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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욕 시달리다 감정 마비..가족들도 "너 이상해"

입력 2013. 11. 13. 21:30 수정 2013. 12. 03.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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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마음을 짓밟는 감정노동 ③ 마비 : 쌍욕도 아무렇지 않아요

욕설 들어도 협박 받아도 무덤덤…망가진 '감정의 문

"고객이 쌍욕하고 신나 들고 찾아와서 죽인다고 협박하고… 이런 거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아닌가요? 그냥 일인데 뭐가 힘들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지난 9월27일 밤, 서울 강남의 심리치유 전문기업 마인드프리즘의 '감정노동자 공개상담실'에 참여한 30대 병원 고객센터 상담원이 입을 열었다. 콜센터 상담원, 판매원, 친절교육 강사, 골프장 캐디 등 감정노동자 40명이 모인 이날, 한 참여자가 나와 고객과 회사로부터도 모욕을 당한 다른 이의 경험을 자신의 이야기처럼 읊어내리는 '모노 드라마' 식 사례 발표를 끝낸 뒤였다.

정혜신 박사는 둥글게 모여 앉은 감정노동자들에게 미리 "당신이 옳아요", "토닥토닥 안아주고 싶어요", "공감 백배, 나도 그런 적 있어요", "내가 만약 당신이라면…" 등의 내용이 적힌 팻말을 나눠줬다. 발표가 끝나면 앞에 나온 참여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4개의 팻말 중 하나를 들어 표현해 보라고 했다. 객석에 앉아있던 병원 고객센터 상담원은 "내가 만약 당신이라면…"이라고 쓰인 팻말을 들었다. 정혜신 대표가 그 팻말을 든 이유를 묻자 그는 "뭐가 어렵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희로애락 못 느끼는 감정 마비우울증보다 심각한 '마음의 병'오랜 심리적 학대 받을때 나타나

순간 상담실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정혜신 대표가 다시 물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도 힘들지 않나요?" "제가 일하는 병원의 경우 고객센터로 전화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병원에 불만이 있든지 의료사고라고 주장하든지 하는 분들이에요. 저는 임신해서 만삭 때까지도 죽인다고 위협하는 고객들 다 상대하며 일했어요. 전 그냥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힘들어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너무 이상하고 복잡해요."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혜신 박사는 집단 상담이 끝난 뒤 찾아온 그에게 회사 밖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그는 회사에서 '감정 드러내지 않고 진상 고객도 잘 처리하는 직원'으로 대우받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일상의 관계들은 꼬여가기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친구나 가족들은 "네 마음을 모르겠다"고 했고 어떨 땐 자신이 이 상황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정혜신 박사는 이같은 상태가 "감정마비"이며 이는 곁으로 드러나는 우울증보다 인간성을 파괴하는 측면에서 더 심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람에게는 팔과 다리가 있듯 '감정'이 있다. 누군가 나에게 모욕을 주고 협박을 하면 수치심, 모멸감, 분노, 공포 등의 감정이 자연스레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이 자꾸만 느껴져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정상적인 감정을 정지시킨다. 결국 힘든 일도 없고 기쁜 일도 없는, 일상적인 희로애락의 리듬을 모두 잃게 된다.

신용카드사 콜센터 팀장이었던 이아무개(35)씨는 그런 마비에서 '깨어난' 순간을 기억한다. 일한 지 10년이 돼가던 시점이었다. 입사 직후부터 악성 고객을 만난 날에는 너무도 힘들어하며 결국 우울증 약까지 복용하기 시작한 한 직원이 어느날 고객과의 상담이 끝난 뒤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회의실로 데리고가 훈계를 하는데 순간 그 직원이 "팀장님도 싫고 이런 세상도 다 싫다"며 들고 있던 컵을 던졌다.

"그 순간 정신이 들었어요." 이씨는 말했다. 이씨 자신도 사회생활 초기엔 4년간 계약직 상담원으로 일했지만, 하청업체로 재입사해 관리직인 팀장이 된 이후에는 매일같이 팀 내 인원수, 처리한 콜 수 등의 수치에 치이며 직원들에게 수당도 지급되지 않는 야근을 시키고 점심시간을 줄이는 걸 당연시해왔다. 팀 내 신입 직원이 3개월을 버티는 경우는 20~30%에 그쳤다. 그 직원에게 매일같이 "고객은 회사에 불만이 있는 것뿐이지 네게 욕을 하는 게 아니니 마음 상해하지 말라"고 했던 충고가 얼마나 큰 억압이었는지 느끼게 됐다고 한다. 얼마 뒤 후배 직원도, 이씨도 회사 그만두었다. 정혜신 박사가 '감정마비'라는 단어를 말한 순간, 그는 비로소 자신의 지난날이 어땠던가를 다시 돌아보며 홀가분함을 느꼈다고 했다.

'감정노동자 집단 상담'에 참여한 이들 중에는 이같이 '감정마비'라는 말에 반응하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자신을 친절 교육 강사라고 밝힌 한 30대 여성은 "나 자신도 납득이 안 되는 회사의 매뉴얼에 맞춰 직원들에게 늘 미소 짓고 상냥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마음으로는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에 몸이 먼저 무너졌다"고 말했다. 안면과 몸의 왼쪽에 마비가 와 응급실로 실려가기를 두 차례, 결국 그는 회사를 그만 두었고 이후 건강도 회복됐다.

부당한 회사 매뉴얼 따라 일해도"이 회사 아니면 대안없다" 자포자기결국엔 분노할 힘조차 잃어가

콜센터에서 해결이 안 된 악성 고객을 직접 대면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는 한 남성 참가자는 "그동안 잘 적응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라며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 남성을 포함해 많은 감정노동자들은 "일을 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정혜신 박사는 "'이 회사 아니면 대안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감정마비나 극단적인 무기력감이 왔을 때, 오랜 심리적 학대를 받았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말했다.

육체를 착취당한 노동자들은 '분노의 힘'만으로도 연대할 수 있었지만 감정노동자들은 '분노할 힘'조차 마비되어 있는지 모른다. 미국의 부두 노동자 출신 노동 운동가 레그 테리오는 책 <노동계급은 없다>에서 "서비스 노동자의 수가 늘어났지만 그것이 노조 조직화의 추진력이 되지는 못했다"며 "이들은 자신들의 일이 그저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개인적 가치와 자부심을 잃은 것은 아닐까?"라고 물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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