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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는 왜 주차관리원 자리도 못 얻었나

입력 2014. 05. 17. 10:40 수정 2014. 05. 17.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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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10) 전쟁에 간 미군들

1987년 작 영화 <풀 메탈 자켓>(Full Metal Jacket)의 한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미군 신문인 <성조>(Stars and Stripes)의 기자인 주인공이 전선을 취재하러 가기 위해 헬기를 탔을 때 한 병사는 지상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그리고 그는 주인공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격수(Gunner): (내가 쏠 때) 누구든지 뛰는 놈은 베트콩이다. 누구든지 서 있는 놈도 잘 훈련받은 베트콩이다. 너희들 말이야, 언젠가 내 이야기를 좀 써 줘.

주인공(Joker 일병): 왜 우리가 당신 이야기를 써야 하지?

저격수: 내가 열나 잘하니까. 지금까지 157명의 노랭이를 죽였지. 여기에 더해서 물소 51마리를 저격했지. 확실해.

주인공: 아이와 여자도 포함되어 있나?

저격수: 가끔.

주인공: 어떻게 여자와 아이를 쏘는가?

저격수: 간단하지. 너무 많이 묻지 마. 전쟁은 지옥 아냐?

그 저격수는 미국 영화에서 빈곤층 출신 사고뭉치 아이들이 쓰는 전형적인 말투를 쓰고 있다. 주인공도 그렇게 잘난 집안 출신은 아닌데, 그래도 고등학교 때 학교 신문사에서 일한 경험을 가진 책상뭉치라 전선이 아닌 기자로 투입되었다.

웨이터·공장노동자·트럭운전사·목수…

영화 <풀 메탈 자켓>은 베트남 전쟁과 관련해서 미군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다 담으려고 한 것 같다. 그래서 내용이 좀 산만한가? 훈련소에서 적응하지 못한 신병은 베트남으로 가기도 전에 훈련 책임자를 죽이고 본인도 자살한다. 최전선에 있는 미군들은 매일매일 죽음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후방에 있었던 미군들의 일상 중 하나는 매춘이었다. 전선의 미군들은 베트남 민간인들의 주검 앞에서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수색 중에 떨어져 있는 인형을 주우려 하자 그 밑의 부비트랩이 터진다. 동료 미군의 죽음도 이제 또 다른 일상이 되었다. 베트콩 여성 저격수 한 명 때문에 몇 명의 미군이 희생당한다. 미군이 자랑하는 해병대는 수색 중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누가 이런 전쟁에 가고 싶겠는가? 징병제가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든 가야 했지만, 그렇다고 모두 가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도 징병제가 있다. 모든 한국인 남자들은 일정한 연령이 되면 의무적으로 군대를 가야 한다. 그러나 모두 군대를 가는 것은 아니다. 뛰어난 특기와 역량으로 인해, 또는 신체적 문제로 인해 군대를 안 갈 수도 있다. 이건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 정치적 지위가 높을수록, 사회적 명예가 높을수록, 경제적 부가 많을수록 그런 가족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군대에 가지 않는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둠의 자식들'도 아니요, '사람의 아들'이 아니며, '신의 아들'이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정부의 국가안보 컨트롤타워에는 정상적으로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 거의 없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장성들과 정치인들은 그들의 아들을 전선에서 잃은 경우가 많았다고 칭송받기도 했다.

베트남전쟁에서도 미국 사회의 지도층들은 한국전쟁 시기와 같이 모범을 보였을까? 매사추세츠공대(MIT)의 크리스천 애피 교수는 도대체 누가 참전한 것인가에 대해 분석함으로써 베트남전쟁의 본질에 접근해 보고자 했다. 그는 <노동자계급의 전쟁: 미 전투병과 베트남>(Working Class War: American Combat Soldiers and Vietnam)이라는 책을 통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군들을 분석했다. 그는 이 연구를 통해 주목할 만한 결론을 도출했다. '베트남에서 있었던 미국의 전쟁'은 미국 역사상 있었던 다른 전쟁에서 볼 수 없었던 노동자 계층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쟁 시기에 징병 연령에 해당되는 젊은이들의 수는 총 2700만명에 달했다. 이들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베이비붐 세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이었다. 어쩌면 1960년대의 20대는 미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세대였는지도 모른다. 징병의 대상이 되는 2700만명 중에 약 10%인 250만명이 베트남에 갔다. 그렇다면 베트남에 간 10%는 누구였고, 가지 않은 90%가 누구였는가가 곧 애피 교수의 질문이었다. 물론 90% 중에는 한국, 필리핀, 독일 등 해외 주둔 미군으로 파견된 사람들도 있었다.

