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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미혼 여기자가 직접 사후피임약 처방받아보니..

입력 2012. 09. 07. 08:32 수정 2012. 09. 0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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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데 20분, 의사상담은 단 4분. 상담도 의례적 질문 뿐-"사후피임약 처방 받으러 왔다"는 말에 위아래 훑어보던 간호사, 약사에 수치심 느껴-72시간 지났지만 "불안하다" 사정하니 약 처방해줘

"내가 죄라도 저질렀나요."

사후피임약을 손에 넣기까지는 무척 힘들었다. 1만원이 넘는 비싼 약값도 약값이지만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으러 왔다는 한 마디에 '환자'를 보는 눈빛에서 '문란한 여자'를 보는 눈빛으로 바뀌는 사람들의 시선을 참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뿐만 아니라 의사와 간호사, 약사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사후피임약 처방전은 한국사회 여성에겐 '주홍글씨'였다. 의사의 상담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이지만 약 처방까지 걸린 시간은 4분에 불과했다. 전문 상담은 없었다.

이런 상황은 대형병원이나 동네병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달 31일 사후피임약을 처방받기 위해 서대문구의 한 종합병원을 찾았다. '당당하자'고 스스로 다짐했지만 "어떤 진료를 받으러 왔냐"는 접수창구 직원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작아졌다. 대답을 들은 직원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졌다. 직원은 이전과 달리 작은 목소리로 "보험처리하시겠어요, 아니면 일반진료로 해드릴까요"라고 물었다. 기자는 "무슨 차이가 있냐"고 되물었고, 직원은 "보험처리하시면 처방받은 기록이 남지만 일반진료로 하시면 기록이 남지 않는다. 진료비도 80원 차이"라고 설명해줬다. 사후피임약 처방 기록이 20대 미혼여성에게 이로울 리 없으니 일반진료가 낫지 않겠냐는 얘기였다.

일반진료를 선택한 기자는 5층 산부인과로 향했다. 접수증을 받은 간호사는 또다시 진료목적을 물었고 기자는 재차 '사후피임약'이란 말을 되풀이해야 했다. 접수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20여분을 기다린 뒤 진료실로 향했다. 의사는 마지막 생리시작일과 성관계 날짜를 물었다. 사후피임약 효능 기간 72시간을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한 의사는 별다른 질문없이 "효과가 100%인 약은 없다. 다음부턴 꼭 (사전)피임을 하라"며 약을 처방해줬다. 진료를 기다린 건 20분. 의사와의 상담시간은 단 4분에 불과했다.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건 약국도 다르지 않았다. 처방전을 건네받은 약사는 고개를 들고 기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처방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힐끗힐끗 쳐다보는 약국 직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약값은 1만4000원. 단 1정의 약값 치곤 매우 비싼 금액이었다. 약사는 작은 소리로 기자에게 "되도록 빨리 드세요"라며 '검은' 봉지에 약을 넣어줬다.

같은 날 찾은 서울 영등포구의 'ㅎ'내과에서는 사후피임약이란 말에 간호사들부터 색안경을 끼고 보는 듯했다. '일반진료'인데다 내과진료 분야가 아니어서인지 기자는 환자차트가 아닌 별도 마련된 작은 종이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을 기재했다.

20분이 넘게 기다렸지만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나보다 늦게 온 환자가 먼저 진료실을 향했다. 조심스레 접수창구에 가서 물었더니 "일반접수가 아니라 누락됐다"면서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25분여를 기다린 끝에 의사를 마주했다. 의사는 성관계 날짜를 물은 뒤 72시간이 안 됐다는 점만 확인하고 약을 처방해줬다. 부작용에 대해선 "구토 증상이 있을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설명서를 읽어보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100m가량 떨어진 인근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접수직원은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으러 왔다는 말에 '왜 그걸 여기서…'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비인후과에서도 사후피임약 처방이 가능하다는 점을 모르는 듯 했다.

마지막 관계일을 묻는 의사의 질문에 72시간이 살짝 지난 시점을 댔다. 의사는 "사후피임약은 최대 72시간전에는 먹어야 효과가 있다"며 약 처방을 주저했다. 기자는 "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너무 불안하다. 몇시간 안 지났으니 제발 처방해달라"고 사정했고 의사는 "환자분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해드리긴 하는데 혹시 모르니 산부인과에 꼭 가보라"며 처방전을 내줬다. 감사하단 말을 남기고 진료실을 나오는데 뒷통수가 따가웠다. '당당하자'고 결심했지만 이유 모를 죄의식과 수치심에 병원 문턱을 나서는 기자는 누가 볼세라 처방전을 접어 가방에 숨길 수밖에 없었다.

황혜진 기자/hhj6386@heraldcorp.com- 헤럴드 생생뉴스 Copyrights ⓒ 헤럴드경제 & heraldbiz.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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