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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성 칼럼/4월 22일] 잃어버린 10년의 허구와 비극

이영성 논설위원 입력 2014. 04. 21. 21:07 수정 2014. 04. 21.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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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정부의 위기관리 시스템 무시한 MB정부의 오만세월호 비극은 '과거'에서도 지혜를 얻으라는 교훈

6년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이명박 정부 출범 한 달여 전인 2008년 1월 중순, 인수위 발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 폐지' 기사가 나왔다. "청와대 지하벙커(종합상황실)를 관리하는 위기관리센터가 없어질 것"이라는 얘기도 나돌았다.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와 인수위는 거칠 것이 없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의 말은 더더욱 먹히지 않았다.

이 와중에 청와대 위기관리비서관을 겸하고 있는 류희인 NSC 사무차장이 인수위를 찾았다. 어떻게든 NSC 사무처와 위기관리센터를 살리고 2,800권에 달하는 위기관리 매뉴얼이 보존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이경숙 인수위원장과 외교안보분과 위원 10여명이 들었다. 류 차장은 보고를 마치고 "지하벙커를 한 번 보고 판단해달라"고 호소했다. 지하벙커는 한반도 주변 반경 360㎞ 내에서 움직이는 북한 전투기를 포함, 모든 비행기를 추적하고 육상과 바다의 안보상황을 한 눈에 들여다보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원전가동 정보, 한강오염 상황, 대형사고 발생 여부 등 주요 상황정보가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위기 상황을 담당하는 23개 기관들과 핫라인으로 연결돼 있었다.

그러나 인수위는 NSC 사무처를 폐지하고 NSC를 비상설조직으로 바꿨다. 다만 종합상황실과 위기관리센터는 소속 인원의 대폭 축소, 센터장 직급 하향 조정(1급 비서관→2급 행정관)에다 "6개월 후에 존속 여부를 다시 판단한다"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남았다. 이 와중에 노무현 정부 내내 만들어졌던 방대한 위기관리 매뉴얼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됐다.

이명박 정부가 'Anything But Rho(노무현이 아니면 뭐든 좋다)'라는 노선만 취하지 않았다면, 정부의 위기관리 대응이 좀더 탄탄해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만약 그랬다면 세월호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지금보다는 훨씬 신속하고 체계적인 대응으로 많은 인명을 구했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가정도 해본다.

위기관리 매뉴얼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가 많은 장관 후보자들의 낙마를 겪으면서 만들었던 인사검증 매뉴얼도 무시당했다. 그 결과, 이명박 정부는 조각 때부터 인사 파동에 휘청거렸고 뒤늦게 별도의 인사검증 매뉴얼을 만드는 고생을 했지만 부실하다는 혹평을 받았다.

더 큰 문제는 남북관계 등 국가전략적 분야에서도 무시와 묵살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을 위해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수정하고 대북 강공 기조를 취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2000년 6ㆍ15 남북 정상회담과 2007년 10ㆍ4 남북정상 선언의 합의를 송두리째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바람에 어렵게 쌓아온 남북 화해협력 프로세스는 좌초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핵 문제가 해결된 것도, 북한을 응징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이라는 굴욕을 당했을 뿐이다.

복기해보면, 당시 이명박 정부의 의식을 관통하는 논리는 '잃어버린 10년'이었다. 김대중ㆍ노무현 정부는 경제와 안보 등에서 무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허구였다. 가장 기초적 통계인 GDP 성장률을 비교해보면, 김대중 정부는 1998년 외환위기 때의 -5.7%를 포함해 5년 평균 5.0%를 기록했고, 노무현 정부는 4.3%였지만, 이명박 정부는 2.9%에 그쳤다. 물론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있었지만, 이를 감안해도 세계경제의 평균성장률보다 앞서지 못한 이명박 정부의 경제실적은 후한 평가를 유보하게 한다.

'잃어버린 10년'이나 '우리가 남이가'처럼 잘 짜여진 정치구호나 프레임은 진실 여부나 옳고 그름을 떠나 대중의 의식을 지배한다. 선거 때는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지도자의 국정 수행에는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 '너는 틀리고 나는 옳다'는 판단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10년'에 도취했던 이명박 정부와는 달리 박근혜 정부는 무조건 단절만 하지 말고 '과거'에서도 지혜를 얻었으면 한다. 세월호 비극이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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