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엘지, '초딩 싸움' 40년

변진경 기자 입력 2012. 11. 2. 10:23 수정 2012. 11. 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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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삼성전자가 900ℓ 냉장고를 '세계 최대 용량'이라며 내놓았다. 한 달 뒤 LG전자는 910ℓ 냉장고를 출시했다. 다음 날 삼성전자는 인터넷에 '냉장고 용량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동영상 한 편을 올렸다. 두 회사 냉장고를 눕혀놓고 물 붓기로 용량을 비교하니 삼성 냉장고가 더 많이 들어가더라는 내용이다.

LG전자는 발끈했다. 허위 광고 중지, 사과,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는 내용증명을 보냈다. 삼성전자는 캔커피와 참치캔을 두 냉장고에 집어넣어 비교하는 후속 광고로 화답했다. 약이 바짝 오른 LG전자는 법원에 광고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삼성전자는 휴대전화 액정 위에서 버터를 녹여 발열 정도를 보여준 LG전자의 광고를 들먹이며 '너희도 똑같다'고 맞섰다.

삼성과 LG가 싸운다. 냉장고에 물을 붓고, 휴대전화 위에 버터를 올리고, 공장에 잠입하고, 멱살을 잡고, 욕설을 내뱉으며 싸운다. 특히 가전 사업 부문에서 두드러진 삼성과 LG의 기 싸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두 기업의 대결은 1969년, 삼성이 전자 산업에 진출한 직후부터 시작됐다. 당시 금성사(현 LG전자) 및 59개 전자 업체가 삼성의 전자업 진출을 허용한 정부에 "좁은 국내시장에 삼성까지 참여하면 국내 가전업계는 모두 도산할 것이다"라며 진정서를 냈다. 이에 삼성은 당시의 삼성 소유 신문 < 중앙일보 > 를 통해 반박하고 금성사는 다시 금성 소유 신문 < 국제신보 > 에서 재반박하는 공방이 6개월여 동안 벌어졌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모태 악연'은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의 장남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회고록에서도 드러난다. "(1968년 봄 안양 골프장) 야외 테이블에서 아버지(이병철 회장)와 구(인회) 회장님, 내가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가 아버지가 전자 산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구 사장, 우리도 앞으로 전자 산업을 하려고 하네.' (중략) 구 회장은 벌컥 화를 내면서 '남으니까 하려고 하지'라고 느닷없이 쏘아붙였다. 즉, 이익이 보이니까 사돈이 하는 사업에 끼어들려고 하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중략) 아버지는 구 회장이 화를 내자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민망해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일로 두 분 사이는 아주 멀어졌다."( < 묻어둔 이야기 > 167쪽, 1993, 청산)

ⓒ유튜브 갈무리 삼성전자는 두 냉장고에 물을 부어보니 자사 냉장고 용량이 더 크다고 홍보했다.

ⓒ유튜브 갈무리 이후 캔커피를 넣어 비교하는 후속 광고도 만들었다.

사돈지간인 삼성·금성의 두 회장이 얼굴을 붉힌 뒤부터 두 기업은 이른바 '별들의 전쟁'을 계속 벌여왔다. 그런데 그 전쟁의 양상은 기업 규모와 명성에 걸맞지 않게 유치찬란했다. 금성사가 '기술의 상징'이라는 기업 광고 문구를 만들면 삼성전자가 '첨단 기술의 상징'으로 받아치고, 이를 금성사가 다시 '최첨단 기술의 상징'으로 맞대응하는 식이다.

가전업계가 호황을 맞은 1980년대에 전자공업진흥회 회장을 지낸 김완희 박사의 저서 < 두 개의 해를 품에 안고 > (1999, 동아일보사)는 당시 컬러텔레비전 국내 시장 선점을 두고 경쟁하던 두 기업 사장들이 몸싸움을 벌인 일화도 전한다. 지나친 광고 경쟁을 자제하라며 당시 상공부 측이 마련한 자리에서 강진구 전 삼성전자 사장과 허준구 전 금성사 사장이 언쟁 끝에 서로 멱살을 잡았다는 것이다(114쪽).

