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하고서 알았네, 엄마는 진정 위대했음을

입력 2013. 7. 14. 10:40 수정 2013. 7. 14.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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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가족] 가사노동의 재발견

▶ 친정엄마가 찾아오면 잔소리부터 시작됩니다. 집이 왜 이렇게 더럽냐, 밥은 해먹냐…. '잔소리 폭탄' 뒤엔 팔을 걷어붙입니다. 청소, 설거지, 빨래를 척척 해냅니다. 그럴 때면 저는 "고맙다"는 말 대신 짜증을 냅니다. 평생 가족 뒤치다꺼리를 한 엄마가 딸 집에까지 와서 고생하는 게 싫어서요. 육아에 가사노동까지, 엄마들의 애프터서비스는 계속됩니다. 쭉~.

2년6개월 된 딸은 입맛이 까다로웠다. 조금만 간이 안 맞아도 밥을 잘 안 먹는다. 요리가 서툰 주민영(가명·33)씨는 오늘도 유명한 요리책 레시피를 따라 아침을 만든다. 친정엄마가 있을 때만 해도 딸은 이렇지 않았다. 콩나물이든 시금치든 잘 먹었다. 살림 경력이 30년 넘는 베테랑의 손을 거친 음식은 살림 경력 7개월차 민영씨가 만든 음식보다 훨씬 맛있었다. 아이는 민영씨의 '맛없는' 음식에 적응을 못했다. 민영씨도 이 상황에 적응이 안 됐다. 다시다와 미원까지 동원해도 엄마 맛과 다르면 어쩌라는 건지. '육아휴직' 7개월차, 오늘도 출퇴근 기약 없는 '가사 휴직'의 하루가 시작됐다.

민영씨는 올해 1월 육아휴직을 냈다. 출산휴직 뒤 바로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던 건 든든한 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정엄마가 나보다 아이를 더 잘 돌봐주는데 내가 굳이 있어야 하나' 싶었다. 빨리 나가서 돈 벌고 싶은 욕심도 들었다. 그러다 '돌연' 육아휴직을 낸 것은 2년2개월 동안 함께 살며 아이를 돌봐주던 친정엄마가 할머니 간병을 전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젠 아이에게 엄마가 필요해 보였다. 같이 시간을 못 보낸 미안함 탓인지, 할머니가 아무리 잘해줘도 엄마 없는 아이는 늘 기죽어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육아가 아니라 가사노동이었다. 민영씨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곱게' 살았다. 20살부터 9년 동안 서울에서 자취생활을 했지만 외식으로 밥을 때웠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닭볶음탕 같은 '일품요리'나 만들어 먹는 정도였다. 밑반찬? 당연히 만들어본 적 없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2년간의 결혼 생활은 자취의 연속이었다. 적당히 먹고, 적당히 치우고, 적당히 빨고…. 국을 끓여 3일을 먹고, 있는 반찬으로 적당히 밥을 차리는 내공 따윈 그에겐 없었다.

대신 그에겐 엄마라는 최종병기가 있었다. 살림에 서툰 민영씨를 위해 친정엄마는 한 달에 서너 차례 집에 찾아와 집안일을 해줬다. 출산 뒤 함께 살기 시작한 뒤로는 육아와 가사노동을 전담해줬다. 엄마는 한 번도 '살림 못한다'고 구박하지 않았다. 꽃꽂이 수업도 가지 못하게 했던 아버지와 살면서 집 안에서 주부로만 살았던 엄마는 딸이 다른 삶을 살길 바랐다. '살림하기 시작하면 인생이 그렇게만 풀린다'며 부엌에 오지도 못하게 했다. 그사이 민영씨는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입학하고, 취업 뒤 직장에서 날아다니는 '알파걸'의 삶을 살았다.

