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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헬스클럽 사진 올려놓고 "섹시하다" 칭찬 즐기고.. SNS판 화차 사건 경악

입력 2014.01.07. 22:31 수정 2014.01.08.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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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타인의 삶 훔쳐 사는 SNS판 '화차'

[쿠키 사회] 타인의 삶을 훔치는 게 가능할까. 영화 '화차(火車)'에서 주인공 장문호는 갑자기 사라진 약혼녀를 찾다가 그녀의 이름, 경력, 주민등록번호 등 모든 게 다른 인물의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 상처가 많았던 약혼녀는 다른 여성을 살해하고 그녀의 인생을 가로채 살아 왔다.

이 영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 의외로 쉽게 벌어지고 있다. 그동안 동경하는 대상의 삶을 엿보는 데 만족했던 대중의 관음증은 온라인 시대를 맞아 남의 인생을 훔쳐가는 수준까지 진화했다.

"분명 나였어요. 그런데 분명 타인이기도 했죠. 몸이 덜덜 떨렸어요."

회사원 이지나(가명·24·여)씨는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뛴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최근 '인생을 도둑맞은' 일을 겪었다.

지난달 2일 새벽 4시 이씨는 일면식도 없는 K양(18)의 페이스북을 우연히 보고 생전 처음 겪는 공포에 휩싸였다. 프로필에 이씨 사진이 버젓이 걸려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씨가 다닌 헬스클럽, 미용실은 물론 즐겨 찾는 음식점들까지 이씨의 일상이 모두 K양의 일상으로 둔갑해 있었다.

K양은 이씨의 일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냈다. 심지어 훤칠한 남성과 연애도 시작했다. 이씨는 "내가 들렀던 장소, 내 머리 스타일, 내가 새로 산 신발 등 모든 것이 K양의 삶이 돼 있었다"며 울먹였다. K양은 왜 이씨의 삶을 훔친 것일까.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이용자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온라인에서 '타인의 삶'을 통째로 베껴 자신의 것인 양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인생 도둑'이라 불러야 할 이들은 단순히 타인 행세를 하는 데서 더 나아가 동경하는 사람의 생활습관, 취미, 취향까지 모방한다. 전문가들은 현대인들의 욕구불만이 이 같은 도용 현상을 부추겼다고 분석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범죄 양상이지만 인생 도둑을 법으로 처벌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성희롱이나 모욕이라면 모를까, 부러워한 걸 갖고 처벌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외국계 SNS를 이용했을 경우에는 사실상 국내 경찰이 수사할 방법이 없다. 피해자들은 스스로 복잡한 민사소송을 진행해야 한다.

세계인 5명 중 1명은 1개 이상 SNS를 사용하는 시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른 이의 삶을 베껴 살고 있을지 추산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

[사이버 신분 도용 (상)-타인의 삶을 훔친 '화차'] "남의 공간에서 내가 살고 있다니…"

-인생을 도용당한 여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일면부지(一面不知) 타인의 공간에서 또 다른 나를 마주했을 때, 경악을 넘어선 공포가 밀려왔다. 한 달 남짓 시간이 지났지만 이지나(가명·24·여)씨는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등줄기가 바짝 선다. 지난달 2일 새벽 이씨의 페이스북 계정으로 익명의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저기요, 누가 당신 행세를 하고 다녀요." 이씨는 그가 알려준 대로 K양(18)의 페이스북에 접속했다. 곧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사이버 공간에는 이씨 자신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범한 여자였다=남부러울 것 없이 평탄하게 살아온 이씨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해 '예쁘다'는 말도 종종 들었다. 유학을 다녀와서 대기업에 다니며 커리어도 차곡차곡 쌓아나가던 중이었다.

이씨는 여느 또래처럼 SNS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저녁 먹은 근사한 레스토랑 사진을 올리고, 큰 맘 먹고 염색한 머리도 자랑했다. SNS에서 친구들과 수다도 떨었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온라인에서 사생활을 낱낱이 공개해 좋을 것 없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내 일상을 남들과 즐겁게 공유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정치적 의견을 밝히거나 위법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니 딱히 문제될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 게 화근이었다.

◇6개월간의 염탐과 도용=그날 밤, 이씨의 평탄한 인생은 틀어졌다. 이씨는 K양의 페이스북을 보고 한참 동안 굳어 있었다고 했다. K양이 페이스북 화면 첫머리에 걸어둔 프로필 사진부터 사진첩에 올린 모든 사진은 이씨의 것이었다.

K양은 치밀하고 집요했다. 이씨가 지난해 11월 30일 '불금(불타는 금요일)엔 운동이지!'라는 글과 함께 헬스장에서 운동복 입고 찍은 사진을 올리자 K양은 이 사진을 퍼다 자신의 페이스북에 추가하며 똑같은 문구를 적었다. 곧 많은 남성이 '섹시하다' '몸매가 좋다'는 댓글을 달았고 K양은 마치 자신이 칭찬받은 양 답글을 올렸다.

이씨가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면 빠르면 1시간 뒤, 대부분 이튿날에는 K양의 페이스북에 같은 사진과 같은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K양은 거의 온종일 이씨의 페이스북을 엿보고 있었던 셈이다. 단순히 이씨의 얼굴 사진만 훔쳐 쓴 게 아니었다. 이씨가 산 물건, 이씨의 생일파티, 이씨가 갔던 장소, 이씨가 먹은 음식 등 모든 생활이 K양의 일상으로 둔갑했다.

