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친일파 후손의 집요한 소송] 이해승, 철종 생부 전계대원군 5代 후손.. 친일 활동 혐의 광복 후 체포

2014. 3. 8. 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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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사이 이해승(1890∼?)은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이해승은 12살인 1902년 관직에 처음 나섰고 1910년 8월 25일 지금의 장관급인 정2품 벼슬을 받았다. 그로부터 나흘 후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 병합됐다. 그는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의 가문을 잇는 왕실 종친이었다.

한일합병 직후인 1910년 10월 이해승은 20세에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귀족 최고 지위인 후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한 달 뒤 일왕의 환대를 받고 조선귀족관광단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이들은 안중근 의사가 저격했던 이토 히로부미 묘소에 참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해승은 1911년 1월 일제로부터 은사공채 16만8000원을 수령했다. 은사공채는 일제가 한일합병에 협력한 관료들에게 내린 포상금 성격의 공채를 뜻한다. 현재 가치로 최소 20억원 이상으로 추정되는 금액이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까지 귀족 지위와 특권을 누렸다. 이해승은 각종 친일 단체에도 몸담았다. 그는 1915년 1월 일제 지원을 받은 삼십본산연합사무소 고문이 됐고, 1917년 2월 이완용 등의 주도로 설립된 친일단체 불교옹호회에서 활동했다. 1942년 1월에는 조선귀족회 회장 자격으로 미나미 총독에게 국방헌금을 전달했다.

이해승은 각종 친일 행각을 벌인 혐의로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이승만정부가 특위를 해체하며 풀려났다. 이어 6·25전쟁이 터진 뒤 이해승은 북한군에 납북돼 행방불명됐다. 이해승의 장남 이완주는 이해승이 납북되기 전인 1941년 사망했다. 그의 손자인 이우영 그랜드힐튼호텔 회장은 이해승에 대한 실종선고를 신청했고 1958년 실종선고를 받았다. 이 회장은 다음해인 1959년 할아버지의 재산을 단독 상속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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