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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응원문화를 개척한 치어리더계의 대모, 조수진

스토리온 마이퀸 입력 2013. 01. 24. 11:14 수정 2013. 01. 2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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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 김민종의 마이퀸>

김수로, 김민종이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는 '코리안 퀸'을 찾아 글로벌 로드쇼를 시작한다.

응원문화를 만들며 중국 13억 인구의 사랑을 받고 있는 퀸,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STORY 1.발레리나를 꿈꾸던 소녀, 에어로빅의 퀸이 되다!

방송에선 거침없이 독설을 날리고,수백 명의 치어리더를 지도하며 큰 기합과 카리스마로 댄스팀을 이끌고 있지만 사실 어릴 적 나,조수진은 굉장히 수줍음도 많고 부끄러움도 많은 소극적인 소녀였다.아버지의 재혼으로 새엄마라는 무게는 나를 주눅들게 했고,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율동 짜오기 숙제에서 낸, 내가 짠 율동이 뽑히며 운동회에서 전교생이 내가 짠 율동을 추게 되었다.전교생들을 대표해 제일 앞에서 춤을 추는데 그렇게 소극적이고 소심했던 내가 나조차 이상할 정도로 즐거운 마음으로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부터 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어느 여자애들처럼 하얀 드레스에 우아한 동작을 하는 발레리나를 동경하게 되었다.그러나 너무 착한 아버지의 빚 보증으로 차마 발레를 배울 집안 환경이 되질 못했고,발레를 배우고 싶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대신, 숙모를 따라 한 달에2만원,에어로빅 학원을 다니게 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14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거울에 비친 춤을 추는 내 모습을 보며 나는 더욱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집에선 새엄마에게 주눅들지만, 적어도 춤추는 나는 정말 멋있었고,아름다웠다. 에어로빅을 할 때 만큼은 진지함으로 열정을 불태웠고,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에어로빅을 가르치기 시작, 그때부터 나는 '에어로빅 하는 아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여름방학엔 비만 아이들을 위한 수업도 가르쳤는데 지루하고 어려운 어른들의 동작에 재미를 못 느끼는 아이들을 위해 에어로빅을 한국댄스에 접목시켜 아이들의 시선을 끌었고, 이것은 후에 중국에서 조수진 에어로빅 붐을 일으키는 시초가 되었다.

STORY 2.한국 아가씨,에어로빅 하나로 중국을 사로잡다.

중국으로 온 건 다른 큰 이유가 아니었다.새엄마,지긋지긋한 아버지의 빚보증,고졸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들 그 모든 걸 회피하는 수단으로 떠나온 게 중국이었다.에어로빅으로 번 돈으로20살,거대한 대륙 중국으로 넘어왔다.돈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상상도 할 수 없는 허름한 집을 구하고, 100원짜리 훈둔으로 끼니를 때우며 중국어를 빨리 배우기 위해 한국어를 가르쳐 줄테니 중국어 과외를 해달라 배짱 가득한 전단지를 붙이는 등 어떻게든 중국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했다.그러던 와중 중국에 에어로빅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여자를TV로 보게됐고,설마 하는 마음으로 에어로빅을 가르치는 현장을 찾았다.그녀의 에어로빅은 진짜가 아니었다.기본 동작부터 엉망이었고,그녀의 잘못된 동작을 국민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열광하며 따라했다.그때 나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이거다!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에어로빅,그게 여기선 통할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헬스클럽을 전전하며 에어로빅을 가르치길 희망했다. 그러나 중국어가 서툴고 외국인인 나를 받아줄 헬스클럽은 없었고, 캉메이다라는 출판사 안에 작은 헬스클럽을 찾은 나는 채용은 수업을 보고 결정해도 좋으니 공짜로 몇 수업만 하게 해달라 제안, 그때부터 중국에서 에어로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작은 성공적이었다. 체육복입을 입고 국민 체조하듯 가르치는 중국 에어로빅과 달리 화려한 의상으로 눈길을 끌었으며 활기차고 역동적인 나의 동작은 금방 입소문이 나면서 헬스클럽에 나의 회원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나는 더 큰 헬스클럽으로 이적했고, BTV에 에어로빅을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서서히 전국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후에 나는 중국 최고라고 자랑하는 너바나 헬스클럽에 파격적인 대우로 스카웃이 되어 중국의 톱스타들과 함께 운동하며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승승장구 하던 나의 인생에 먹구름이 핀 건 그때부터였다.본인들의 영역에 외국인이 내가 날뛰는걸 가만 지켜보던 에어로빅 협회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외국인 배척 성향이 강한 중국이라 외국인이라는 이유 하나가 나를 정말 힘들게 했다.에어로빅 출전 기회 박탈에 내가 가르치던 제자들에게도 불이익이 돌아갔다.팀원들을 빼내어 가고,방송국에 압력을 넣으며 나를 조여왔다.그러나 나는 거기서 굴하지 않고 카세트 테입 하나만 들고 공원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입김으로 고위 사람들의 눈을 가릴 수는 있겠지만 국민의 눈을 가리기는 힘들 것이라는 판단으로 나는 공원에서 무료수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TV에서 에어로빅을 가르치던 여자가 공원에서 무료로 수업을 한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나갔고,작은 공원에 사람이 터져나갈 듯 사람들이 몰려 오기 시작했다.이 입소문은 방송국까지 퍼져서 나를 주제로한 다큐가 만들어지며 전국에 조수진을 알리는 또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그때 다큐를 만들었던PD님의 어머니도 공원에 무료 수업을 받으러 오신 분들 중에 한 분이었다고.그렇게 나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나를 성장시키고 있었다.그때 내 나이가26살이었다.

