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을(乙)의 반란.. '번역공동체' 출판계서 바람

이윤주기자 2013. 4. 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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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창·바른번역 등 표준계약서·일정 수준 대우 요구열악한 번역 환경 개선에 앞장완성도 높은 번역으로 신뢰 쌓고 책 소개·기획출간 등 주도까지 신인 발굴 든든한 울타리 역할도

최근 몇 년 간 출판사 편집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번역가들이 있다. 사이에, 窓(창), 바른번역 등 '번역공동체' 출신의 번역가들이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며 오랜 기간 출판 기획ㆍ편집과 번역으로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번역공동체들은 일종의 노동조합 성격의 번역집단이다. 열악한 국내 번역 환경을 비판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대우'를 요구하면서도 완성도 높은 번역으로 출판계에서 신뢰를 받고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2003년 번역가 임희근 씨가 만든 '사이에'다. 영어, 프랑스어 서적을 주로 번역하는데, 10년 이상 활동한 번역가 10여 명이 활동 중이다. 앙드레 고르의 <에콜로지카>(생각의나무),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돌베개)처럼 시대적 이슈가 되는 책을 출판사에 먼저 제안하기도 하고, 출판사 웅진지식하우스가 발간한 지식총서 '고정관념 Q시리즈'를 기획ㆍ번역하기도 했다.

임희근씨는 "출판사 해외번역물 기획, 저작권 담당자로 일하다 2003년 퇴사하고 번역가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혼자 일하려니 여러 고충이 예상됐다"며 "주위에서 번역가들이 '따로 또 같이' 일하는 네트워크를 만들어 보면 좋겠다고 조언해주셔서 '사이에'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이렇게 모인 멤버들이 데이비드 하비의 <파리 모더니티>(생각의나무), 브루노 발터의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마티)을 옮긴 김병화,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이제이북스)을 옮긴 윤진, 하니 에르노의 <한 여자>(열린책들)를 옮긴 정혜용 씨 등이다. 막내는 번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희진 씨로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를 옮겼다.

한 달에 한 두 번 기획회의를 통해서 번역할 책을 논의하고, 까다로운 문장을 어떻게 번역할지 상의하기도 한다. 번역가들이 출판사와 계약을 맺을 때 참조할 '표준계약서'도 만들어 두었다. '얼마 이하로는 계약하지 않는다'는 번역료 하한선, '원고를 넘긴 후 1개월 이내 번역료를 지불한다'는 조항 등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이 국내 출판계 현실이다. 임 씨는 "수동적으로 일을 받아서 하는 번역 작업이 아니라, 우리가 책을 찾아 소개하고 능동적으로 번역 조건을 제시하고 인세도 (제대로) 받아가면서 하는 번역공동체를 지향했다"고 말했다.

동아시아 역사, 문화, 고전을 소개하는 '窓'은 고려대 한문학과를 졸업한 4명이 만든 번역공동체다. 전업번역가인 양휘웅 씨가 출판사에 대학 선후배들을 번역가로 추천하다가 아예 2008년 '窓'을 만들고 의뢰받은 원서를 번역할지 결정하는 회의를 열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온 책이 최근 출간된 <만주족의 역사>(돌베개)를 비롯해 십 수권에 달한다.

'원년 멤버'인 김성배, 최고호 씨는 출판사 등 직장생활을 하면서 번역가로 활동하는 투잡족으로 레지널드 존스턴의 <자금성의 황혼>(돌베개), 쉬줘윈의 <ceo 위한 중구가 강의>(김영사) 등을 옮겼다. 최근 고대 사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권용철씨가 합류했다.

'窓'도 '사이에'와 마찬가지로 서로의 번역 문장을 의논하거나 번역 기획을 출판사에 제안한다. 제안한 기획이 출판물로 나오기까지 수년 씩 걸리자 지난해 출판사 '모노그래프'를 만들었다. 12월 <몽골족의 역사>를 시작으로 일부 기획 번역서들을 이 출판사를 통해 출간할 예정이다. 양휘웅 씨는 "모노그래프를 통해 출간할 책 10권 이상을 기획했다. 한해 3~4권의 양서를 꾸준히 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한편 2004년 번역가 김명철 씨가 만든 '바른번역'은 애초 '사이에'와 마찬가지로 베테랑 번역가들의 네트워크 성격이 강했지만 2007년 법으로 전환해 신인 번역가들이 대거 가입시키면서, 번역회사가 됐다. 번역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신인을 발굴하는가 하면, 출판사와 전문 번역가를 연결하고 수임료를 받기도 한다. 착취에 가까운 수임료를 챙기는 일부 번역 에이전시와 달리, 합리적인 수준에서 수임료를 받는데다 번역도 일정 수준 이상을 유지하기 때문에 실용서, 경제서 등을 내는 출판사에서 인기가 높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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