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크림 독립 반대하는 미국, 코소보 독립엔 지지 '이중 잣대'

박민식기자 2014. 3. 17.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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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U 회원국끼리도 코소보 입장차발칸반도서 러 견제 위해 英 등 코소보 적극 지지카탈루냐 분리주의 갈등 겪는 스페인은 독립 인정 안해● 남오세티야·압하지야 갈등 여전러 "독립국 승인" 美는 부정… 자국 이익 따라 입장차만

우크라이나 크림자치공화국 의회는 지난 11일 독립을 선언할 때 코소보 사태를 독립의 근거로 내세웠다. 크림공화국의 독립결의안에는 "(특정 지역) 주민의 자기 결정권을 규정한 유엔 헌장과 다른 국제문서, 코소보 독립의 합법성을 인정한 2010년 7월 유엔 국제사법재판소 판결 등에 기초해 독립 결정을 내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크림공화국의 분리독립 움직임을 계기로 당시 코소보는 어떤 갈등을 겪었고 어떻게 사태를 풀어나갔는지를 돌아봤다. 또 구 소련에서 독립한 조지아에 속해 있다가 분리독립을 주창해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던 남오세티야ㆍ압하지야의 사태도 함께 되짚어 본다.

코소보

코소보 사태는 민족과 종교 갈등에서 비롯됐다. 코소보 지역은 14세기 번성했던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중심지이자 세르비아 정교회의 교구가 최초로 생긴 곳으로 역사ㆍ종교적으로 세르비아인에게는 성지나 다름없다. 오스만 터키는 1389년 세르비아 중심인 기독교 연합군을 물리치고, 러시아와의 전쟁(1877~1878)에서 패해 세르비아가 독립할 때까지 약 500년간 이 곳을 지배했다. 오스만 터키는 코소보 지역의 이슬람화를 위해 무슬림인 알바니아인들의 코소보 이주를 장려했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강한 세르비아인은 이슬람교와 이슬람 문화에 반감만 커졌고, 정교도인 세르비아인과 무슬림인 알바니아인 간 갈등이 시작됐다. 코소보는 1차대전 이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에 합병되자 두 차례에 걸쳐 독립전쟁을 벌였지만 실패했고, 2차대전 직후인 1945년 유고사회주의연방공화국 내 세르비아의 한 주(州)로 편입됐다. 강성인 세르비아 때문에 유고 연방 존속이 위협받자 티토 대통령은 이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코소보의 자치권을 확대했고, 마침내 코소보는 1975년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세르비아인의 이탈이 가속화하면서 1981년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는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게 됐다.

티토 대통령(1980년 5월)의 사망과 1987년 '세르비아니즘'을 천명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1989년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갈등은 더욱 심화했다. 밀로셰비치는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89년)했고, 높은 실업률과 생활고에 시달린 알바니아계 주민은 폭발했다. 유고연방 해체(1991년) 후인 1998년 2월 코소보의 알바니아 분리주의 반군인 코소보 해방군(KLA)이 세르비아 경찰 4명을 살해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세르비아 경찰이 KLA 5명과 KLA 거점 마을의 민간인 약 20명을 살해하면서 내전으로 확대했다. 세르비아는 알바니아계 인종 학살을 저질렀고, KLA는 게릴라전으로 대항했다. 내전이 지속되자 1999년 3월 유엔이 개입해 평화회담을 개최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세르비아에 공습을 감행했다.

1999년 6월 알바니아계 1만2,000여명, 세르비아계 3,000여명이 사망(추정치)하는 인명 피해를 남기고, 세르비아와 코소보는 평화안에 합의했다. 유엔평화유지군이 주둔하면서 무력 충돌은 사라졌으나 코소보의 독립 지위에 관한 양측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았다. 또한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의 갈등도 계속돼 간헐적으로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2005년 10월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코소보 지위 결정 협상을 개시했으나 수년간 성과가 없자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유엔 밖에서의 문제 해결을 주장했다. EU가 "코소보 독립 시 치안확보를 위해 경찰 및 사법요원 1,800명을 파견하겠다"며 코소보 독립을 공개적으로 지원하자, 2008년 2월 17일 코소보 의회는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일방적 독립선언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국제사회의 반응은 엇갈렸다. 미국은 '인권문제'를 들어 코소보 독립을 지지한 반면, 러시아는 '주권 침해'라며 독립을 반대했다. 두 강대국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명분과 달리 미국은 대부분이 무슬림인 코소보를 통해 발칸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러시아는 슬라브 정교회 전통을 바탕으로 오랜 동맹국인 세르비아의 세력 유지를 바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EU 회원국들도 자국 상황에 따라 입장이 달랐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주요 강대국은 코소보 독립을 적극 지지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한 반면 자국 내 분리주의 문제를 안고 있는 스페인, 그리스, 사이프러스, 슬로바키아 등은 코소보 독립의 정당성을 부정했다.

코소보 독립 문제는 2010년 7월 유엔 국제사법재판소가 "일반 국제법에서 독립선언을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코소보 독립선언이 위법하지 않다"고 판결하면서 일단락됐다. 그러나 193개 유엔회원국 중 절반에 가까운 86개국은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남오세티야ㆍ압하지야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는 구 소련 시절 연방정부에 의해 조지아에 강제 편입된 자치공화국이다. 서울 면적의 6.5배인 3,900㎢(조지아의 5.6%)에 인구 9만명의 작은 자치국인 남오세티야는 인구의 70%가 러시아 시민권자이며, 러시아 화폐가 유통될 정도로 러시아 성향이 강하다. 조지아 서부에 위치한 압하지야는 소련 시절 조지아가 압하지야인들에 대한 차별정책을 심화하자 1978년 조지아에서 분리해 러시아에 귀속하자는 운동이 벌어진 지역이다.

조지아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918년 독립했지만, 국경 확장에 나선 소련에 강제 흡수(1922년)된 나라다. 조지아, 남오세티야, 압하지야 모두 각 국가나 민족의 의사와 무관하게 세력을 확장해 나간 러시아로 인해 서로 관계가 꼬인 상황이다.

1991년 독립한 조지아에 묶여 있던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는 92년 7월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조지아는 양측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유혈분쟁이 벌어졌다. 결국 러시아의 개입으로 휴전이 성립됐고, 러시아군이 참여하는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조지아에 장미혁명이 일어나고, 친미 성향의 미하일 샤카슈빌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갈등이 심화했다. 2003년 조지아 대선에서 친러 성향인 당시 대통령 세바르드나제가 부정선거를 저질러 시민들이 장미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결국 세바르드나제가 실각하고, 미국에서 유학한 변호사 출신 사카슈빌리가 당선됐다. 그는 친러 성향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자치공화국의 영토 회복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인물이다.

그는 또 이라크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추진하는 친 서방정책을 추진해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는 러시아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조지아는 미국과 EU의 지원을 염두에 두고 2008년 8월 7일 남오세티야를 공습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8일 자국민 보호를 명목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조지아에 군을 보내 개입했다. 러시아에 밀린 조지아는 3일 만인 11일 항복을 선언했으나 러시아는 휴전을 거부하고 두 자치공화국을 러시아 영토로 합병한다고 선언(15일)했다. 그러나 조지아를 지원해 온 미국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군함을 통해 물자를 보급하며 일촉즉발 상황까지 치달았지만 결국 프랑스의 중재로 평화중재안에 합의했다.

하지만 중재안에 나온 6개 항목 중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장래 문제에 대한 논의는 빠져 있어 지금까지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러시아와 반미 국가들은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를 독립국으로 승인했으나 미국과 주요 서방국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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