STORY 3.응원 불모지 중국, 13억을 하나로 만들다!

에어로빅 협회 견제가 끓이지 않던 2002년, 나는 내 인생을 바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우리나라는 어릴 때 운동회나 게임 등을 통해 친구들을 응원하고 우리나라를 응원하는 문화가 익숙하다.더구나 붉은악마는 세계 신문에서1면을 장식할 정도로 열정적이고 다양한 문화를 창조해 냈으며, 창조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그런 응원문화가 전혀 없던 나라였다.경기를 관람해도 본인 개인 관람의 느낌이었다.이런 중국에 응원단이 없다는 걸 안 나는 중국 응원단장이 정말 하고 싶었다.나도 붉은 악마처럼 응원하는 모두를 이끌며 하나로 만들고 싶었고,특히나 여긴13억이다.하나가 된다면 제일 멋지고 웅장한 모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그 길로 나는 중국 월드컵 협회 문을 두드렸다.당시 나는 조수진과 에어로빅 시범단이라 하여 팀을 이끌고 있었는데 우리가 한 공연을 본 협회 사람이 흔쾌히 수락을 했다.응원단을 맡되,아무런 지원은 기대 말라는 협회 말에도 나는 뛸 듯이 기뻤다.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한국 치어리더처럼 화려한 의상을 만들기 시작했다.발로 뛰어 한국S사 지원을 따내어 숙박,의상,경비를 충당했다.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처음부터 한국의 붉은 악마처럼 화려한 응원이 보여질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맞아 떨어졌다. TV에서나 보던,제2의 붉은 악마는 현실이 되지 못했다.화려한 의상과 열정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하나로 만들지 못했다.그러나 그때 큰 수확이 하나 있다면 가능성을 봤다는 것.보이지 않으니 비켜,쟤네들 뭐야 하는 시선 가운데 우리의 동작을 따라 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가는 걸 봤기 때문이다.

그렇게 2002년 월드컵 무대는 중국의16강 진출 실패로 아쉽게 문을 닫았지만,새로운 치어리더의 등장으로 나는 다시 주목 받기 시작했다.

프로농구 협회 러브콜을 받아 전국 유일한 치어리더팀을 이끌며 모든 경기 일정을 소화해 냈고,중국에도 서서히 치어리더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치어리더계의 대모라고 불리기 시작했다.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최고의 톱스타만이 찍는다는 나이키 전속모델로 활동도 하며 치어리더계의 중국의 1인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렇게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다가왔다. 중국이 100년을 기다렸다는 그 올림픽 말이다. 중국은 성심성의껏 올림픽을 준비해왔으며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현장공연 시스템을 도입하게 되었다.그리고 그 지도자 자리는 당연히 내가 맡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나는6년도 훨씬 더 된 외국인이라는 핸디캡의 쓴맛을 또 봐야 했다.에어로빅 협회에 이어 치어리더 협회를 만들어 나를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그런 중요한 국제 무대에 리더는 당연히 중국인이어야 한다는 입장이 강경했다.

그땐 더 이상 이 질긴 외국인이라는 핸디캡에 진절머리나 은퇴까지 고려하게 되었다.내가 아무리 두드려도 안될 건 안되는구나 혹독하게 느끼게 되었다.지금까지 내게 어려움이 와도 다른 길을 만들고 또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면 그만이라고 여겼는데,외국인이라는 그 장벽은 내가 아무리 두드려도 허물수가 없구나 라는 생각에 잠시 중국을 떠나왔다.마음을 다잡고 중국으로 돌아갈 참이었다.그런 와중에 중국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올림픽 위원회의 전화였다.그들의 말은 이러했다.에어로빅,치어리더 협회에서 진행하는 현장공연 진행이 원활하지 않다,그들을 이끌 사람이 없다,좀 도와달라.그 길로 나는 짐을 싸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16개 팀으로 구성된380명의 치어리더를 이끌며300회가 넘는 현장공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춤에 대한 열정,내가 최고라는 자부심은 나를 리더로 세워주는 가장 큰 덕목이 되었다.그리고2008년 베이징 올림픽 현장에서 나는2002년부터 그토록 목놓아 불렀던 짜이요 짜이요 그 응원소리가 하나됨을 느꼈다. 13억 중국이 드디어 하나가 되었다.