K양은 이씨의 사진과 일상을 내세워 온라인 친목 모임에 가입한 뒤 100여명과 교류하기도 했다. 남자친구도 만들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남성과 이른바 '사이버 연애'를 시작했다. 그 남성이 K양에 대해 알고 있던 외모, 취미, 습관, 좋아하는 영화, 자주 먹는 음식 등의 정보는 모두 이씨의 것이다. K양은 그에게 "나는 한혜진, 문근영, 지성 등 유명 배우들이 소속된 기획사 연습생이라 매우 바쁘다"며 실제 만남을 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K양은 자그마치 6개월 동안 이런 식으로 이씨의 삶을 베껴 살았다.

◇경찰 "민사소송 하라"=이씨는 7일 "K양의 페이스북을 보다 보니 나중에는 누가 나고, 누가 K양인지 모를 정도로 극도의 혼란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씨는 K양이 6개월 동안 페이스북에서 활동한 내역을 일일이 기록해 '도용 일지'를 만들었다. 그는 "원본인 내 페이스북과 비교하니 너무 똑같아 소름이 끼쳤다"고 했다.

이렇게 만든 증거 자료와 진정서를 들고 지난달 12일 서울 강남경찰서 사이버수사팀을 찾아 K양을 고소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형사고소는 안 될 것 같으니 명예훼손으로 민사소송을 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페이스북 서버가 미국에 있어 국내 경찰의 수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이씨는 절망했다. 그는 "민사소송을 하자니 변호사도 찾아야 했고 소송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며 "사회 초년생인 내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부담"이라고 말했다. 그는 결국 소송을 포기했다. 현재 K양에 대한 모든 대응을 사실상 접은 상태다.

이씨는 "내가 받은 정신적 피해가 명백한데 왜 처벌이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나와 비슷한 피해자가 분명 더 있을 테고 앞으로는 훨씬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

[사이버 신분 도용 (상)-타인의 삶을 훔친 '화차'] "연예인처럼 예뻐서 부러운 마음에 그냥 갖다 썼다"

-인생을 훔친 여자-

'진실은 진실을 알아본다.'

7일 어렵게 찾은 K양(18)의 카카오톡 계정에는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상태 메시지'난에 이런 의미심장한 글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페이스북과 마찬가지로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도 이지나(가명·24·여)씨의 것이었다. 그는 무엇이 '진실'이라고, 무엇이 '진짜 나'라고 믿고 있는 걸까.

K양은 기자의 카카오톡 대화 요청에 응했다. 페이스북에서 알게 된 남자친구에게는 '기획사 소속 배우 지망생'이라고 했었지만 기자에게는 자신을 "올해 고3이 되는 평범한 여고생"이라고 밝혔다. 페이스북에서 이씨 사진과 일상을 도용한 일을 묻자 짤막하게 "죄송하다"고 답했다.

왜 계속 이씨 사진을 퍼다 올렸냐는 질문에 K양은 "우연히 이씨의 페이스북을 보게 됐는데 이씨가 연예인처럼 예쁘기에 부러운 마음에 그냥 갖다 썼다"고 했다. 한 장 두 장 가져다 올리다 보니 어느 순간 이씨의 삶을 통째로 베끼게 됐다는 것이다. 별로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이씨는 지난달 2일 사진과 정보가 도용된 걸 안 뒤 페이스북 메시지 기능 등을 이용해 어렵게 K양과 연락이 닿았다. 이후 약 한 달 동안 수차례 K양에게 자신의 사진을 페이스북에서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마다 K양은 "곧 지우겠다"고만 하고 무시했다.

기자가 "도용·사칭은 범죄 아니냐"고 하자 그는 "몰랐다"고 짧게 답했다. "명예훼손 소송을 당할 수도 있다"는 말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K양은 "이제부터 이씨 사진을 쓰지 않으면 아무 문제없는 거냐"고 되묻더니 그제야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에서 이씨의 사진을 지웠다.

전문가들은 "K양이 현실의 자신과 이상적 자신의 괴리를 견디지 못하고 이런 일을 벌였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사람의 정신세계에는 '이상적인 나'가 있고 '실제의 나'가 있는데 청소년기에는 이상적 나를 추구하는 경향이 극대화된다"며 "이상적 나와 실제 나의 차이가 너무 클 때 일부 극단적인 사람들은 불안감과 우울증을 겪다 결국 이상적 나를 실제 나로 인식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이씨를 동경해 이씨의 생활을 엿봐오던 K양이 동경심과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아예 이씨를 자신이라고 인식하게 됐다는 것이다.

한양대 정신건강의학과 박용천 교수는 "열등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열등감에 대한 보상책으로 타인의 칭찬과 환호를 갈구한다"고 말했다. K양은 이씨의 사진으로 온라인에서 여러 사람과 교류하며 "예쁘다"는 말 듣는 걸 즐겼다.

그렇다면 강씨는 왜 화려한 연예인이 아닌 평범한 이씨를 택했을까. 곽 교수는 "연예인은 각종 매체에서 자주 접해 익숙하니까 미지의 인물을 찾은 것"이라면서 "또 이씨는 일반인이라 도용 사실이 들통 날 염려도 적고 사람들의 의심도 피할 수 있으니 이상적 자아를 현실화시키기가 더 쉬웠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정부경 박세환 기자 vick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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