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영화 '건축학개론'
그런 때가 있었다. 그의 모든 말이, 손짓이, 표정이 암호가 되었던 나날들이, 술기운을 빌려 동네가 떠나가도록 그녀의 이름을 불렀던 밤들이. 평생 당신이 얼마나 많은 고백을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랑을 하고, 얼마나 많은 이별을 겪었던 간에 첫 고백의 순간과 첫사랑의 기쁨과 첫 이별의 아픔은 공평하게도 단 한번뿐이다.
22일 개봉하는 < 건축학개론 > 은 그토록 서투른 시절 통과한 첫사랑과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이 지쳐갈 때' 찾아온 '스러져가는 너의 기억'에 대한 영화다. 대학교 1학년 가을. 건축과 학생 승민(이제훈)과 음대생 서연(수지)은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마주친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승민과 서연은 건축을 이해하기에 앞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부터 이해하라는 교수의 과제를 함께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마음을 차마 확인하지도 못한 채 엉뚱한 오해 속에 이별한다. "예전에 약속했잖아. 네가 내 집 지어 주기로…." 15년 후, 건축가로 일하고 있는 승민(엄태웅) 앞에 불쑥 나타난 서연(한가인)은 두 마음의 황무지에 세운 첫사랑의 머릿돌을 발견해낸다.
명필름 제공
봉준호의 조감독을 거쳐 < 불신지옥 > 으로 데뷔한 이용주 감독은 실제 건축학을 전공했다. < 건축학개론 > 은 애초에 그의 첫 작품이 되었을 영화다. 지난 10년간 보수, 개조, 증축을 반복한 시나리오 위에 영화 명가(名家) 명필름의 미장과 도장을 거친 < 건축학개론 > 은 < 8월의 크리스마스 > < 봄날은 간다 > 이후 명맥이 끊긴 충무로 멜로영화의 부활을 알린다. < 파수꾼 > < 고지전 > 으로 지난해 각종 신인상을 휩쓸었던 이제훈은 < 건축학개론 > 의 가장 탄탄한 기둥 역할을 한다. 끝내 발화되지 못하고 꺼져버린 사랑에 오열하는 이제훈과 화장기 없는 말간 연기로 스크린을 밝히는 수지는 일생 단 한번밖에 찍을 수 없는 영화를 찍었다. 뮤지컬 배우로 이름을 알린 승민의 친구 '납뜩이' 역의 조정석은 < 건축학개론 > 의 웃음과 위로를 책임진다.
"이젠, 버틸 수 없다고…." 동그란 CD플레이어에서 기습처럼 재생되던 전람회의 노래 '기억의 습작',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확인하는 삐삐의 음성 메시지, 하드1기가의 최신형 펜티엄 컴퓨터로 접속하던 단발음의 PC통신, 무스 바른 가운데 가르마 머리와 H.O.T. 스타일의 힙합바지. 96학번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 건축학개론 > 은 한때 '엑스세대'라고 불렸던 1990년대 '신인류'의 모든 소품들을 추억의 이름으로 소환한다. 그렇지만 < 건축학개론 > 은 특정세대의 특수한 감성과 기억에 호소하는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보편적 연애의 구체적 경험을 바닥에 깔고 첫사랑을 구성하는 1만개의 너트와 볼트로 견고한 집을 짓는다. 이 집에 들어선 이후 관객들은 순간 먹먹하게, 때론 아련하게 정신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기분 좋은 기억의 최루다.
< 백은하 기자 una100@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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