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잊혀질 권리

박경신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14. 6. 8.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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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통 '잊혀질 권리'라는 말을 쓸 때 "누구의 기억으로부터 잊혀질 권리"인지가 자주 잊혀진다. 구글? 정부? 포털? 아니다. 일반시민들, 우리 동료들의 기억으로부터 잊혀질 권리를 말한다. '잊혀질 권리'는 일반인들이 타인에 대해 합법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볼 수 없도록 하여 그것의 기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망각되도록 할 권리를 뜻한다.

무엇이 잊혀지길 원하는가? '잊혀질 권리'라는 규범이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것들이 잊혀지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프라이버시'라는 규범만으로도 그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면 '잊혀질 권리'라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잊혀질 권리'는 잊혀져야 하는 내용이 프라이버시에 속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 내용을 차단·삭제하기 위해 존재한다. 처음 '잊혀질 권리'가 논의될 때는 성폭행 피해자나 과거에 매매춘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갱생할 자유를 보장하자는 논의와 동반되었고 이러한 '과거'의 생성과정과 공개과정을 따져보면 프라이버시로 인정될 만하였다. 그러나 '잊혀질 권리'는 프라이버시와 전혀 무관하게 단순히 '자신이 싫어하는 과거를 타인의 기억으로부터 삭제할 수 있는 권리'로 확장되고 있다.

지난 4월 유럽사법재판소의 '구글 스페인' 결정이 바로 그런 예를 보여준다. 한 변호사가 연금부담금 미납을 이유로 자신의 집이 경매에 처해졌을 때 16년 전의 신문에 실렸던 경매공고를 구글 검색 결과에서 삭제해달라는 신청을 받아준 것이다. 경매공고는 내용이 합법적이었음은 물론 일반대중에게 알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경매공고는 모든 재판은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는 헌법적 원리를 경매절차에서 관철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절차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법원공무원이나 정부기관이 경매를 부당하게 집행하여 채무자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경매를 부정축재의 온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럽사법재판소는 과거의 경매사실이 구글의 '정보수집 목적에 부적절하고 무관하고 과도하다'면서 구글 검색에서 제외하라고 판결했다.

명예훼손은 물론 사생활의 침해도 아닌 합법적인 정보를 안내하지 말라고? 이렇게 해석되는 '잊혀질 권리'는 결국 동료들이 이미 적법하게 알고 있던 자신에 대한 진실을 국가의 힘을 빌려 동료들의 기억으로부터 삭제하겠다는 시도일 뿐이다. 동료들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물리적으로 삭제할 수는 없으니, 그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관련 정보가 상호 간에 소통되지 못하도록 차단하여 기억이 시간에 의해 파괴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는 자는 대중들 사이의 합법적인 소통을 차단하고 검열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이미지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어려움을 딛고 일어난 사업가'의 이미지를 '실패를 모르는 사업가'의 이미지로 대체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자신의 성공사례들을 강조하고 실패 사례들에 반박하는 방식이 아니고 타인들 간의 합법적인 소통을 차단하고 검열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유럽사법재판소 판결에 반대하는 견해를 냈던 검사장의 말이 명징하다. "과거의 보도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과거의 보도를 새로운 내용으로 교체하는 것은 역사를 위조하는 것(falsification of history)."

아무런 설명 없이 여론조사를 해보면 '잊혀질 권리'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공인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알 권리가 있지만 사인에 대해서까지 진실을 모두 알 필요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합법적인 정보라면, 그것을 '알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각자가 판단할 자유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약속은 세월호 같은 사고에 대해서만 할 자유가 있는 것인가. "프라이버시는 뭘 하든 간섭받지 않을 권리"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석하자면 합법적인 정보에 근거하여 타인에 대해 자유롭게 견해를 형성하고 공유할 자유는 왜 또한 프라이버시가 아닌가?

< 박경신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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