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미국은 애플의 조세회피를 통제할 수 있을까

2013. 5. 2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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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은 2009~2012년 아일랜드에 자회사 5개를 설립해 740억 달러(약 82조원) 상당의 수익에 대한 과세를 피했다.

애플 최고경영자 팀 쿡(53)은 전임자 스티브 잡스만큼 대중의 이목을 끄는 인물이 아니었다. 최고경영자가 된 2011년 8월 이후 현재까지 크게 눈에 띄거나 구설에 오를 만한 언행을 한 일이 없다. 그러나 5월 21일 미국 상원 국토안보·공공행정위원회 상임조사소위원회 청문회에서 쿡은 다른 면모를 보였다. 그는 당당한 태도로 애플이 미국을 대표하는 슈퍼스타이자 세계 시장을 호령하는 거대 기업이라는 점을 의원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리고 미국 정부를 향해 "법인세율을 낮추라"고 거침없이 요구했다. 애플이 세법을 두고 정부에 선전포고를 한 모양새였다.

이날 청문회 풍경은 대기업이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어떻게 법을 조롱하고 공익을 침해하는지 드러내 보였다는 점에서 상징적이었다. 사실 쿡은 당당해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다. 소위원회는 전날인 5월 20일 보고서를 내고 애플이 복잡한 해외 자회사 망을 세운 뒤 수백억 달러를 이전해 조세를 회피했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애플은 2009~2012년 아일랜드에 자회사 5개를 설립해 740억 달러(약 82조원) 상당의 수익에 대한 과세를 피했다.

조세피난처로 수익을 이전하는 것은 다국적기업들이 즐겨 쓰는 절세전략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애플은 전례없이 독특한 수법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애플은 아일랜드 내의 똑같은 주소지에 자회사 5개를 설립했으며, 5개사의 이사회를 동일 인물로 채웠다. 이 가운데 3개사는 아일랜드와 미국 중 어느 국가에서도 과세되지 않도록 서류를 꾸며 세금을 한푼도 내지 않도록 했다.

조세회피 청문회서 큰소리 친 애플

세금을 낸 2개사도 통상적인 법인세보다 적은 액수를 납부했다. AP통신은 '애플 세일즈 인터내셔널'이 2011년 수익 220억 달러(약 24조원) 가운데 0.05%에 불과한 1000만 달러만 납세했다고 보도했다. '애플 오퍼레이션스 인터내셔널'도 아일랜드 당국과 협의해 2% 이하의 특별 법인세율을 적용받았다. 아일랜드의 법인세율은 12.5%다. 소위원회는 애플이 이런 수법으로 연방 법인세를 2011년 최소 35억 달러(약 3조9000억원), 2012년엔 최소 90억 달러(약 10조원) 탈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소위원회는 애플을 맹비난했다. 익명의 한 위원은 애플이 세운 아일랜드 자회사들을 애플의 '아이(i)' 시리즈에 빗대 '아이컴퍼니(iCompanies)'라고 명명했다. 상상(imaginary) 속에 존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invisible) 유령회사라는 뜻이다. 칼 레빈 소위원장은 "애플은 수익을 역외 조세피난처로 이전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애플은 조세회피의 '성배'를 찾으려 했고, 수백억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역외 자회사들을 설립했다"고 말했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공화)도 "애플은 미국 최대 규모의 법인세 납부자인 동시에 최대 규모의 조세회피 기업"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소위원회의 칼날은 이튿날 청문회 현장에서 쿡을 마주하자마자 무뎌졌다. 쿡은 특유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애플이 미국에 안겨준 영광을 상기시켰다. 그는 스티브 잡스가 어린 시절 차고에서 애플의 맹아를 싹 틔우던 시절을 아름답게 회고했고, 애플이 이룩한 눈부신 혁신과 성과를 강조했다. 애플이 미국에 일자리 60만개를 창출했으며 지난해 재무부에 납부한 세금이 60억 달러에 이른다는 점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애플은 미국 최대규모의 조세회피 기업"

이어 쿡은 정부가 해외에서 송환된 돈에 매기는 세율을 '한 자릿수'로 낮추지 않는다면 해외에 보유하고 있는 현금을 미국으로 들여오지 않겠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애플은 보유현금 1450억 달러 가운데 1020억 달러를 해외에 두고 있다. 또 쿡은 현재 35%인 법인세율을 20% 중반으로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내 제안은 법인세율을 합리적으로 조정하자는 것"이라며 "(세법을) 영구 개정하는 것이 특별세율을 일시 적용하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더 낫다"고 말했다.

청문회가 끝날 무렵 소위원회 의원들은 쿡의 연설에 매혹돼 있었다. 의원들은 느닷없이 아이폰을 향한 애정을 고백했다. 서슬이 퍼렇던 매케인도 "아이폰 애플리케이션을 자주 업데이트해야 하는 것이 성가시다"며 쿡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가디언은 이 청문회가 조세회피를 둘러싼 정부와 다국적기업 간 갈등의 분수령처럼 보였다고 지적했다. 힘의 균형은 대기업 쪽으로 이미 기울었으며, 정부는 기업을 통제할 수 없으리라는 암울한 전망을 이 청문회가 암시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에드워드 클라인바드 서던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이번 청문회는 조세 관련 개혁책을 시행할 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이 공조해야 한다는 점을 입법자들이 재차 깨닫도록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은닉재산에 과세하면 전세계 극빈곤층 구제

유럽연합은 개별국가의 정책만으로는 조세회피를 근절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공조체제 구축을 서두르고 있다. 유럽연합 27개국은 5월 22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정상회의를 열고 늦어도 올해 안에 은행 계좌정보 자동교환 제도를 실시하기로 했다. 납세자들이 다른 나라 은행에 자산을 숨기는 수법으로 탈루하는 것을 막기 위해 회원국 세무당국들이 개인들의 은행 거래정보를 자동 공유하도록 한 것이다. 은행 비밀주의를 고수하던 룩셈부르크와 오스트리아도 이 제도에 참여하기로 입장을 선회했다. 유럽연합 역내 탈세규모는 연간 1조 유로(약 145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유럽연합 비회원국인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등 유명한 조세피난처가 여전히 무법지대로 남아 있는 한 유럽연합의 대책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 조세회피 근절제도의 성패는 조세피난처들을 이 제도에 동참시킬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은 조세피난처에 은닉된 개인 재산이 18조50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자산에 과세할 경우 정부로 돌아갈 세수는 1560억 달러 정도가 된다. 지구상 모든 인구에게 하루 1.25달러를 주는 데 드는 돈은 약 660억 달러다. 옥스팜이 조세피난처 은닉 재산에 과세만 제대로 해도 전 세계 극빈곤층을 구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처럼 이상적인 지구촌을 꿈꾸기에 정부는 허약하고 기업은 막강하다. 미국 정부가 애플과의 일전에서 패배한다면 국제사회에 조세 정의를 바로세우는 일은 그만큼 유보될 수밖에 없다.

<최희진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dai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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