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저항 확산되자 긴급조치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작"

구혜영 기자 2012. 9. 11.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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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 유인태 의원.. "박근혜 재판단 발언은 유신적 발상"

민주통합당 유인태 의원은 11일 의원총회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의 인민혁명당 발언을 비판하다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의총이 끝난 뒤 그를 찾았을 때에도 그는 복받치는 감정을 다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유 의원은 "1974년 4월14일, 나는 잊을 수가 없다"며 말을 꺼냈다. 그날은 1974년 4월3일 긴급조치 4호에 따라 50만원의 현상금이 걸려 있던 수배자 '서울대생 유인태'가 200만원의 현상수배자가 되어 정보부로 끌려간 날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지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여정남(경북대 학생회장)의 서울 신설동 하숙집에서 나온 날이기도 하다.

민주통합당 유인태 의원이 11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의 인민혁명당 발언을 비판하다 목이 멘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서성일 기자그날 밤, 유인태는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북부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리고 이튿날 그는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 분실에서 고문당했다. 그가 가입해 있던 민청학련과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라는 단체를 한 두름으로 엮는 날조가 진행된 것이다. 처음 수사관들은 유인태에게 "여정남에게 네가 모든 걸 지시했다고 자백하라"고 했다. 그러자 유인태는 "이분은 선배인데 내가 어떻게 지시하느냐"고 했다. 그러자 수사관은 "인마, 너 선배 좋아하지 마. 서울대 애들은 지방대 애들을 우습게 알잖아"라며 막무가내로 자백을 요구했다.

3일 뒤 끌려온 여정남에게 정보부는 유인태의 지령을 받았다고 자백하라고 압박했다. 그리고 3개월여의 수사 끝에 그해 7월9일 결심공판에서 유인태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듬해 2월15일과 17일, 긴급조치 위반으로 기소된 피고인들이 대통령 특별조치로 석방될 때도 유인태는 사형수였다. 그가 풀려난 것은 1978년 7월 말이었다. 교도관이 대필한 사건에 지장을 찍고 들것에 실려 들어간 뒤 꼭 4년4개월 만이었다. 유인태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이렇게 엮였다. 유 의원은 "정보부는 민청학련이 마치 배후조종을 받아서 행동했다고 하지만 역전의 베테랑들이 중형을 감당하면서 사주를 받는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억지 조작"이라고 말했다.

유 의원은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역사적으로 다시 판단할 부분이 있다'고 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의 발언은 유신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박 후보 측이 인혁당 유가족도 만날 수 있다고 했지만 이런 역사의식이라면 진정한 화해 의지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인혁당 재건위 유가족들은 1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박 후보의 역사인식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고 그는 전했다.

-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바라보는 박 후보의 입장을 비판했다.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나.

"판결이 두 개라고 말하는 걸 듣고 귀를 의심했다. 박 후보 머릿속에는 당초 판결(1975년)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신념이 있다는 거 아닌가. 대법원 판결조차 유신적 판결로 이해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안된다."

- 박 후보가 '인혁당 사건의 여러 증언을 다 감안해서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1974년 유신에 저항하는 세력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됐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이 있었고, 10년 뒤 인혁당을 재건해 민청학련의 국가전복 활동을 지휘했다는 혐의를 씌운 게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여정남 선배(경북대 학생회장 출신, 1975년 4월 사형)가 1차 인혁당 관계자들에게 교통비를 얻어 쓴 걸 꼬투리 잡아 인혁당을 재건하려 했다며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던 게 박정희 정권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건가."

- 박 후보 측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 유가족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화해는 진심어린 사과가 선행돼야 한다. 만나겠다고 해놓고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나."

중앙정보부가 1974년 4월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전복을 기도했다고 발표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연루자들이 법정에서 형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당사자로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실체는.

"1974년 유신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이 확산되자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체포된 지 4일 만에 여정남으로부터 내가 지령을 받았다는 내용으로 조서가 꾸며졌다. 여 선배가 잡혀들어온 다음에는 그가 내 지령을 받았다고 조서가 뒤집어졌다. 그 뒤 여 선배와 만난 사람들을 추적하다 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니 공소장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고 했다. 잡혀들어온 사람들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유 의원은 이 대목에서 목이 멘 듯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사형수들은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면회도 못했고 시신조차도 가족 품에 안기지 못했다. 화장장으로 가는 버스를 가로막던 사람들 가운데 문정현 신부가 있었다. 경찰이 시위대를 버스로 깔아뭉갠 탓에 문 신부는 불구가 됐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시작과 끝 모두 조작이다."

- 역사관이 대선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대선 후보의 역사관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일본이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두고 자발적 행위라고 하지 않았나. 일본이 다시 강해진다면 우리나라를 침략하겠다는 뜻이다. 박 후보의 역사인식은 유신독재 시절을 동경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만드는 나라가 어떨지 정말 걱정스럽다."

< 구혜영 기자 koohy@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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