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최악의 약속-정치의 죽음에 대하여 / 홍세화

2014. 1. 23.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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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근혜 정권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②

박근혜 대통령의 '비정상의 정상화' 선언은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국민을 도려내겠다는 전쟁 선포이며 앙상한 민주주의의 골격만 남긴 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남김없이 녹아 내릴 때까지 이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날선 의지의 표현이다

제목 탓에 눈길이 갔던, 두 권의 책이 있다. 하나는 죽은 박정희의 사위이자 현직 대통령 박근혜의 제부가 쓴 <신이 된 대통령>이고, 다른 하나는 한 철도기관사가 쓴 <철도의 눈물>이다. 나는 아직 두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 전자는 제목에서부터 풍겨대는 조악한 정치종교의 냄새가 역겨운 탓에, 후자는 이 시대가 만들어낸 삶의 비참에 선뜻 다가가기가 망설여지는 탓에. 그럼에도 이 둘을 동시에 떠올리는 것은 오늘의 한국 정치가 처한 어떤 현실을 지시하는 것 같아서다.

인간 박정희를 신으로 모시는 사회현상에 대해, 그의 사위는 신격화가 아니라 그의 치적에 대한 존경이나 추모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그저 일개인의 허접스런 망상으로 치부하면 그만일까? 최근 한 인터넷서점이 책 홍보를 위해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호감도 투표 이벤트를 벌인 것을 계기로 박정희와 노무현 지지자들이 경쟁적으로 참여하여 1, 2위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이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 현상은 앞의 박정희 신격화 또는 종교화와 얼마나 다른 층위에 있는 것일까?

'신이 된 대통령'과 '철도의 눈물'은 얼핏 보아 서로 만날 수 없는 거리에 있는 동떨어진 현실로 생각될 수 있다. 한쪽의 현실에선 신이 된 '죽은 왕'들이 전쟁을 치르고 있다. 다른 한쪽 현실에선 철도의 눈물이 있다. 철도의 눈물이라, 아주 오래전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라고 노래했던 김수영의 시구절이 떠오르지 않는가? 철로에서 밥을 구하는 노동자를 대신하여 차라리 차가운 쇠붙이가 눈물을 흘린다고 비유되는 현실은, 과연 신들의 전쟁과 무관한 것일까? 신들의 전쟁, 그것은 혹여 아찔하리만치 경사진 비탈길에 매달린 실재의 현실, 삶의 전쟁을 가리기 위해 설치된 가상의 무대 같은 게 아닐까.

나는 한국의 정치사가 두 개의 체제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체제와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가 그것이다. 박정희 시대를 질식할 듯 고통스런 기억으로 떠올리는 나는 자유를 향한 투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 자유에는 늘 피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는 사실도.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한국에서의 정치가 독재(=억압)와 민주(=자유)라는 두 개의 상이한 기원을 갖고 있다는 통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동작동 신들의 무덤을 향하는 행렬을 두고 시비가 벌어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아예 동작동이 아닌 다른 곳에 안장되어 있기도 한 것이리라.

역사는 반복된다. 아니,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을 박정희 독재의 부활이라 믿는 사람들은, 가령 손배 가압류가 그러하듯, 왜 하필이면 노동(자)에게 그토록 가혹한 신자유주의 체제가 우리가 '민주정부'라고 부르는 그 10년 동안 이 사회에 자리잡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쟁취했다고 믿는 순간 왜 자유가 온통 모호한 것이 되어버렸는지, 왜 피와 땀의 헌신이 아니라 돈을 지불해야 자유를, 살아갈 권리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는지, 왜 개발독재 시대의 "잘살아보세!"라는 '우리 모두를 향한' 구호가 민주화 시대에 "부자 되세요!"라는 '당신만을 향한' 은근한 권유로 등장하게 되었는지 아직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오직 하나의 신이 있었을 뿐이다. 물신이라는. 오직 하나의 믿음이 허용되었을 뿐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우리를 궁핍에서 구하리라는. 조국 근대화를 약속한 박정희는, 그러므로 물신이 충만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자유를 몰수한 사악한 제사장이었고 이를 위해 그가 발명한 것이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였고 유신체제였다. 백성의 피를 한꺼번에 물신의 제단에 바친 전두환과 노태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탈권위주의 시대의 제사장들은 어땠는가? 신을 섬기는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신은 옛 신이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과거의 자본주의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새로운 자본주의는 성장이 고용을 가져다주고 심지어는 복지도 선물해주기도 하는 그런 좋았던 시절의 자본주의가 이미 아니었다. 성장은 고용 감축을 낳고, 고용 감축을 통해서만 성장이 비롯된다는 것, 이것이 새로운 자본주의의 법칙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정치적 자유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고용을 배제하는 자본에게 오히려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이름의 절대적 자유를 선사함으로써 다시 일자리와 복지를 은총으로 돌려받을 것이라고 약속한 '민주정권'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었다.

