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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1살부터 사교육, 아이들이 병들고 있다

송현숙·이혜리 기자 입력 2013. 05. 02. 22:46 수정 2013. 05. 03.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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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서 기저귀 찬 채 영어 플래시 카드 공부초등 입학 전 선행학습.. 창의력 꺾고 좌절감 안겨

유아교육 전문가 ㄱ씨는 지난달 서울의 한 어린이집을 방문했다가 깜짝 놀랐다. 제대로 앉아 있는 것도 버거운 아이들이 기저귀를 찬 채 영어 플래시 카드를 공부하고 있는 광경을 본 것이다. 특별활동 강사는 "엄마들이 영어 단어를 곧잘 따라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좋아한다"고 말했다.

백화점 문화센터도 집 밖의 장소에서 영아들이 처음 접하는 사교육 시장이다. 빠르면 생후 5~6개월부터 문화센터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시작해 놀이 수업, 영어 수업, 영재 수업까지 이어가는 아이들이 많다. 서울 갤러리아 문화센터의 오감 발달 활동 프로그램에 2세 자녀를 보내고 있는 주부 ㄴ씨(31)는 "주변 엄마들을 보니 아기가 앉기 시작하면 외부 프로그램을 보낸다"며 "이렇게까지 사교육을 시켜야 할까 싶었지만 주변에서 하는 걸 보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불안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과도한 사교육으로 영유아들이 병들고 있다. 사교육의 출발선은 이미 출생 시점으로 내려왔다. 만 한 살도 안된 영아를 위한 영어 플래시 카드와 놀이학습, 국어·수학 학습까지 남보다 반걸음이라도 먼저 대학 입학 경주에 뛰어들려는 사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자유롭게 쉬고 놀 시간을 빼앗긴 아이들은 초등학교 1학년 입학 무렵, 이미 배움에 대한 의욕을 잃고 무기력증에 시달린다. 인성이 최고라고 하면서 아이들의 행복을 빼앗고, 창의인재를 키운다고 하면서 창의력이 뻗어갈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어른들의 과욕과 허영이 아이들을 옥죄고 있는 것이다.

7살 아들을 놀이학교에 보낸 주부 ㄷ씨(34)는 지난 3월 안내장을 하나 받았다. "7살이 됐으니 초등학교 입학 준비를 위해 국어·수학 선행학습을 한다"는 것이었다. 교사들은 학부모들이 모인 자리에서 초등학생용 국어·수학 문제집 10여권을 소개했고, 이후 커리큘럼에는 국어·수학 문제풀이 수업이 추가됐다. ㄷ씨는 놀이수업이 창의력을 키워준다는 홍보에 끌려 3년 전 4살 된 아이를 놀이학교에 보냈다.

7살 때 선행학습을 시작한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집에 와 "힘들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기질에 한글도 완벽하지 않은 아이가 문제풀이 수업과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버거웠던 것이다. 하루 7~8시간 수업 중에 영어만 매일 1~2시간씩이고 국어·수학도 추가되니 견디지를 못했다. 이따금씩 놀이학교에서 수학시험을 보면 아이는 집에 와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문제가 무슨 말인지 몰라 하나도 못 풀었다"며 "시험 보면서 너무 울고 싶고 답답했다"고 말했다. 어느 날은 "선생님이 나한테 못한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공부 못하면 미움 받는다는데"라는 소리도 했다. 힘들고 좌절하는 표정을 보면서 ㄷ씨는 맘이 무거워졌다. 학교에서 매일 수업을 받을 때마다 아이들 사진을 일일이 찍어 올려줘 처음엔 친절하다 싶었지만, 이런 서비스도 아이를 감시하고 부모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놀이학교에 가서 선행학습 수업에서 빼달라고 했다. 그러나 학교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우리 아이는 책을 많이 읽고 자연관찰이나 과학을 좋아한다"고 하자, 교사는 "그건 초등학교 1학년 과목에 없다"며 "국어와 수학을 잘해야 공부 잘하는 티가 난다"고 거절했다. 교사는 "우리 놀이학교 출신 아이들은 어느 초등학교에 가든지 1등을 하게 만들 것"이라며 "요즘 시대에는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ㄷ씨는 지금 아이를 놀이학교에 그만 보낼지 고민 중이다. "놀이학교도 사교육인데, 놀이학교 끝나고 또 다른 사교육으로 아이를 보내는 학부모가 10명 중 9명이더군요." 그는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유아기에 국어·수학·한문·과학 과외를 받는 아이들도 있다"며 "자녀가 수업을 못 따라간다는 얘기를 듣기 싫어 어쩔 수 없이 사교육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어린이놀이운동가인 편해문씨(<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저자)는 "놀이에 굶주린 아이들이 이상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다"며 "몸과 마음, 영혼이 소비중독에 빠진 부모들은 사교육 학습노동에 내몰리는 아이의 행복에 대해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황은 절망적"이라고 말했다.

<송현숙·이혜리 기자 s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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