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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다와서 뽀뽀해 준다더니.. 장례식 두 번 치렀다"

입력 2014. 06. 19. 08:19 수정 2014. 06. 19.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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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윤솔지 기자]

고 장준형 학생

ⓒ 장준형

"우리 준형이는 신부님을 도와주는 안산시 예비 신학생 복사단 단장이었어요. 한 번도 '싫어요, 하기 싫어요, 안 할래요' 한 적 없는 예쁜 아이였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와 헤어진 후 고모 둘과 할머니, 아버지 손에 자란 세월호 희생자 단원고 2학년 장준형군. 준형군의 아버지는 매일 새벽 농수산물센터에서 일한다. 그 탓에 아버지는 아들 생전에 많은 관심을 못 줬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준형군의 아버지는 나머지 실종자들을 찾는 게 준형이에게 속죄하는 길이라며 오늘도 팽목항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는 현장에서 실종자 가족을 돕고 있다.

나머지 식구들이 생업을 대신하면서 준형군의 동생들을 돌보고 있다. 준형군이 잊혀지는 게 두렵다는 작은 고모 장소희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준형군은 어떤 학생이었나요?

"새벽 복사(가톨릭 미사 때, 사제를 돕는 일)하는 걸 아이들은 싫어하거든요. 새벽 5시 반에는 성당에 가 있어야 하는데 당번이 아닌 날에 전화 와도 '예, 하겠습니다'하던 아이예요. 유품을 챙기러 학교에 갔더니 게시판에 준형이의 꿈은 가톨릭대 간호학과 진학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준형이 엄마가 집을 떠난 뒤 저희 가족은 오빠(준형이 부친), 저, 언니 모두 뭉쳐서 살았거든요. 저희 언니는 시집도 못 가고 아이들 돌보며 살았고요. 준형이 아래로 고1, 초교 6학년과 2학년 이렇게 동생 셋이 있어요."

- 사건 후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셨나요?

"저희는 장례를 두 번 치렀어요. 중간에 한 번 (시신이) 바뀌었거든요. 준형이 몸에 있던 점의 위치도 같았고, 유전자도 맞다고 했어요. 다만 옷이 달랐는데, 그 전날 아이들끼리 게임하고 옷도 바꿔 입었다고 해서 '그랬구나' 했거든요. 입관하고 24시간 만에 (시신이 준형이가 아니라고) 연락이 왔어요. 99.23퍼센트인가? 유전자 일치했는데, 그보다 더 높게 일치하는 가족이 나타난 거예요. 한 선실에 오래 있으면 부유물이 섞인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팽목항에 내려가서 기다리다가 일 주일 만에 아이를 찾았어요. 2주 걸쳐 장례를 두 번 치른 거지요. 다시 만났을 때는 너무 많이 다쳐서 (준형이를) 알아보기가 힘들었어요."

"유전자 99% 일치했는데..."

- 그런데 며칠 전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요.

"최근 준형이 생모가 국가와 청해진해운을 상대로 손배소송을 냈더라고요. 아이 목숨값으로 총 2억9600여만 원을 산정해서 우선 3000만 원만 청구한다고 했대요. 다른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는 게 아닌가 싶어서... 안타까워요. (현행법은 불의의 사고로 결혼하지 않은 미성년 자식이 사망했을 때, 유언 등으로 수익자를 정해놓지 않았으면 부·모가 각각 사망보험금의 50%의 권리를 갖는다.)

- 그동안 생모와 준형군은 왕래가 없었나요?

"네. 엄마와 헤어지고 두 번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안 좋게 헤어졌나봐요. 그날 밤 준형이가 엄청 울었어요. 그래도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하던 아이였어요. 학교에서 기죽기 싫어 동생들은 큰고모한테 엄마라고 불렀거든요. 수학여행 가던 날 마지막 통화에서 준형이가 큰고모에게 '엄마, 저 이제 출발해요. 잘 다녀올게요' 그랬대요."

- 가족들이 화목하게 지냈나봐요.

"온 가족이 함께 살다가 일 년 전쯤 저희 가족만 안산 원곡동에 남고 준형이 가족이 국가 지원을 받아 월피동으로 이사 갔어요. 그런데 준형이는 사촌동생이 좋은지, 애들 보러 (원곡동) 왔다가 차비도 받지 않고 도보로 40분 넘는 거리를 매일 걸어서 돌아간 아이였어요."

- 어려운 상황에서도 밝은 학생이었나봐요.

"준형이가 제일 잘하던 말이 '할 수 있어, 힘내'였어요. 어른들이 지쳤을 때도 할머니 다리를 주무르면서도 '우리 행복해질 수 있어. 힘내요', 저에게는 수학여행 가기 전날 찾아와서 능글맞게 '고모, 갔다 와서 뽀뽀해 줄게. 나 잘 갔다 올게. 나 개념 있는 학생이잖아' 그랬어요."

- 많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시겠어요.

"준형이 할머니는 밖에 나가지도 못 해요. 아무도 저희한테 뭐라고 안 해도 사람들 눈빛만 봐도 저희한테 '자식도 못 지킨 바보 멍청이'라고 하는 것 같아서... 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잘 수 없고, 밥을 삼키면 다시 넘어오고... 그래도 견뎌야 한다는 걸 명심하고 살고 있어요. 살아야 나머지 아이들하고 오빠(준형이 아버지) 지킨다고. 그래야 준형이한테 덜 미안하니까. 준형이에게 많이 못 해준 것만 생각나서 한이 될 뿐이에요."

"구하지 못한 책임 꼭 밝혀야"

- 어떤 걸 못해준 게 가장 한이 되나요?

"친구한테 축구화를 빌려 신었더라고요. 유품 정리 하다가 알았어요. 그리고 성당에서 고교 2학년 올라갈 때 베이스 기타를 가르쳤는데, 손톱이 부스러지게 연습해서 미사 때 (연주하면서) 즐거워 했어요. (베이스 기타) 가지고 싶다고 말했으면 어떻게든 구해줬을 텐데. 베이스 기타와 축구화, 그거 못 사준 게 정말 한이 돼요."

- 지금 다른 유가족분들의 심경은 어떤가요?

"지금 실종자 가족의 소원은 (실종자) 손톱 하나라도 만져보고 보내고 싶은 거고요. 유가족들은 왜 우리 아이들이 하늘나라에 가야 했나를 알아야 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에요. 구할 수 있는 생명을 구하지 못한 책임을 꼭 밝혀야 해요."

- 지금 가장 간절한 것은 무엇인가요?

"준형이가 바다 속에서 죽어갈 때 아무것도 못 해준 우리는 지금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요. 준형이는 입관할 때 사제복을 입고 갔어요. 하늘에서도 하느님이 복사 대장 시켜 줬을 거예요. 그렇게만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어요. 비록 천사 같은 얼굴로 가지는 못 했지만 하늘에서는 천사 같은 모습으로 있을 거예요. 준형이 이름이 맑고 예쁘게 남았으면 좋겠어요. 잊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현재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다수는 희생자들의 사망신고는커녕 휴대폰 해지도 차마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실종자 수습과 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준형군 작은고모 장소희씨는 인터뷰하는 2시간여 동안 오열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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