민주주의의 본디 의미는, 신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뜻하리라. 정치는 신을 찌르는 칼이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이다. 하지만 불은 꺼졌고, 민주주의는 가죽과 뼈만 남은 채 박제되었다. "권력은 이제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만큼 정치의 죽음을 극명하게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민주주의는 이제 누구의 가슴도 떨리게 하지 못할 만큼 낡은 말이 되었고, 물신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하는 무능한 제도일 뿐이라는 체념을 낳았다. 박정희의 묘를 거쳐 김대중의 묘에 참배하던 박근혜의 동작동 세리머니가 상징하듯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듯이, 한국 정치가 하나의 기원(신)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산업화+민주화'의 현실태 아닌가?

최고통치권자가 스스로 강조할 말은 경청이지 소통이 아니다. '말이 안통하네뜨'. 풍자는 웃음을 유발하지만, 공허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신자유주의='고용 없는 자본주의'는 한국 사회를 이미 내전상태로 몰아넣은 지 오래다. 절망과 체념이 일상의 삶 속에 완강히 자리잡은 현실에서 어느 편에 서서 전쟁을 수행할 것인지를 분명히 한 권력을 향해 소통을 요청하는 우리는 대체 누구인가? 자본주의 지배질서에 반대하는 일체의 저항을 '비정상'으로 간주하여 척결하겠다고 공언하는 권력에 대해 이미 실패를 자인한 죽은 왕을 불러내어 맞서겠다고 생각하는 이 종교적 환상은 언제 끝나게 될까?

정치적 죽음이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이 정치적 죽음이 바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우리가 무심코 유일한 민주주의라고 불러온 대의제 민주주의 바로 그 안에서. 프랑스의 거리에서 반란의 냄새를 제법 맡은 탓일까, 나에겐 신기하게 다가왔다. 총파업을 공언한 노동조직이 어떤 그럴듯한 설명도 없이 서둘러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손을 잡고 파업을 중지시키던 모습이. 그때에야 한목소리로 "이것이 정치다!"라고 선언하는 언론들이. 여기에 맞춰 철도노조의 '대승적 결단'을 축하하는 이른바 진보정당의 추임새가. 나아가 2014년이 시작되고 지방선거라는 스펙터클이 준비되는 시점이 되자, 그토록 절박하던 '안녕하지 못한 모든 존재들'을, 그 눈물과 항의와 거부의 몸짓들을 가뭇없이 사라지게 만드는 이 정치체제가.

우리는 이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멍청아, 그건 정치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장치야! 정치의 죽음으로 이끄는!" 우리들이 금과옥조로 여긴 자유민주주의는 이제 광포한 자본주의에게 알량한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도구로 남은 것이 아닌가? '살아있는 죽음'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이 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들을 온통 틀어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박근혜 대통령의 '비정상의 정상화' 선언은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국민을 도려내겠다는 전쟁 선포이며 앙상한 민주주의의 골격만 남긴 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남김없이 녹아 내릴 때까지 이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날선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는 이 강요된 질서를 거부하는 '위반의 정치'를 시급히 조직해야 한다. 삶과 존재의 권리를 위한, '공동의 것'을 지키고 넓혀가기 위한 싸움을.

홍세화 <말과 활> 공동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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