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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들은 왜 부끄러워하지 않나

입력 2014. 01. 28. 15:30 수정 2014. 01. 28.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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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한 성추행 파문에서 드러난 검사들의 저열한 의식"기자들마저 '갑을 관계' 의식해 침묵하는 현실 더 서글퍼" ▷ 한겨레21 기사 더 보기

이진한 대구서부지청장의 성추행 사건은 여러 각도에서 다뤄봐야 할 '논쟁적 이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충성한 공안검사가 있다. 그가 술자리에서 부적절한 처신을 했다. 적당히 덮어주고 넘어가려는 음모가 진행된다. 그에게 대들었다고 내쳐진 후배 검사나 비슷한 잘못을 했던 다른 검사와는 다른 '이중 잣대'다. 여기자들을 껴안고 손등에 뽀뽀한 검찰 간부는 경고 처분만 받았다. 그 다음날, '귀엽다'며 초등학생 손등에 뽀뽀했던 노인은 강제 추행 혐의로 벌금형에 처해졌다. 사회정의는 정치와 권력 앞에 무기력했다. 하지만 검찰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경미했다'거나 '현장에서 문제제기가 없었다'는 따위의 말을 핑곗거리로 내세웠다. 성희롱 예방 기초교육도 받지 않은 모양이다. 이쯤 되면 여기자, 후배 여검사, 피의자 등 대상을 가리지 않은 검사들의 성추행은 조직적인 범죄로 취급돼야 한다.

기자라는 집단의 민낯도 부끄럽긴 마찬가지다. 밥벌이는 고단하다. 검사의 입만 바라봐야 하는 독특한 취재 관행은 기자를 더 고달프게 한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 때 '들러리' 섰던 기자들은 이번에도 침묵의 카르텔에 빠졌다. 일부는 되레 '검찰과의 관계'를 걱정한다. 여기자들은 더욱 위태롭다. 검찰이라는 가장 남성적인 취재 현장에 깊숙이 들어가려면, 성추행은 일상적인 직업 스트레스가 된다. 그러니 스스로 동화되거나, 애써 둔감해진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그래서 더 서글픈 생존전략이다.

지난 1월22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한겨레21> 회의실에 문화연구자인 권수현 박사, 법원과 검찰을 6년간 출입했던 김태규 <한겨레> 기자, 그리고 각각 다른 시기에 1~3년씩 법조팀 근무 경험이 있는 여기자 3명이 모였다. 방담회 내용은 크게 네 갈래로 나눠 정리했다. 자신이 겪은 성추행 사건을 고백한 여기자들의 소속 언론사와 실명은 밝히지 않고, 편의상 여기자 1·2·3으로 구분해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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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 이진한 대구서부지청장 성추행 사건을 직접 경험한 여기자가 와 있으니, 감찰 결과 발표 이후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여기자1(이하 여1)

참여연대와 여성단체들이 이진한 청장 사퇴 성명서를 내는 등 압박하고 있지만, 검찰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나는 애초 '검찰 내 엄한 처벌'을 요구했고, 지금도 감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 다시 한번 강한 처벌과 재발 방지 노력을 촉구하는 내용의 의견서를 검찰에 전달할 예정이다. 이와 별개로 참여연대 등은 법무부 징계위원회 회부를 요구하며 검찰 고발 등도 검토 중이다.

# 검찰의 '이진한 구하기'

권수현 문화연구자(이하 권)

검찰이 감찰한 과정을 보면 제대로 된 자정 시스템이 있나, 의심스럽다. 감찰위원 가운데 '처벌을 원하는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건, 심의 절차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거다.

여1

처음 감찰에 들어가면서 나한테 답변서를 요구했을 때 약간의 기대는 있었다. 그런데 피해자 3명 가운데 처벌 의사를 밝힌 사람이 나 하나뿐이었고, 강한 처벌 의사도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고 처분에 그쳤다. 이게 무슨 다수결의 문제가 절대 아니지 않나. 그러더니 이제는 검찰이나 기자들 사이에서도 '왜 굳이 너 혼자만 그렇게 문제제기를 하느냐'는 식의 프레임이 생겨나고 있다.

여기자2(이하 여2)

이 자리에 오기 전에 법조에 출입했던 여기자들한테 성추행 경험 사례를 취재해봤다. 그랬더니 이진한 청장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더라. 한 여기자가 "이 청장과의 술자리에서 옆자리에 앉은 내 손을 잡고 자꾸 주물럭거렸다. 그래서 선배 남자기자들이 자리를 바꿔줬다"고 하더라. 실수가 아니라 상습적인 거다.

검찰처럼 위계질서가 강한 조직일수록, 조직의 수장이 중요하다. 검찰총장이 이 사건을 가볍게 처리하거나 덮어버리려고 하면 조직은 그렇게 따라가게 돼 있다. 그런 게 아니었나 싶다.

