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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를 잃은 사람들](5) 아이 맡길 곳 못 찾은 '일하는 엄마'

박철응 기자 입력 2013. 12. 23. 22:59 수정 2013. 12. 23.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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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 신청 20여곳서 낙방
"맞벌이 부모는 대기순번 밀려" 소문 듣고 한숨

연년생으로 한 살, 두 살짜리 아들을 낳아 키우는 '직장맘' 이지혜씨(36·가명)는 "그래도 나는 꽤 괜찮은 편"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하지만 '꽤 괜찮은 편'인 육아 일기는 고달프고도 애처롭다.

그는 지난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으로 6개월, 올해는 4개월을 쉬고 회사로 복귀했다. "사실 둘째 갖고는 석 달 동안 회사에 말도 못했어요.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서…." 이씨는 2년 후면 승진 대상이 되고 직전 3년간 근무평가가 심사 기준이 된다. 휴가 기간이 길수록 불이익을 받는 만큼 가능한 한 적게 쉬고 악착같이 버티는 수밖에 없다. 이씨는 "회사가 휴가를 보장해주긴 하지만 원하는 대로 다 쉬면 사실상 승진은 포기해야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씨가 근무하는 시간 동안 육아는 친정어머니와 중국 동포 돌보미 아주머니가 맡고 있다. 어머니는 지난해 말 발목 수술을 해서 아직도 불편하다. 월 150만원을 받는 돌보미 아주머니는 오후 6시에 퇴근한다. "퇴근하기 30분 전부터 어머니가 언제 오느냐고 전화를 하세요. 눈치가 보이지만 6시 땡 하면 박차고 일어나 집으로 가는데, 가보면 애 둘이랑 어머니까지 3명이 함께 울고 있어요. 동생들은 저한테 불효라고 하고…." 돌보미 아주머니도 두 아이 돌보는 게 힘들어 며칠 만에 그만두는 경우가 잦다. 현재 돌봐주는 아주머니가 벌써 8번째다.

직장맘 이지혜씨(가명·오른쪽)가 23일 서울 서초동의 한 어린이집을 찾아가 보육교사와 상담을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서울 서초동에 사는 이씨는 집 주변 20여곳의 어린이집에 신청서를 내놨지만 단 한 곳도 연락이 없다. 대기 순번이 400번대인 곳도 있다. 그나마 15번이 가장 빠르지만 정원이 20명에 불과한 소규모 어린이집이다. 이씨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곳 외에 차 타고 10여분 걸리는 어린이집까지 샅샅이 훑어서 신청서를 냈지만 우리 아이들을 받아주는 곳이 없다"면서 "어린이집 가방을 멘 아이와 엄마를 보고는 '도대체 어떻게 들어갔느냐'고 물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지난 5월 보건복지부 실태조사 결과, 어린이집에 들어가기 위한 대기 기간은 평균 6.4개월이다. 특히 국공립 어린이집은 10개월가량 기다려야 할 정도다. 맞벌이 가정 자녀는 부모가 데리러 오는 시간이 늦어서 대기 순번에서 밀린다는 '흉흉한' 소문도 그를 힘들게 하고 있다.

연락이 닿는 대학 여자 동기들 중 제대로 직장생활을 하는 이는 거의 없다. 이씨는 "직장 다니다가 대부분 육아 때문에 그만뒀고, 비교적 시간이 자유로운 직업을 구하려고 뒤늦게 임용고시나 약대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있다"면서 "그래도 꿋꿋이 은행을 다니던 친구가 있는데 곧 사표를 낸다고 한다. 착잡할 뿐"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시간제 일자리를 활성화한다고 하지만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돈 벌어야죠. 친구들 몇몇이 대기업 시간제를 알아봤는데 100만원대 월급에 콜센터 같은 단순 직무더라고요. 비싼 집값과 물가, 향후 교육비를 생각하면 그런 일자리로는 살아갈 수 없어요. 전 정말 괜찮은 편인데, 왜 이렇게 힘들죠."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 대리(29)는 막막한 심정이다. 출산휴가에 육아휴직까지 연결해 15개월을 쓴 덕분에 딸을 돌 넘게 잘 키웠지만, 회사 복귀를 앞두고 아이 맡길 곳을 찾지 못했다. 믿고 있던 회사 어린이집은 연차에 밀려 떨어졌고, 동네 어린이집은 모두 대기 상태다. 친정은 부산, 시가는 울산이어서 최악의 경우 아이를 부산에 있는 친정어머니께 맡기고 주말마다 아이를 보러 가는 상황도 고려하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현재 서울 어린이집은 국공립을 포함해 모두 6538곳으로 대기자는 10만4000명에 이른다. 전업주부는 물론 직장여성들도 아이를 제대로 맡길 권리를 잃은 셈이다.

< 박철응 기자 hero@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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