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16) 슬픔을 채색하는 환상적 서정.. 시인 안현미

2012. 5. 2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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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선 같았던 가난한 영혼의 검은 추억가파르게 반전하는 절망과 희망의 경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엄마, 어느 날 갑자기 바뀐 엄마, 그 변신하는 엄마들'이라고 안현미(40) 시인은 자전적 산문 '시마할'에 썼다. 아버지는 강원도 태백 장성광업소 부근에서 서른도 되기 전에 남편과 사별하고 딸 둘을 키우던 여인을 만나 그를 낳았다. 아버지는 탯줄을 직접 끊어주었고 갑자기 불어난 아우라지 강물에 떠내려가던 젖먹이를 구하기 위해 강에 뛰어들 정도로 딸을 예뻐했다. 하지만 그는 여섯 살 무렵 문막에 살고 있던 아버지의 조강지처에게 보내진다.

그에게 남은 건 온통 고장 난 추억뿐이다. 탄광촌의 검은 산. 검은 아버지. 검은 시간. 검은 눈물. 모든 게 검게 태어나 검게 죽는 땅 혹은 검은 그림자처럼 사라진 엄마. 세월을 건너뛰면 사춘기 시절이다. 서울 비원 앞 월세 문간방. 엄마는 술집 주방으로 일하러 가고, 심지가 엉망인 석유곤로에 라면을 끓여 채널 손잡이가 빠진 채 수신 화질이 엉망인 흑백텔레비전을 보며 혼자 먹던 저녁들. 회수권 살 돈이라도 보태기 위해 음식쟁반을 들고 미로 같은 청계천 광장시장을 헤매고 돌아다니던 시절들. 너무 이르게 도착한 절망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희망 사이로 돌아온 무법자 같은 아버지….

가난 때문에 인문계보다 연합고사 커트라인이 높은 서울여상에 진학해야 했고, 졸업 후 대기업 사무보조원으로 취직해 살다가 20대 후반에야 서울산업대학 문예창작과 야간반에 진학해 시를 배웠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중략)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거짓말을 타전하다' 부분)

아현동 셋방에서 겁 없이 결혼도 하고 겁 없이 아이도 낳은 뒤 늦깎이 대학생이 된 그는 낮에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회사에 다녔고 밤에는 수업을 들으러 헐레벌떡 뛰어다녔으며 휴일엔 옥탑방에서 책을 읽었다. 여상, 불 꺼진 방, 더듬이가 긴 곤충들 등으로 그려지는 아현동 시절은 난파선 같았던 성장기에서 빠져나오는 이항대립의 공간이기도 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고 말할 때, '∼이었지만'을 경계로 앞 문장은 뒤 문장에 의해 뒤집힌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고 말할 때도 앞 문장은 뒤 문장에서 무참히 무너진다. 이렇게 앞과 뒤는 가파르게 반전하지만 실은 고독과 슬픔의 동어 반복에 다름 아니다. '우우, 우, 우'는 지금도 인생이라는 막장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발신음일 것이다. 그 발신음은 그가 읽고 있는 책 속으로 스민다.

"읽어보지 못한 소설의 제목을 읽으며 어떤 섬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당신을 생각한다 그 가능성의 다른 이름은 미셀 우엘벡이 될 가능성도 있고 내가 살아보고 싶었던 죽음일 가능성도 있다 혹은 내 인생에 스무 살 때 등장해 '넌 도라지꽃을 닮았어'라는 한 문장을 말한 이후 내 인생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 사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경우의 가능성으로 어떤 섬의 가능성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어떤 섬의 가능성' 부분)

프랑스 작가 미셀 우엘벡의 소설 제목 '어떤 섬의 가능성'을 발음해보면서 시의 화자는 '가능성'이라는 단어에서 인생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합체되는 느낌을 받는다. 존재 조건의 이중성이 명징함과 모호함의 경계에서 대비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섬의 가능성'이라는 말에 자신의 운명을 슬쩍 포개놓는다. 현실의 불우를 자신만의 환상으로 채색하며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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