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582일만에 소말리아 해적에게서 풀려나.. '제미니호' 박현열 선장 첫 단독 인터뷰

최보식 선임기자 2013. 1. 7.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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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로 비닐에 싼 돈뭉치 떨어뜨려.. 바닷물 적신 선원들은 덜덜 떨었고"

"우리에겐 시계도 달력도 없었다. 지금 몇 시가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아침에 눈뜰 때마다 '오늘은 며칠이고 무슨 요일'이라며 동료와 꼭 확인했다. 그래서 풀려날 때까지 그날그날 날짜는 기억했다."

'제미니호' 박현열(58) 선장은 극적으로 상황을 꾸미거나 과장되게 말하는 솜씨가 없었다. 그는 한국인 선원 3명과 함께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돼 582일 만에 풀려났는데도 말이다. 이는 최장 피랍 기록이다.

그가 석방된 것은 작년 12월 1일이었다. 공항에서 가진 회견에서 그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다. 국민께 감사하다"는 말만 남기고, 자신이 겪은 고초에 대해 입을 닫았다. 그 뒤로 언론 접촉을 피해왔다.

현대사회에서 해적에게 붙잡혀 지냈던 582일간은 어떠했을까, 그 뒤 삶은 달라졌을까. 해가 바뀌어도 나는 여전히 궁금했다. 한파가 몰아친 날 부산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단신이었고, 선량한 인상을 줬다.

―납치에서 풀려나 귀국한 지 한 달이 됐다. 악몽을 꾸나?

"건강검진과 정신감정을 받았다. 나는 정상적이다. 같이 납치됐던 기관사는 정신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다고 들었다."

―정신적 후유증이 없다는 게 오히려 뜻밖이다.

"납치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법정에서 형(刑)을 선고받았으면 언제 풀려날지를 알 수 있다. 우리 경우는 기약할 수가 없었다. 조급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마음을 비우는 것뿐이었다. 우리가 한 번 승선하면 여섯 달 이상 바다에 떠있다. 이번 경우에는 배를 1년 더 탄 걸로 치자고 자신을 달랬다."

2만t급 싱가포르 선적 '제미니호'는 인도네시아 에서 팜오일 2만8000t을 싣고 아프리카 케냐 로 가고 있었다. 2011년 4월 30일은 목적지 몸바사 항구에 도착하기 하루 전이었다.

"오전 5시 55분쯤 갑판 선원이 '6마일(9.6㎞) 거리에 검은 목선이 있다'고 보고했을 때, '해적선이라면 주위에 쾌속정도 있을 것이니 잘 관찰하라'고 했다. 과연 쾌속정 두 대가 접근해왔다. 우리 배 속도가 13노트(1노트는 1시간에 1852m를 달리는 속력), 쾌속정은 28노트였다. 파도는 잔잔하고 뒤에서 바람이 불어 보트를 뿌리칠 수 없었다."

―해적선이라는 걸 알고도 손 놓고 당한 것인가?

"해적들이 승선하기 어렵게 하려고 우리 선체 둘레에 철조망을 둘렀다. 쫓아오는 쾌속정의 스크루에 걸리게 로프를 잘라서 던졌다. 해적들은 로프를 걷어내면서 접근했다. 선체 옆에 바싹 붙어 공중으로 소총을 쏘고, 로켓포로 화약을 제거한 플라스틱탄 두 발을 발사했다. 그 순간 다른 쾌속정이 배 후미에 철제 사다리를 걸었다."

―배에는 선원 25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렇게 무력했나?

"총성에 군대 경험이 없는 인도네시아·미얀마·중국 선원들은 겁에 질렀다. 우선 선원들을 '피난실'로 내려 보냈다. 그런 뒤 위급 상황을 알리는 통화를 시도하다 붙잡혔다. 해적들은 '선원들이 갑판에 나오지 않으면 배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했다. 상황이 끝났다고 봤다."

―바로 석 달 반 전에 '삼호주얼리호'가 납치됐지만 해적을 소탕해 풀려난 적이 있었다. 당시 석해균 선장처럼 선상에서 어떤 계획을 꾸미진 못했나?