삼성과 금성의 광고 문구들. 한 단어씩 추가하며 치고받는 모습이다.

1984년 6월호 < 신동아 > '4대 톱재벌의 혈투지대'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실렸다. "지난해 12월 중순 삼성전자는 잠실체육관 사용 계약을 서울시 관계 당국과 은밀히 맺어놓고 올해 1월10일 대대적인 소비자운동대회(자사 경영전략과 서비스 계획 등을 알리는 일종의 홍보 행사)를 벌여 연초부터 금성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속셈이었으나, 금성사 측이 이 행사 계획을 탐지하고 서울시 당국을 온갖 방법을 동원해 움직여서 이미 사용 계약 일정이 짜여 있던 잠실체육관을 삼성보다 3일 앞선 1월7일에 사용하기로 했다. 이 보고를 접한 이병철 회장은 경영진을 불러 왜 이리 당하기만 하느냐고 엄한 기합을 줬다."

지펠 냉장고, 이끼냐 우담바라냐

당시 < 신동아 > 에 이 기사를 쓴 연합통신 최재완 기자는 "이들(삼성·금성 간)의 싸움에는 비신사적인 행위나 권모술수, 마타도어(흑색선전) 등 목적 달성을 위해 동원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죄다 동원됐으며, 앞으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싸움의 패턴이나 형태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는데, 이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두 기업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해온 지난 30여 년 동안 두 기업 간 '초딩 싸움'의 역사 또한 차곡차곡 쌓였다.

현재 용량 싸움을 벌이는 냉장고만 해도 사례가 여러 건이다. 1993년 삼성전자 직원 두 명이 LG전자 거래처 명함에 자기 이름을 새겨 LG전자 냉장고 공장에 잠입한 뒤 생산 공정을 훔쳐보다 적발됐고, 1995년에는 자사의 냉장고만이 육각수(화학적 구조가 6각형 고리구조를 이루는 물)를 만들 수 있다며 연일 '육각수 전쟁'을 치렀다. 2005년에는 삼성전자가 대리점에 전시된 지펠 냉장고 외벽에 3000년 만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가 피었다고 홍보하자 LG전자가 "우담바라가 아니고 청결 문제로 생기는 이끼다"라고 어깃장을 놓는 '우담바라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삼성이 홍보한 지펠 냉장고 외벽의 우담바라. LG는 이끼라고 주장했다.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보인 삼성·LG전자의 싸움도 유치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 2005년 '네잎클로버 현상(화면을 눌렀을 때 네잎클로버 형태로 번지는 현상)'을 둘러싼 다툼, 2006년 타임머신 텔레비전을 겨냥한 삼성전자의 비방 광고와 그에 대한 LG전자의 소송전, 2006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호텔방 LG전자 텔레비전 교체 일화 등 사례가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압권은 지난해 벌어진 '멍청한 XX들' 사건이다. 두 기업이 3D 텔레비전 화질을 둘러싸고 연일 공방을 벌이던 당시 김현석 삼성전자 전무가 "LG디스플레이에는 엔지니어가 멍청한 XX들밖에 없는 것 같다"라고 말한 것이다. LG전자 측에선 진짜 그런 말을 했는지를 묻는 내용증명을 삼성전자에 보냈고, 결국 삼성이 사과하는 것으로 싸움이 일단락됐다.

둘의 자존심 경쟁이 꼭 제품을 매개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2005년 LG전자는 자사의 성공 스토리를 표지 기사로 소개한 미국 주간지 < 비즈니스 위크 > 최근호를 보도자료를 통해 홍보했는데, < 비즈니스 위크 > 의 표지가 애매하게 가려져 있다(아래 이미지 참조). 한국의 LG(KOREA'S LG) 뒤에 이어지는 문장, '제2의 삼성이 될 것인가'(Will it be the next Samsung?)라는 문장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삼성전자 측은 이를 '삼성 말살 사건'이라 부르며 비웃었다.