김태규 <한겨레> 기자(이하 김)

이번 사건은 조금 다른 측면을 주목해봐야 한다. 이진한 청장은 국가정보원 사건을 수사 지휘하면서 수사팀과 마찰을 빚은 사람이다. 기자들에게 박근혜 정권에 유리한 '거짓말'도 많이 했다. 검찰총장이 철학이 없어서 솜방망이 처벌을 한 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그림이 있었을 거다. 그래서 난 감찰한다고 했을 때 별 기대를 안 했다.

맞다. 이진한 청장을 구해주기로 작정하고, 결론을 이미 정해놓은 상태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진한이 아니고 윤석열이었어도 과연 이런 식으로 해결됐을까? 이중 잣대다. 아주 큰 정치적 논리가 작동했다. 정권에 잘 보이려고 작정한 사람에게는 떡고물을 주는 방식의 매커니즘이 점점 공고해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 정의가 살아 있긴 한가. 이게 더 무섭다.

여2

최연희 전 의원이 여기자를 성추행한 사건만 해도 아무리 형사처벌되고 한나라당에서 제명당해도, 나중에 또 무소속으로 지역구 의원에 당선되고 복당하고 그러지 않았나. 그들에게는 성추행 전력이 전혀 흠집이 안 되는 거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마사지 걸' 발언을 하고도 대통령이 되지 않았나. 도덕적 흠결이 있더라도 정치적 생명엔 전혀 지장이 없다. 다른 사람을 기소하려면 어느 조직보다 엄격하고 도덕적이어야 할 검찰이 이런 식으로 가는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 같다. 부끄러워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고 막 간다.

# 검찰은 왜 부끄러워하지 않나

여기자3(이하 여3)

판사들과도 술자리를 많이 가졌지만, 불쾌한 기억은 검사들한테 많다. 여럿이 어울려 노래방을 갔는데 검사들이 여기자들이랑 '블루스'를 추려고 했다. 남자기자들이 무마시키려고 했는데 검사들이 제어가 안 됐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여기자들이 화가 나서 집에 가버렸다. 음담패설도 많이 하는데, 듣기 거북해도 피할 수도 없고 답답했다.

여2

나도 검사한테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2005년 한 검사가 술에 취해서 "앵두(입술)를 먹고 싶다"고 하기에 성희롱이라고 항의했다. 그랬더니 적반하장으로 "어디 도청장치 숨기고 있는 거 아니냐"면서 내 가슴 쪽을 툭툭 건드리는 시늉을 하더라. 다음날 공식 서면 사과를 요구했다. 후배 여검사까지 찾아와 "구두 사과는 안 되겠느냐"고 사정했다. 결국 일주일을 싸우다가 말로 사과받았다. 그런데 몇 달 뒤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는 거다. 비아냥처럼 들렸다. 그 검사는 지금 잘나가는 대검 주요 간부다. 다른 사례도 좀 모아봤다. 술 취한 검사들이 여기자를 붙들고 허벅지에 손을 얹거나 입을 맞추려 하고 "둘만 따로 나가자"고 속삭인 경우 등이 있었다. 2011년 남부지검 사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론화되지 않아서 검사가 징계받진 않았다.

여3

검사는 상명하복 문화가 강하다. 법원에선 아무리 배석판사라고 해도 독립적인 법관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데, 검찰은 후배 여검사를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대놓고 "여자 법조인이 많아져서 걱정"이라고 말한다.

대검 감찰1과장이 이진한 사건 감찰 결과를 기자들에게 브리핑을 하면서 "현장에서 문제제기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쌍방과실'이라는 단어도 말하고. 이건 정말 상식이 없는 거다. 성희롱이 일어난 자리라면, 당연히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분위기일 가능성이 높다. 이 사람들이 성희롱 예방교육은 들었나 싶더라. 검찰 조직 전체의 상식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검찰은 그걸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 검찰과 기자 사이 '갑을 관계'

검사와 여기자 사이에 이런 사건이 반복되는 것은, 검찰 취재의 특수성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본다. 형법에 피의사실공표금지 조항이 있기 때문에, 기소되기 전에 피의자 관련 내용을 알리는 건 불법이다. 그래서 검사들은 정보를 잘 내놓지 않는다. 정보에 접근하기 어렵다보니, 검찰과 기자 사이는 갑을 관계 비슷하게 돼 있다. 검사가 기삿거리를 갖고 거래를 시도할 수 있는 구도다. 그게 자신의 우월적인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성희롱처럼 발현되기도 하고.