애피 교수에 따르면 베트남에 간 250만명 중 약 80%는 노동자 또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이었다. 노동계층의 아이들은 군대에 가고 부잣집 아이들은 대학에 갔다. 웨이터, 공장노동자, 트럭운전사, 회사의 비서, 소방관, 목수, 영세 상인, 경찰관, 영업 판매원, 광부, 그리고 농부의 가족 출신이 주로 징집의 대상이 되었다. 1961년부터 1972년 사이 매년 산업재해로 1만4000여명의 노동자들이 죽었는데, 베트남전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생겼던 1968년 거의 같은 수의 미군이 죽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군인이나 노동자나 모두 가장 더러운(the most dirty) 직종이었다.

한 예로 보스턴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인 도체스터의 베트남전쟁 당시 인구수는 인근 지역인 밀턴, 렉싱턴, 웰즐리 지역과 비슷한 10만명 정도였다. 베트남전쟁으로 인해 죽은 이 세 지역 출신은 모두 합쳐서 11명이었지만, 도체스터 한 지역에서는 42명이 죽었다. 1964년에 실시된 미국의 국가여론조사센터(National Opinion Research Center)의 조사에 따르면, 참전 군인 아버지의 약 20%만이 화이트칼라 출신이며, 참전 군인의 약 12%가 1960년대 전체 인구의 5%에 지나지 않는 농촌 가정 출신이었다.

일리노이주에 대한 조사 결과도 유사했다. 가구당 소득 5000달러 이하(1990년 환산으로 1만5000달러) 출신의 사상자가 1만5000달러 이상(1990년 환산 4만5000달러) 출신자보다 4배 이상 많았다. 미국 내 작은 타운 두 군데에 대한 비교 연구에서도 의미 있는 결과가 나왔다. 고등학교 졸업자가 전인구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1만7500명 규모의 작은 타운(주로 농민과 면직물공장 노동자들 거주)에서는 베트남전쟁으로 인해 15명이 전사했는데,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1만9000명 규모의 한 타운에서는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전사자가 없었다.

베트남에 간 250만명 중 80%는노동자 또는 가난한 집안 출신대부분 10대로 평균연령 19살이들에게는 투표권도 없었으니정치적 의사 표현도 불가능했다또 다른 문제는 인종차별이었다초기엔 전체 사망자 20%가 흑인인종비율 고려하면 사망률 2배수색 때 흑인들을 앞에 세웠는가백인에 의한 공격이 있었던가

참전군인 중 대학 재학·졸업자는 21.4%

또 하나 주목해야 하는 점은 지원자의 대부분이 10대였다는 사실이다. 지원자들의 평균 연령은 19살이었다. 이들에게는 투표권조차 없었다. 미국 사회는 1971년에 가서야 투표 가능 연령이 21살에서 18살로 낮아졌다. 자기 스스로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수 없는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간 것이다.

로버트 코너는 1993년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Red Thunder, Tropic Lightning: The World of a Combat Division in Vietnam, 1993)

"나는 내가 왜 남베트남에 있는지 몰랐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운다고 추측했지만, 나는 당시 공산주의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얘기할 수 없다. 내가 아는 것은 검은 모자를 쓴 작은 친구들이 나를 향해 총을 쏘고 있다는 것이었다. 되돌아보건대, 그놈도 왜 나를 향해 총을 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을 것 같다. (중략)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설명할 수 없는 전쟁에서 싸웠다. 나는 우리가 거기에 있어야 한다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서 성취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 베트남에서 나올 때 기뻤지만, 나는 거기에서 왜 나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우리는 한 대통령 아래에서 거기에 가야 했고, 다른 대통령 아래에서 거기에서 나와야 했는가? 왜? 당시의 장군들, 국회의원들, 그리고 대통령들은 그러한 바보 같은 실수를 한 것에 대해 전능하신 하나님께 설명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베트남도 1965년의 베트남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지금 거기서 싸우지 않고 있는가?"

