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 잊혀질 권리 있다" EU법원 첫 인정.. 찬반 논란

박민식기자 입력 2014. 5. 14. 20:59 수정 2014. 5. 14.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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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에 개인정보 삭제 명령

유럽연합(EU) 내 최상급 법원이 온라상에 게재된 개인과 관련된 각종 정보와 게시물의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인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를 처음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EU가 1995년 '개인정보 보호 규정 및 지침'을 마련한 뒤 꾸준히 논의돼 온 온라인상의 잊힐 권리를 적극적으로 인정한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왔지만, 표현의 자유 침해 및 악용될 소지도 있어 논란이 확산될 전망이다.

잊혀질 권리 인정한 역사적 판결

ECJ는 스페인 변호사 마리오 코스테하 곤잘레스씨가 '잊혀질 권리'를 요구한 소송에서 "(게시될 당시 목적과 다르게) 부적절하거나 연관성이 낮거나 과도한 개인정보의 삭제를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고 밝혔다. ECJ는 구글에 검색 결과 페이지에서 시효가 지나고 부적절한 개인 정보를 삭제할 것을 명령했다. 또, 구글은 사용자가 개인정보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링크'도 마련해야 한다.

ECJ는 EU의 모든 회원국에서 동일하게 EU법이 적용될 수 있도록 해석하는 기관으로, 회원국이나 기관 간 법적 분쟁 해결은 물론 권리를 침해 당한 개인, 기업, 단체가 제소할 수 있다. 이번 판결은 5억명에 달하는 EU 시민 모두에게 적용된다. EU가 추진 중인 '개인정보보호 강화법' 개정 작업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이번 소송은 곤잘레스가 2009년 소를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당시 구글에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면 채무 상세내역과 재산 강제 매각 내용이 담긴 1998년 신문 기사가 나와 "사건이 해결됐는데도 인터넷에서 사건이 검색돼 개인 정보가 침해됐다"며 해당 기사를 작성한 신문사에 기사 삭제를, 구글에는 링크 삭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삭제 요구가 거절되자 그는 당국인 스페인 정보보호원에 이의를 제기했고, 정보보호원이 2010년 7월 신문사와 구글에 다시 기사 및 해당 링크 삭제를 요구했다. 구글과 신문사는 "기사 내용이 모두 사실이고,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으며 삭제 요청은 검열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또 다시 거부해 사건은 법원으로 넘겨졌다. 결국 스페인 고등법원이 ECJ에 사건을 의뢰해 5년 만에 마무리됐다.

곤잘레스는 "공익과 상관 없고, 오직 개인의 존엄과 명예를 훼손하는 정보를 삭제하려고 싸웠다"며 "이번 판결로 소비자도 자신의 권리를 방어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고 기뻐했다. 구글은 "실망스러운 판결"이라며 당혹해 했다.

'잊혀질 권리' 찬반 논란 확산

'잊혀질 권리'를 둘러싼 논란이 ECJ의 판결로 인해 일단락됐지만, 거센 후폭풍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ECJ가 "공공의 이익과 개인 사생활에 대한 권리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며 "개인의 요구가 있을 경우 해롭거나 불법적인 관련 정보를 제거해야 한다"고만 밝혔을 뿐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윤리적인 문제다. 개인의 사생활 및 정보보호와 공익이라는 중요한 가치가 상충할 때 명확히 선을 긋기가 어렵다. 살인 성폭행 등 강력사건 범죄자나 정치인이 자신의 전과 기록이나 이력을 감춰 공익과 관련 정보를 없애는 도구로 전락할 위험성이 높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사기 전과가 있는 이용자가 결혼을 앞두고 관련 정보의 삭제를 요청한다면 수용해야 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며 "도덕적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페이스북 구글 등 인터넷업체가 주요 회원인 '컴퓨터커뮤니케이션 산업협회'는 "엄청난 사적 검열의 문이 열렸다"며 "정치인이나 뭔가를 감추려는 사람이 악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더 나아가 표현의 자유가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이번 판결로 인해 잊혀질 권리를 놓고 다투는 유사 사례가 제기됐을 때 ECJ의 판결을 현실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공공의 이익을 어느 선까지로 한정할 지, 영상을 복사해 다른 곳에 게재할 경우는 어떻게 할지, 얼마나 오랜 기간 관련 정보를 삭제해야 할지 등 세부사항을 두고 당사자간 충돌이 계속돼 부수적인 문제가 양산될 소지가 다분하다. 또, 구글의 경우 이미 한 주에 530만건의 정보 삭제요구를 처리하고 있어 삭제 요구가 급증하면 그 비용과 민원을 감당할 수 있을 지도 불투명하다.

다른 나라에도 영향

ECJ의 판결은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판결의 효력은 유럽에 한정되지만, 인터넷은 국경이 없고,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꾸준히 제기돼 왔기 때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청소년들이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등에 올린 사진과 글이 추후 직장 생활 등에 문제가 되면 해당 업체에 삭제 요청을 할 수 있게 한 '온라인 지우개법'이 내년부터 시행된다. 그러나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제1조에 따라 연방법원이 ECJ와 비슷한 판결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개인이 온라인에 떠도는 개인정보를 삭제할 수 있는 권리를 담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지난해 제출됐다. 18대 국회에서도 세 차례나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18대 국회가 종료하면서 자동 폐기됐다. 인터넷 서비스 업체로 구성된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KISO)가 '사망자의 디지털 유산 처리방안 연구'라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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