그런 엄마가 떠나고 난 뒤 집은 전쟁터가 됐다. 살림은 어쩜 이렇게 끝이 없는지…. 설거지 한 번 해도 세제로 그릇 닦고, 베이킹소다로 냄비와 프라이팬을 닦고, 그러고 나면 싱크대에 낀 물때가 보이고. 이 정도면 깨끗하다 싶을 때 왜 때가 낀 베갯잇이 보이고, 부엌 매트가 보이는지. 정도라는 게 없다. 한도 끝도 없어서. 아토피 증상이 있는 딸아이 몸에 닿는 속옷과 손수건은 매일 손빨래하고 삶아줘야 한다. 이게 다 아기 세탁기가 없어서 그렇다. 엄마가 만날 빨아줘서 필요가 없었지. 가사도우미만 있었어도 행복할 텐데! 지금 민영씨에게 필요한 건 육아 서적도, 요리 서적도 아니다. 하루하루 살림살이의 A부터 Z까지 알려줄 살림 내비게이션이 절실하다.

2년2개월간 함께 살며아이 돌봐주던 친정엄마가할머니 간병을 전담하게 돼돌연 육아휴직을 해야 했다이것은 전쟁의 시작이었다딸은 맛없는 내 음식 거절청소·설거지·빨래 무한반복공부와 일은 '큰일'이고집안일은 하찮게 여겼는데엄마 없는 나는 반쪽이었다

처음엔 손빨래하다가, 청소기 돌리다가 한 번씩 울컥했다. '내가 왜 집에서 이런 일이나 하고 있지?' 자문자답하면서. 일하는 건 즐거웠다. 노력해서 한 만큼 성과가 나타났고, 그만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았다. 그런데 살림은 노력을 더 많이 한다고 눈에 띄는 성과를 얻는 것도 아니다. 세탁기에 넣고 돌리거나 손빨래하는 게 다인데 빨래를 어떻게 더더더 잘할 수 있나. 빨래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사람이 있나. 좌절의 연속이다. 자신이 유능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학점 따는 것보다 일하는 것보다 못해 보였던 '고작 살림 따위'를 못해 고생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엄마가 새삼 위대해 보였다. 민영씨는 '엄마는 집에 있으면서 왜 늘 바쁠까', '엄마는 왜 그렇게 만날 종종거릴까' 생각했다. 늘 방바닥이 뽀독뽀독하고 깨끗했던 이유가 엄마가 만날 쓸고 걸레질해서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30년 넘는 살림 경력에 종손 집이라 제사도 1년에 10번 넘게 지냈던 엄마는 늘 살림을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그걸 모르고 예전에는 그게 쉬워 보였다.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 거지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어'라고 자만했다. 내가 해왔던 공부와 직장 생활은 '큰일'이고 살림은 '작은일'이라고 생각했다. 고운 자신의 손과 거친 엄마의 손이 '일해본 손과 일 안 해본 손'의 차이라는 것도 이제야 깨달았다. 이젠 가끔 '엄마가 돌아가시면 어쩌나'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슬프지만, '이 일을 이제 누가 다 해주나'에서 오는 생계형 공포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엄마에게 미안하다. 나이가 서른셋이나 됐는데 아직 사람 구실을 반밖에 못하다니…. 시어머니는 (문 안 열어주는) 며느리 집 앞에서 죽고, 친정엄마는 (일만 시키는) 딸 부엌에서 죽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친정엄마는 자본이라는데, 민영씨는 자기 딸에게는 자본이 못 될 것 같다. '솜씨 없는 엄마 밑에 태어났으니, 제 살길 알아서 찾겠지'라고 맘 편하게 생각한다. 그래도 가끔 불쑥 걱정이 튀어나온다. 나중에 딸이 '나는 돈 벌어다 주는 엄마보다 멸치볶음 잘해주는 엄마가 좋다'고 하면 어쩌지?

얼마 전 어린이집 원장과 대화하면서 민영씨는 "우리 애가 집에서 밥을 안 먹는다"는 고민을 털어놨다. 원장은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오면 다 잘 먹어요. 요즘 엄마들이 요리를 잘 못하니까 다들 집에서 못 먹는대요"라고 '위로'했다. '그래, 나만 이런 게 아니었어!' 민영씨는 안심했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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