자신들이 뽑지 않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을 베트남으로 보냈다. 자신들이 가고 싶지 않다고 항의의 표시로 이들에게 반대표를 던질 수도 없었다. 정치인들은 베트남 양민들을 돕기 위해 보내진다고 했지만, 양민들은 미군들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이 살 터전을 지키기 위해 간다고 했지만, 군대는 베트콩의 씨를 말리기 위해 그 터전을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공산주의 확산을 막으라고 말했지만, 공산주의는 이미 베트남 전체로 확산되어 있었다.

이 대목에서 2006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했던 연설이 떠오른다. "전쟁은 40대 이상의 장년층이 일으키고 전쟁터에서는 20대가 죽는다.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40대 이상을 전선으로 보내자."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참전 군인의 수는 많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부터 미국 사회에서 고등교육의 붐이 시작되었다. 1965년 18살에서 21살 사이의 젊은이 중 약 45%가 대학교육을 받고 있었다. 1970년에 가서는 50% 이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1966년부터 1971년 사이 베트남 참전 군인 중 대학 재학 또는 졸업자는 총 21.4%에 지나지 않았다. 하버드대학 1970년 입학자들을 조사한 결과 단 두 명만이 베트남에 참전해 있었다. 그나마 베트남에 간 대학생들은 비전투직에 배치되었다.

또 다른 문제는 인종차별 문제였다. 베트남전쟁 초기 흑인들이 전체 사망자의 20%를 차지했다. 이는 흑인이 차지하는 미국 전체 인구 비율이 10%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사망률이 2배에 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사망률이 감소하기는 했지만, 초기 이들의 사망률이 높은 이유는 분명치 않다. 수색 정찰에서 흑인 병사들이 항상 앞에 서도록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흑인 병사들의 지능이 떨어져서 적의 매복이나 부비트랩에 쉽게 당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프렌들리 파이어(friendly fire)라고 불리는 아군, 특히 흑인에 대한 백인의 공격 또는 미 공군의 오폭에 의한 것인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분명한 것은, 흑인의 지능이 백인보다 떨어진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흑인의 사망률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흑인이 더 위험한 작업에 동원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부대 내의 또 다른 사회적 갈등 요소가 작동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웨스트포인트 출신들도 거의 가지 않았다

장교들 사이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났다. 1966년의 조사에 의하면 미군 최고의 엘리트 군인 배출 기관인 웨스트포인트 출신 중 베트남전쟁에 장교로 참여한 비율은 11%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출신 가족의 생활수준이 낮아지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했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입학자의 3분의 1이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가정 출신이었다. 195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전문직 가정 출신은 전체의 10%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사관학교를 졸업해서 국가의 엘리트 군인이 된다는 것이 큰 영광이 되지 않았다. 10년이 넘지 않아 연이어 전쟁을 경험하고 있었던 미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을까?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부터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20년이 넘는 기간이 걸렸지만, 1950년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부터 5년, 1964년 통킹만 사건과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 개입은 한국전쟁 정전으로부터 1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자기 자식을 사관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장교로 임관하자마자 전쟁터로 보낼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의 참전 군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다는 '자긍심'과 참전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었다. 그러나 자긍심이나 보상금 대신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반전운동가들이었다. 이들은 영화 <7월4일생>이나 <람보>의 주인공처럼 스스로 전쟁 자체에 회의를 품기도 했다. '람보'는 외쳤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자기에게 주차관리원 자리조차도 주어지지 않는다고.

게다가 이들에게는 민간인 학살자라는 오명까지 덧씌워졌다. 학살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싸워야 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군인들에게 국가는 끊임없이 승리를 요구했다는 것이 그 본질이었다. 베트남으로부터 나와야 될 시점에서 오히려 정반대 결정을 내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참전 군인들은 다시 국가한테 물었다. 어떻게 이길 것인가? 또 어떻게 이기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가?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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