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경향신문

'어버이연합 1호 커플', 그들은 결혼할 수 있을까

박용하 기자 입력 2013. 05. 08. 15:30 수정 2013. 05. 08. 16:00

기사 도구 모음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 보수단체 '대한민국어버이연합', 선거 끝난뒤 재정난 심화

오전 10시가 가까워지자 '왕년의 용사'들이 하나둘 사무실로 들어선다. 중절모를 비스듬히 쓴 차림. 양복에는 태극마크의 금빛 훈장이 빛난다. 사무실 한가운데 '좌파척결 완수'라 쓰인 서예 글씨가 눈을 붙든다. 보수단체 '대한민국어버이연합' 서울 종로구 사무실의 아침 풍경이다.

아침인사를 건넨 중년 신사들은 부랴부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놓았다. 공짜라서 지하철에 버려두는 무가지들이 하나둘 바닥에 모였다. 왕년의 용사들은 쪼그려 앉아 꼬깃꼬깃 접힌 신문을 펴기 시작했다. 허리가 아픈지 얼굴 표정은 좋지 않다. 그 때 누군가 한마디 던졌다. "원래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검소하게 살었어. 요즘 젊은이들도 이런 것 좀 배워야지". '기개있는' 한마디 이후 노장들의 얼굴에는 다시 화색이 돌았다.

폐지를 정리하는 어버이연합 회원들. | 박용하 기자

"자금난… 누구한테 얘기도 못하죠"

18대 대선이 끝난지도 4개월이 남짓. 지난 7일 찾은 어버이연합 사무실은 '과격시위'의 본산이라기보다 평범한 노인회관에 가까웠다. 켜놓은 TV에선 성인가요채널의 트로트 가락이 흘러나오고, 3~4명의 회원들은 한가롭게 장기를 두고 있었다. 오전 10시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한 회원의 모습에선 평화로움마저 느껴졌다. 일주일 전 일본의 아베 총리를 인형으로 만들어 화형식을 벌인 단체라 믿기 힘든 풍경이었다.

하지만 어버이연합 심인섭 회장은 요즘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심 회장은 이날 만난 기자에게 "자금난을 누구한테 얘기도 못한다. 지난해부터 심해진 것 같다"고 운을 뗐다. 심 회장에 따르면 어버이연합은 지난해 선거 당시만해도 무명의 독지가가 한달 1000만원 가량을 기부하는 등 지원의 손길이 이어졌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니 기부는 급감했고 임대료 등 빚은 빠르게 늘어났다. 어버이연합 추선희 사무총장은 "목적이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였는데, 목적을 이루니 (기부자들이) 허탈해진 것"이라고 추측했다.

거기에다 최근에는 웹사이트까지 망가지는 불운이 따랐다. 지난 3월 국내 주요 방송사와 금융사들이 북한에게 사이버테러를 당했고, 뒤이어 어버이연합 등의 보수단체도 악성코드 공격을 당했다. 3월26일 어버이연합의 홈페이지에는 사자가 포효하는 사진만이 하루종일 떠 있었다. 그 뒤로 홈페이지에 있던 자료는 모두 삭제됐고 아직까지 복구되지 않고 있다. 추 사무총장은 "홈페이지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데 150만~200만원이 든다"며 "(홈페이지를 살리려)어쩔 수 없이 집사람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고 말했다.

해킹당한 어버이연합 홈페이지의 모습. | 인터넷 캡처

활동 계속하려 '1호 커플' 결혼 자금도 빌려

형편은 어려웠지만 회원들은 활동을 계속하기 원했다. 어버이연합 이규일 지부장은 "우리가 원하는 대통령을 만들었는데 더 원할 것이 뭐가 있겠냐는 이들도 있었다"라며 "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좌파가 원체 많아 대통령이 맘대로 못하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단체 간부들은 계속적인 활동을 위해 결국 대출을 받아야만 했다. 추 사무총장은 "최근 한 회원분의 땅을 담보로 은행에서 4400만원을 대출 받았다"라며 "이 돈으로 사무실 임대료도 갚고 다른 밀린 돈을 갚아야 한다. 땅을 담보로 허락한 회원에겐 '책임지겠다'며 각서도 썼다"고 말했다.

어버이연합 측은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회원 커플'의 결혼 자금도 빌렸다. 이 단체에선 최근 81세의 한 남자회원과 76세 여자회원이 교제를 시작했다. 둘은 어버이연합에서 처음 알게 된 사이인데, 올 봄 결혼을 목표로 600만원의 준비 자금을 모아왔다. 하지만 최근 어버이연합의 사정이 힘들어지자 이 돈을 단체에 빌려줬다. 추 사무총장은 "이 돈은 꼭 갚아드려야한다"며 "올해안에 결혼시켜 드리고 신혼여행도 보내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어버이연합 회원들은 재정난 타계를 위해 폐지 수거 작업을 계속 해오고 있다. 이들은 단체에 나오는 길에 지하철 무가지들과 빈 박스 등을 가져와 모아둔다. 이들을 내다 팔면 1년에 약 1100만원의 수입이 들어온다. 이 돈은 운영비에 보태고 회원 중 혼자 사는 이들을 돕는데 쓰인다. 하지만 최근에는 무가지들도 줄줄이 폐간돼 고민이 많다.

어버이날 행사도 축소 불가피

어버이연합은 어버이날에 처음 만들어졌다. 이들은 매년 5월8일마다 창립 기념식을 해오고 있다. 한창 기부가 많을 때는 빵과 우유, 떡, 막걸리, 머릿고기 등 먹을거리도 풍성했다. 하지만 재정난으로 올해 7주년 행사는 축소가 불가피하다. 추 사무총장은 "예년엔 어버이날 수건도 맞추고 그랬는데 이번엔 그것도 쉽지 않다"며 "어디가서 돈 달라고 얘기도 못한다. 올해는 예산이 없어 음식도 음료수 1개씩, 떡만 좀 맞추려한다"고 말했다.

재정난에 봉착했지만 이들의 '막말' 강의는 계속되고 있다. 이날 1시 종묘공원에서 시작된 안보강연에는 150여명이 모여들었다. 초빙강사는 숭례문을 소재로 강연을 했다. 하지만 중간엔 "박원순, 빨갱이 같은 놈", "오세훈 등신", "노무현 잘 죽었다" 등 거친 말들이 튀어나왔다. 조용히 듣던 회원들도 막말이 나올때면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어버이연합은 이날 강연에서 어버이날 떡을 하루 앞서 돌렸다. 충분히 나눠줬지만 "못 받았다"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400여개 넘게 돌렸는데 그럴리가 없다"며 주최 측은 의아해했다. 잠시 뒤 청중들과 실랑이가 벌어지자 사회자는 "내일 백설기를 해서 드릴테니 또 오시라"며 급히 달랬다. 배고픈 '역전의 용사'들은 이어지는 '종북척결' 강의의 카타르시스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 박용하 기자 yong14h@kyunghyang.com >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