여3

검찰은 기자들에게 흘리는 정보의 양과 범위를 조절한다. 개별적으로 특정 매체한테 정보를 넘겨주기도 한다.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는 하루에도 몇 개씩 물먹을 수 있다(다른 언론사에 단독 보도를 뺏긴다는 뜻). 기자 입장에선 어떻게든 검사를 더 취재해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당연히 술자리에 빠지기도 힘들고 끝까지 남아야 한다. 그런 기자들의 상황을 검사들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기자한테 지켜야 할 예의를 수시로 넘나든다.

이렇다보니 막상 같이 일하는 여기자가 검사한테 성추행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평소 생각한 대로 병이라도 깨야 하는데 그것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앞으로 계속 봐야 하는 취재원이니, 정말 파렴치한 상황이 아닌 한 크게 반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진한 청장 사건을 대하는 검찰 출입기자들의 태도는 이해가 안 된다. 지난해 3월까지 서울중앙지검 기자단 간사를 맡았는데, 그땐 검찰의 불합리한 시도에 강력 항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기자 11명 가운데 1명만 문제제기를 했다니. 물론 감찰본부의 조사를 받은 기자 10명이 한목소리로 '별 문제가 없다'고 했다는 검찰 설명의 진위도 따져봐야 하지만, 기자들 사이에서 정의 관념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건 당혹스럽다.

남자기자로서 검찰과의 술자리에서 불쾌한 기억은 없었나.

나이 많은 검사와 폭탄주를 마시고 뽀뽀를 하는데 혀가 들어온 적이 있다. 평소 검사로서 '인정'하는 사람이어서 불쾌하진 않았다. 남자들끼리 그러는 것에 대해서 기분 나쁘다거나 괴롭다거나 하진 않았다. 검사들과 평소 쌓여 있던 긴장 관계를 술을 통해 해소하는 효과도 있기 때문에.

# 여기자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여1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응원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응원해주는 기자들은 다 그런 경험을 당해봤더라. 반면에 어떤 여기자들은 이런 이슈에 대해 외면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평소 취재원과 여기자들 간의 모임을 일부러 잡던 사람들이 그러니까 좀 당황스러웠다.

여기자라는 위치를 생각해봐야 한다. 성추행이라는 문제제기를 하려면, 자신을 여자 혹은 상처받은 피해자에 포지셔닝해야 한다. 그러면 사회생활을 잘 못하는 기피 인물로 비칠 수 있다. 내가 기자로 살아남으려면 그럴 수가 없는 거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성폭력에 노출된 경험이 있더라도 훨씬 더 적대적으로 나올 가능성도 있다.

여3

법조 출입 여기자는 대부분 20대 후반~30대 초반으로 사회 경험이 짧은 편이다. 똑같은 성추행 상황이 발생했을 때 10년차 기자라면 분명하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농담처럼 진담을 얘기한다든지, 여기자로 살면서 나름의 대응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배들은 당장 불쾌하더라도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선배나 동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한 번 더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선배 여기자들이 검사와의 러브샷을 더 시키기도 한다. 나만 해도 연조가 쌓이면서 성추행 상황에 대한 민감도는 떨어진 것 같다. 나쁘게 말하자면, 사소한 것은 지나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 거다.

7년 전쯤 여기자협회 회장에게서 '여기자들의 성희롱 위험 노출을 조사·연구해달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수습기자들에게 주제 공모를 했는데 성희롱이 나와서 협회도 굉장히 놀랐다고 하더라. 이번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자들 사이에 관련 정보가 거의 공유되지 않고, 사건이 터지면 도와줄 멘토(선배)도 없는 게 문제다. 어떤 직장에서든지 10년 이상 살아남았으면, 나는 여기에 도착했지만 후배들은 더 멀리 갈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책임의식이 있어야 한다.

여2

2005년 성추행 사건 직후에 선배 기자들이 "그 검사가 원래 좀 술이 약해"라거나 "앞으로 취재원으로 더 잘 활용하는 계기로 삼자"고 반응하는 것에 뜨악했던 기억이 난다. 이진한 총장 사건을 보면서, 왜 9년 전이랑 바뀐 게 없는지 화가 나는 한편, 선배 여기자로서 '그때 좀더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했어야 한다'는 반성도 했다.

여1

검찰과 여기자들 사이에 이런 문제가 반복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왜 계속 반복해왔고, 앞으로도 이럴 건지, 그 고리를 끊을 수 있을지 고민이 든다. 지금 계속 문제제기를 하는 것도 그래서다.

사회에 정의가 작동하려면,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읽어내고 같이 느낄 수 있는 '공감능력'을 갖춘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 그런데 성추행이라는 이슈만 터지면 어떤 집단이나 조직이든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어떤 한 사람이 총대를 메고 문제제기를 하면 고립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는 여기자, 혹은 기자 집단 전체가 달려들어서 아주 세게 치지 않으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사회·정리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녹취 김자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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