재벌 독과점 체제의 문제점

왜 자꾸 싸울까? 두 기업은 서로 '상대가 먼저 시비를 건다'고 주장한다. LG전자 홍보팀 관계자는 "홍보하는 입장에서도 이런 싸움이 참 소모적이고 보기 안 좋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영업 현장에서 '저쪽에서 이렇게 치사하게 구는데 우리만 점잖게 있을 수 있냐'라는 목소리도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형국이다"라고 말했다. 반면 삼성전자 관계자는 냉장고 동영상 싸움 이후 '복수'처럼 벌어진 10월15일 LG전자의 갤럭시S3 배터리 소모량 실험을 예로 들며 "걔네는 늘 그런 스타일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스마트폰에서 희비가 엇갈리고 백색 가전 부문에서 근소한 차이로 점유율 경쟁을 벌이는(둘은 상대 기업이 발표하는 제품별 시장 점유율을 인정하지 않으며, 어떨 때는 둘이 발표하는 점유율을 합치면 100%를 넘기도 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양 기업의 싸움이 더 치열해지는 경향도 있다.

'한국의 LG' 성공 스토리를 소개한 < 비즈니스 위크 > (오른쪽). LG전자는 '제2의 삼성이 될 것인가'라는 부제를 교묘하게 가린 보도자료를 만들었다(왼쪽).

기업 간 경쟁이 가져다주는

긍정적 효과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대기업의 싸움을 바라보는 소비자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다. 소비자시민모임 김자해 사무총장은 "선의의 품질·가격 경쟁을 벌인다면야 소비자 처지에서 당연히 환영하겠지만 현재 삼성·LG전자가 보여주는 모습은 앞에서는 조금 더 크게, 빠르게 만들겠다고 경쟁하면서도 뒤에서는 가격 담합을 하는 등 이중적인 측면이 커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실제 삼성·LG전자는 싸움의 역사만큼이나 담합의 전통 역시 유구하다. 1984년과 1987년 두 회사는 컬러텔레비전 같은 가전제품에 대해 서로 가격을 맞추고 소비자 보증 수리를 제한하는 등 짬짜미를 했다가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된 적이 있다. 그 뒤에도 한국마사회·경륜본부의 중계용 텔레비전 입찰에서 서로 입찰 가격 정보를 교환하고 한국마사회 건은 삼성전자가, 경륜본부 건은 LG전자가 낙찰받기로 나눴고(2001년), 정부 조달청과의 시스템 에어컨·텔레비전 가격 협상에 공동 대응해 조달 단가를 높였으며(2008년), 함께 모여 세탁기 최저가 모델을 단종시키고 텔레비전 판매 장려금을 줄이고 노트북 출고가를 인상하기로 담합(2008~2009년)한 사실이 밝혀져 과징금을 물기도 했다.

공정위 의결문에 드러난 두 회사의 친분은 꽤나 돈독하다. 마냥 으르렁댈 줄 알았던 두 전자회사 관계자들은 함께 인도 요리 전문점 '강가'에서 점심을 먹고 호프집 '겔라포트'에서 맥주를 마시고 '멕시칸치킨'에서 닭도 뜯으면서 판매 가격을 담합하고 계약 낙찰권을 사이좋게 나눠가졌다. 경제개혁연대 김상조 소장(한성대 교수)은 삼성·LG전자의 이런 기이한 경쟁 관계의 원인을 재벌 독과점 체제의 시장 구조로 설명했다. "대표 기업이 많아야 서너 개에 그치는 독과점 시장에서는 경쟁이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양상으로 나타나기 쉽다"라는 것이다. 김 소장은 또 "재벌 기업이라는 특성상 총수가 지시하면 이견 없이 따라가야 하는 그룹의 의사결정 시스템이 그런 경쟁 양상을 더더욱 부추긴 측면도 있다"라고 말했다.

변진경 기자 /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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