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아프다는데 가슴 만져".. 병원은 '성희롱' 사각지대?

2014. 4. 8.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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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주영 기자]

"맹장수술을 받고난 후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유방을 만졌다."

"설사를 해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청진기를 브래지어 안쪽에 갖다 대면서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해보았냐, 너는 그런 것 하면 안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민간 성폭력상담소가 접수된 상담 사례 중 일부다. 병원 진료 과정에서 불필요한 성적 접촉이나 언어적 성희롱을 당했다는 내용이다. 성인 여성 10명 중 1명 정도는 이같은 '성적 불쾌감'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희롱을 경험했다는 여성들은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필요한 의료행위인지 여부를 파악 못해 쉽게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전문가들은 성희롱 예방 매뉴얼이나 가이드라인 등을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아무데서나 옷 벗게 하거나 과도하게 성적 신체 접촉한 사례도

국가인권위원회가 진행한 '의료기관 성희롱 실태조사' 보고서 내용

ⓒ 국가인권위원회

지난 7일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이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의 의뢰로 작성한 '진료과정 성희롱 예방기준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최근 5년간 의료기관을 이용한 성인 여성 1000명 중 11.8%(118명)가 성적 불쾌감이나 수치심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성희롱을 경험했다고 답한 118명(중복응답 포함 255건)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제대로 가려지지 않은 공간에서 진찰·검사를 위해 옷을 벗거나 갈아입어 수치심을 느꼈다는 답이 46건으로 가장 많았다.

또 ▲의료인이 외모나 신체 등에 대해 성적인 표현을 했다(30건) ▲진료와 관계없는 사람이 듣는 상황에서 성생활 등을 물었다(25건), ▲진료와 상관없이 성적으로 신체를 만지거나 접촉했다(23건)는 대답이 뒤를 이었다. 성적 불쾌감을 가장 많이 느낀 진료 과목은 진료과정에서 신체 접촉이 불가피한 내과(50.8%), 산부인과(45.8%), 정형외과(24.6%), 한의원(21.2%) 순이었다.

실제로 인권위 등의 차별시정기구에 '의료기관에서 성희롱을 경험했다'는 진정이 접수되기도 했다. 주로 설명이 없는 상태에서 신체를 접촉하거나 옷을 벗으라고 요구했다는 내용이었다.

"허리 통증 교정 치료를 하면서 의사가 피해자의 팬티를 엉덩이까지 내리고 엉덩이를 주무르는 등 성적 수치심을 줬다." (2008년)

"복부 방사선 촬영 도중, 영상의학과 방사선사가 브래지어를 벗으라고 하면서 뒤에서 갑자기 브래지어 끈을 풀었다." (2009년)

"가벼운 감기로 청진기 진찰 중 내과 의사가 아무런 사전 설명이나 동의 없이 옷 안에서 브래지어를 들고 가슴에 청진기를 갖다 대어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 (2011년)

현직 의사들 역시 '실제로 성희롱이 일어나기도 한다'고 증언했다. 한 의료진은 공감과의 면접조사 과정에서 "건강검진 하는 사람들이나 초음파하는 남자 의사들은 간혹 젊은 여성이 오면 일부러 촉진해보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성희롱 겪어도 적극적 대응 안해... "말했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 당해"

실태조사 연구진은 의료기관 특성상 성희롱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진료실 등이 보통 밀폐된 데다가 의료진과 환자가 단 둘만 있는 상황이 많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이들은 "이런 공간에서 의료진은 진료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빈번하게 신체 접촉을 하거나 성적 사생활과 관련한 질문을 던진다"면서 "이 과정에서 성희롱이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성희롱이 발생해도 피해자인 환자가 제대로 대응하는 경우는 적다고 전했다. 신체접촉이나 성적 관련 질문이 필요한 의료행위인지 여부를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병을 치료하는 의사를 향한 신뢰도 문제제기를 막는 요인 중 하나라고 연구진은 진단했다.

실제로 성적 불쾌감을 겪었을 때 문제를 제기했다는 응답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진료 과정에서 성적 불쾌감 등을 경험했다는 응답자들 가운데 62명(52.5%)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소극적인 대응을 한 이유와 관련해서는 ▲진료 과정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46.9%), ▲적극적으로 대응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30.2%)는 순으로 답이 많았다.

도리어 성적 불쾌감을 느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한 사례도 있었다. 한 상담자는 "윗배가 아파서 내과에 갔는데 의사가 청진기를 가슴에 대거나 손가락으로 가슴을 여러 차례 눌렀다"며 "항의했다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연구진은 보고서에서 "성희롱을 예방하기 위해 대응 매뉴얼이나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또 "의료기관에서도 신체접촉이 불가피할 때는 미리 환자에게 설명하고, 간호사 등이 동반한 상태에서 진료를 진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의료진이 대학 교육 과정 때부터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성희롱이 발생했을 때 대응하는 절차를 강화하는 것도 필수라고 연구진은 언급했다. 이들은 "현재 우리나라는 성희롱 구제를 인권위만 담당하는 반면, 영국·프랑스 등은 의료단체가 자체 조사를 실시해 징계를 하는 경우가 많다"며 "성희롱 대응 제도나 절차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인권위는 이번 실태조사와 관련해 오는 17일 오후 2시 토론회를 개최한다. 토론회에는 대한의사협회, 대한한의사협회, 보건당국 등의 관계자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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