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조선의 '솔로대첩', '솔로대책'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입력 2012. 12. 12. 21:39 수정 2012. 12. 12.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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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나무의 어여쁨이여! 활짝 핀 그 꽃이로다.(桃之夭夭 灼灼其華)"( < 시경(詩經) > )

1500년 1월, 연산군이 의정부에 내린 전교이다. 얼핏보면 채홍사를 통해 불러온 미녀를 품평하는 폐주(廢主)의 황음무도를 가리키는 말 같기도 하다. 틀렸다. 연산군은 "혼인은 때를 놓치면 안된다"면서 이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 연산군일기 > ). 희대의 폭군이 이럴진대 다른 왕들은 어땠을까. 범국가 차원의 '솔로대책'에 나섰다.

성종은 아예 "전국 25세 노총각·노처녀들의 수를 죄다 파악해서 혼수품까지 주어 혼인시킬 것"을 지시한다.(1472년)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는 영조 임금에게 "혼인을 제때 하는 것은 왕정(王政)의 선무(先務)"라고 못박기도 했다.(1730년) 정조 임금도 "방방곡곡 백성의 집을 두루 살펴 단 한 사람의 홀아비를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노총각·노처녀의 원망이 가슴에 맺혀 울부짖으니 화기(和氣·기의 조화)를 손상한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가뭄과 장마, 천재지변 등의 원인도 "노처녀의 한(恨)이 화기를 범한 탓"( < 중종실록 > )이라고 했다. 심지어 인조 때(1631년) 부제학 이경여 등이 "처형된 가문의 자식 혼인에도 조정이 나서야 한다"는 상소까지 올린다. "누가 처형된 사람들의 자식들에게 시집·장가를 가겠냐. 국가가 골라주지 않으면 안된다"( < 인조실록 > )면서….

홀아비(환·鰥) 및 홀어미(과·寡) 대책도 국가차원의 급선무였다. 이른바 '환과'를 잘 돌본 이는 주나라 문왕이었다. 문왕이 환과를 잘 돌본 덕에 두고두고 선정(善政)의 모범사례로 언급됐다. 맹자는 특히 "환과(홀아비와 홀어미)는 하소연할 곳이 없는 사람들(鰥寡無告)"이라 했다. 신라 유리왕 및 흥덕왕과 고려 예종은 해마다 '환과' 등을 한자리에 모아 잔치를 벌이는 것을 국법으로 삼았다. 연산군 등 조선의 임금들도 앞다퉈 서울의 한성부와 지방의 관찰사를 시켜 '환과' 등 어려움을 호소할 곳이 없는 남녀의 구휼에 신경을 썼다. 오는 24일 전국 각지에서 이른바 '솔로대첩'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어느 대학생이 SNS에 올린 것이 일파만파, 3만5000여명이 모이는 행사로 커졌단다. '솔로대첩' 행사가 민간에서, 즉흥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 서글프긴 하다. 맹자님 말마따나 얼마나 하소연할 곳이 없으면 '모태솔로'든, '돌싱'이든, '그냥솔로'든 '솔로들'이 직접 짝을 찾으러 나간단 말인가. '솔로대첩'을 어루만져 줄 '솔로대책'은 없을까.

<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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