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소사] <129>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북한 송환

손용석기자 입력 2014.03.17. 21:07 수정 2014.03.17.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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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소, 이렇게 살아 조국에 돌아왔으니…." "욕봤네…."

노인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42년 7개월의 세월은 건장했던 청년을 백발이 허연 노인으로 바꿔 휠체어에 앉혀 놓았다.

1997년 3월 19일,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가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송환됐다. 링거를 꽂은 팔에는 한복과 녹차 등의 선물을 담은 작은 손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1917년 함경남도 풍산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때 조선인민군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지리산 빨치산이 됐고, 52년 토벌에 나선 군경에 의해 체포됐다. 7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지만, 부산에서 좌익 지하당 활동을 한 혐의로 다시 체포돼 총 34년의 기나긴 복역생활에 들어갔다. 비전향을 고집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1988년 만기 출소해 양아들 김상원씨의 보살핌을 받던 이씨의 송환이 남북 간의 핵심의제가 된 계기는 그의 수기가 월간 <말>지에 게재되면서부터다. 1991년 서울에서 열린 남북고위급회담을 취재하던 북측 기자가 이씨 부인의 편지를 남측에 전달하면서 북에 있던 가족의 생사가 확인됐다. 이후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양심에 따라 이씨를 북으로 보내주자는 여론이 일었고 북측도 회담과 대남 메시지를 통해 끈질기게 그의 송환을 요구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은 부총리 겸 초대 통일원 장관에 한완상 서울대 교수를 임명했고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 당국 간 협상은 새 정부에서 급진전했다.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던 김 대통령은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3월 초 신문사 편집국장들과의 만찬 자리에서 특유의 깜짝 뉴스를 터뜨렸다. 전격적으로 '이인모씨 북송 허용'을 발표함으로써 참석한 기자들에게 뉴스거리를 선물한 것이다.

1993년 3월 19일, 폐렴으로 입원해있던 부산대 병원을 떠난 이씨가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에 모습을 드러내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북한 가족들이 휠체어 주위로 모여들었다. 부인 김순임씨와 딸 현옥씨, 그리고 외손주들이었다.

곱기만 했던 아내 대신 주름이 파인 할머니가 서 있었고, 젖먹이 딸아이는 두 아이의 엄마로 변해있었다. 이씨 또한 마찬가지였다. 삐쩍 야윈 몸과 머리에 앉은 흰서리는 반 백 년의 세월을 가늠케 했다.

잠시 눈물을 머금은 이씨는 자신을 돌봐줬던 남측 인사들에게 "통일되면 평양에서 만나자"는 인사를 건넨 후 조용히 휠체어를 북으로 돌렸다.

북측 지역 군사분계선 앞에는 대대적인 환영 인파가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판문각에는 김일성의 이름으로 대형 플래카드가 내걸렸고,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들은'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며 꽃송이를 뿌려댔다.

비전향 장기수 송환의 최초 사례였던 이인모씨는 북에서 영웅대접을 받으며 생활하다 2007년 6월 16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이씨의 딸 현옥씨는 2004년 6월 인천에서 열린 6ㆍ15 남북공동선언 기념행사에 참석해 의남매가 된 양아들 김상원씨와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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