정신과 치료를 맡은 의료진 등 관련자를 폭넓게 접촉했다. '대구지하철 화재사고 부상자 보고서'(계명대 산학협력단) 등 보고서와 논문 5편을 참고했다. 1995년 일본 도쿄 지하철에서 옴진리교에 의해 사린가스 테러가 벌어졌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생존자 인터뷰를 모아 논픽션 < 언더그라운드 > (문학동네 펴냄)를 펴냈다. 부상자들에 대한 접근과 태도에서 하루키의 책에 빚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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