STORY 4.한국인 최초! 시청률1위를 다투는 인기 토크쇼 점령!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현장공연 총감독을 맡으며 시청률 상위,천하여인이라는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다.천하여인은 당시 톱스타나 화제가 되는 인물을 초청해 여성들의 관심을 이끄는 토크쇼였다.양란이라는 중국 최고의 아나운서가 MC로 중국의 오프라 윈프리로 불릴 정도로 그녀의 파워는 대단했다.즐겁게 녹화를 마쳤던 어느날 천하여인 제작진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MC제안이었다. 중국 프로그램에 내가 MC를? 그것도 외국인인 내가 토크쇼를? 그 생각부터 강했지만 재밌는 제안이었기에 카메라 테스트에 응했다.나에게MC를 제안한 이유는 간단했다.양란과 함께 진행할 MC를 찾고 있는데 양란의 카리스마에 대부분의 톱스타들 조차도 기가 죽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그러나 나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과, 유창한 중국어 실력,그 두 가지를 보고 큰 모험을 걸었다고 고백했다.나는 이 제안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이미 춤으로 방송을 숱하게 해왔으며 게스트에서 진행자로 바뀌는 것뿐이다.

제작진의 안목은 정확했다. 카리스마 강한 양란이 토크쇼의 분위기를 가볍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면 내가 독설로 게스트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다른 MC 1명이 발랄한 현장 분위기를 이끄는 각자의 캐릭터가 최고의 조합을 이루며 시청률1위의 프로그램으로 이끌며 큰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과도한 독설에 잠시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시청자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을 속 시원히 긁어주며 미국의 대통령이 누군지는 몰라도 조수진은 안다는 말이 농담처럼 만들어지기도 했다. 나는 춤으로,그리고 입담으로 13억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STORY 5.사랑도 또 하나의 도전이다!

중국에서 에어로빅도, 2002년 월드컵 응원단장도, 2008년 베이징 올림픽도 모두 내가 먼저 문을 두드렸고 열렸듯이 사랑 또한 내가 먼저 두드렸다.

지금의 남편을 만난 건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면서였다.당시380명을 나 혼자 이끌 수 없어 미국 치어리더협회 쪽에 전화를 넣었다.치어리더의 본고장 미국에서 이런 국제적인 행사에 도움을 줄 수 없겠냐고.당시 남편은 미국NFL(미국 프로미식축구협회)중국대표로 중국에 들어와 있었다.도움을 받기 위해 남편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나는 첫눈에 남편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중국 대표라고 해서 배가 불룩 나온 대머리 아저씨를 생각했는데 정말 잘생긴 미국인이 앉아 있으니 말이다.나는 일과 사랑 모두 불이 붙으면 밀어 붙이는 스타일인데 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미국 치어리더들의 협조를 부탁하며 내 사랑 역시 어필했다.남편은 이런 내가 처음에는 무서웠다고 했다.그런 남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나의 끈질긴 구애도 아니었고,나의 외모도 아니었고,나의 말빨도 아니었다.일에 대한 열정이 지금의 남편을 사로잡은 것이다.본인에게 큰 수익이 떨어지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발로 뛰고 팀원들을 이끌어가는 모습에 남편도 이끌렸다고 한다.그렇게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고, 2011년 내가 진행하는 천하여인 녹화장에서 남편에게 프로포즈를 받게 되었다.무뚝뚝하고 사생활을 중시하는 남편이 무릎을 꿇으며 내게 프로포즈할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지라 더 감동이었던 것 같다.누가 먼저 시작하면 어떠한가,내가 이렇게 행복하면 됐지.나는 앞서 말했듯이 모든 기회가 오길 기다리지 않고 기회를 만들어왔다.사랑 역시 누군가가 먼저 다가와 주길 바라지 않고,내가 먼저 다가갔다.많은 한국 여성들은 여전히 남자들이 먼저 다가오길 바란다는 걸 알고 있다.하지만 사랑 역시 먼저 쟁취하는 사람의 것이다.놓치기 전에 먼저 다가가 보자,새로운 사랑이 시작될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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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사 제공_스토리온TV (김수로,김민종의 마이퀸_매주 수요일 오후2시,밤11시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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