"해적 20여명이 배에 올라와 휴대폰과 워키토키 등 모든 통신 장비를 압수했다. 바로 직전의 '아덴만 여명작전'이 이들에게 학습이 됐던 것 같다. 당시 작전 동영상을 휴대폰에 저장해놓은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 선원들은 침실에서 쭉 갇혀있었다. 선사(船社)와 협상을 할 때면 나를 불러냈다."

―싱가포르 선사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막을 수 있으면 막되, 절대 영화의 히어로처럼 행동하지 마라. 인명이 중요하다고 했다."

―언제쯤 풀려날 것으로 예상했나?

"두세 달쯤 걸릴 것으로 봤다. 그런데 해적들이 우리 정부에 '아덴만 여명작전' 때 숨진 8명의 보상금 800만달러와 수감된 해적 5명의 석방을 요구해 협상이 길어졌다. 바다에 정박한 채 7개월을 보냈다. 나중에 기름이 떨어져 팜오일로 발전기를 돌렸다. "

―우리 정부와 협상을 위해 통화한 적이 있었나?

"해적들의 강압으로 정부 재외국민보호과로 전화했다. 언제까지 요구를 안 들어주면 우리 중 한 명을 죽인다는 말도 전해야 했다. 하지만 불법 단체와 협상할 수 없다는 게 정부 입장이었다. 결국 선사와 몸값 협상에 합의했다. 2011년 11월 29일 아침이 디데이였다."

―몸값으로 얼마나 지급됐나?

"나는 450만달러로 들었다. 해적들이 부풀린 액수일지 모른다. 몸값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협상 조건이 있다. 해적에게 돈을 전달하기 위해 비행기를 빌리는 등 경비가 많이 들었다."

―전액 보험금으로 지불됐나?

"어느 한도까지 보험에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선사에서도 말해주지 않는다."

―해적에게 어떤 식으로 전달됐나?

"소형 비행기로 비닐에 싼 돈뭉치 두 개를 바다에 떨어뜨렸다. 그걸로 약속은 지켰고, 다음 날 아침 우리 배는 출항하는 걸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배와 외국인 선원들만 넘겨주고, 우리 한국 선원 4명은 육지로 끌고 왔다. 그때 한 젊은이가 소총을 겨누며 죽이겠다고 난리 쳤다. 아덴만 작전 때 자기 가족이 숨진 것 같았다. 다른 해적들이 '걱정하지 마라. 절대 죽이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돈일 뿐'이라고 했다."

―육지에서는 어떤 시설에 감금돼 있었나?

"인가와 떨어진 숲 속 공터에서 오렌지색 비닐을 줬다. 그걸로 움막을 설치했다. 해적들도 노천에 담요 한 장 덮고 살더라. 반바지 두 개, 티셔츠 두 개, 담요 두 장, 베개, 매트리스, 하루에 담배 한 갑씩을 줬다. 우리 4명은 처음에는 같이 있다가 나중에 둘씩 분리됐다. 나는 기관사와 같이 있었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냈나?

"화장실을 갈 때를 빼면 움막에서 못 움직이게 했다. 책과 필기도구도 없었다. 그냥 말없이 지냈다. 남은 음식을 던져 놓고 새나 다람쥐가 와서 주워 먹는 것을 관찰했다. 비둘기가 땅을 고르고 있어 알을 낳는가 했더니, 거기에 앉아서 죽는 것도 봤다. 해 넘어가면 캄캄해지니까 밤이 길었다. 달 뜨는 것이 많이 기다려졌다."

―달빛을 봐도 할 것이 없지 않은가?

"할 것은 없지만, 물체의 윤곽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해적들이 주는 식사는?

"밥과 감자 수프를 나눠줬다. 아침에 한 접시를 받으면 점심까지 먹었다. 저녁에는 거의 매번 팥과 알량미, 설탕을 넣고 끓인 일종의 단팥죽을 먹었다. 웅덩이에 비닐을 깔고 고인 빗물을 마셨다."

―씻는 것은?

"우기에는 빨랫비누로 목욕을 했고, 평소에는 손수건으로 물을 묻혀 먼지를 닦아냈다."

―함께 오래 지내면 해적들과 대화도 나누고 친해지지 않나?

