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태극기와 애국가 / 진중권

2012. 6. 19.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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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애국'이니 '구국'이니, 해방 전후사에나 등장할 법한 '딸國질'이 난무한다. 이 복고적 언어 취향은 주로 극우파나 주사파에게서 발견된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이 두 세력이 똑같이 '조국'을 사랑한다고 떠들어댄다.

사실 극우파와 주사파에게 '조국'이라는 말은 각기 다른 것을 의미한다. 전자에게 '조국'은 '국가체제'를 의미하고, 후자에게 '조국'은 '민족국가'를 의미한다. 결국 극우파나 주사파나 각자 제 '조국'에 극성스럽게 충성하는 셈이다.

극우파는 민족을 가리지 않는다. 그 국가의 주인이 일본이든 미국이든, 그들에게는 충성할 '국가체제'만 있으면 된다. 반면, 주사파는 체제를 가리지 않는다. 통일된 '민족국가'라면, 설사 그 국가의 체제가 봉건적 전체주의라도 무방하다. 주사파에서 전향한 뉴라이트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일본의 식민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주사파였다가 전향한 새누리당의 하태경 의원도 몇년 전에 했던 친일 망언으로 구설에 오른 바 있다.

반면, 이석기 의원은 애국가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세상을 짜증나게 했다. 뒤늦게 자신의 발언이 자유주의적 신념의 표현인 양 위장하나, 그 망언에서 우리는 분단된 나라의 반쪽을 결코 조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그의 고집을 느낀다. 당권파의 이상규 의원은 '백분토론'에서 끝내 방청객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개인에게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있다. 하지만 공인, 특히 유권자의 뜻을 대의해야 하는 의원은 다르다. 그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출마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 논리로 '친박' 의원들 역시 국가관을 검증받을 필요가 있다. 자연인으로서 그들은 쿠데타를 혁명이라 부를 권리를 누린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헌정을 부정하는 그 생각을 가진 이들이 공인이 되는 일은 허용돼서는 안 된다. 극우파들은 자기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다'고 외친다. 자유민주주의가 뭔지 알기나 할까? 자유주의는 각 개인에게는 국가도 침범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며, 민주주의는 인민이 통치하는 인민주권의 체제를 가리킨다.

그런데 극우파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부정하는 국보법으로 '자유주의' 신념을 파괴하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대를 이어 독재정권을 찬양함으로써 '민주주의' 이념을 부정한다. 극우파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인 셈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적이 외려 자유민주주의자 행세를 하니, 진보진영에서는 역편향으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 자체를 냉소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부정해야 할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극우파에 의한 자유민주주의의 '오염'이다.

극우파들은 진보진영에서 '대한민국'을 부정한다고 비난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가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 자체가 아니다. 이승만이 세우고, 박정희가 살찌우고, 전두환이 구했다는, 대한민국에 대한 당신들의 해괴한 '해석'이다. 헌법에 명시된 대로 대한민국은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세워졌고, 몸 바쳐서 열심히 일한 민초의 노동으로 발전했고, 민주화 운동을 통해 군사독재의 사슬에서 구원받았다. 우리가 긍정하는 것은 바로 '이런' 대한민국이다.

태극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부정하는 것은 태극기가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태극기를 들라고 강요하는 억압적인 군사문화다. 강요되는 태극기는 국가의 상징이 아니라 특정한 정권, 즉 독재정권이 우리 입에 물린 재갈일 뿐이다.

우리가 부정하는 것은 조회시간에 억지로 부르던 애국가, 전두환을 연호하라고 억지로 들려주던 그 태극기다. 우리가 긍정하는 것은 80년 금남로에 펼쳐졌던 그 태극기, 도청 광장에 울려 퍼지던 그 애국가다.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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