"우리를 지키는 해적 부하들은 영어를 할 줄 몰랐다. 무슨 부탁을 하면 무조건 '투모로(내일)'다. 처음 몇 번은 '내일 그걸 들어주려나' 했다. 이들은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몰랐다. 나를 데리고 갈 때면 '유 고 홈(너 집으로 간다)'이라고 했다. 실은 선사와 협상 통화를 하기 위해 데려가는 것이었다."

―몸값을 이미 지불했는데 한국 선원들만 다시 납치됐으니, 싱가포르 선사는 어떤 반응이었나?

"한 달 만에 처음 통화하니, '우리는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 몸을 잘 건사해라. 당신이 선장이니까 다른 선원들을 잘 추슬러라'고 했다."

―선사와 협상이 잘 진척되지 않아 오래 잡혀있었나?

"작년 8월 초 해적들이 '한국 정부 사람이 여기로 왔다'며 좋아했다. 국내의 한 방송사 취재팀을 정부 관계자로 잘못 안 것이다. 해적들은 우리 정부와 협상이 이뤄질 것으로 보고, 선사에는 연락을 끊었다. 이 때문에 협상이 석 달간 중단됐다."

―국내 취재팀의 관심이 오히려 도움이 안 됐다는 뜻인가?

"실제 그랬다. 해적들은 국내 소식을 잘 알고 있었다. 이를 이슈화해 정부를 압박하려고 했다. 매스컴과 접촉도 했다. 한번은 어디서 알았는지 조선일보 전화번호를 건넸다. 내가 통화했다. 당시 기자로부터 '나름대로 정부에서 노력하고 있지만 기사화할 수는 없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해적에게 '신문에 날 것이다'고 말해야 했다."

―가족과의 통화는?

"가족에게 변호사를 사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라고 시켰다. 가족과 통화하는 동안 목을 비틀어 비명이 나오게 했다. 옆에서 소총도 쐈다. 가족과 정부가 개입될수록 협상이 어려워졌을 것이다. 정부에서 원칙을 지키니 결국 선사와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몸값 얼마에 협상이 타결됐나?

"30만달러로 알고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지난번처럼 몸값만 받고 또 풀어주지 않을지 모른다는 우려는 없었나?

"오전 11시쯤이었다. 돈 떨어지는 지점에 나를 데려갔고, 나머지 선원 3명은 구조선이 오는 해안으로 가 있었다. 헬기에서 첫 번째 돈뭉치가 떨어지면 세 명을 먼저 석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 비바람이 쳤다. 돈뭉치가 떨어졌지만, 파도가 높아 구조선이 접근하지 못했다. 우리 선원들은 수영해서 나가려고 몇 번 시도했다. 30분 뒤 두 번째 돈뭉치가 떨어졌다. 나도 통역하는 해적과 함께 해안으로 가니, 바닷물을 적신 선원들이 덜덜 떨고 있었다. 선사에 상황을 설명하니까, 3분 뒤 태극 마크를 단 헬기가 날아왔다. 헬기로 구조돼 해상에 있던 '강감찬호'에 내렸다. 함장이 '여기서부터는 대한민국 영토다. 마음 놓아라'고 말해줬을 때, 내가 안전하다는 걸 실감했다."

그는 고1 때 아버지를 잃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해 조선소에서 일하다가 79년부터 배를 탔다. 현재 몸담고 있는 싱가포르 선사 '글로리십 매니지먼트'에는 1985년 입사했다. 1993년 선장이 됐다.

―앞으로 계획은?

"선사에서 몸을 추스른 뒤 재승선하라고 했다. 오는 4월쯤 다시 배를 탈 것 같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배 타는 일에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나?

"일류 회사는 아니지만 중국인 사장이 대단하다. 귀국할 때 비즈니스석을 마련해줬다. 붙잡혀있는 동안 고생한다고 매달 두 배의 월급이 지급됐다. 지금 놀고 있어도 월급이 나온다. 다시 승선하면 안전사고 없이 운항해 회사에 보답하고 싶다.박현열 선장은 "싱가포르 선사는 우리가 해적에 붙잡혀 있는 동안 고생한다고 매달 두 배의 월급을 줬다"고 말했다./남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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