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포이가 '문명의 배꼽'이라 불리는 이유는?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2014. 7. 2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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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 편집자 주 >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내가 찾아온 이곳은 델포이 땅으로, 포이보스(아폴론)는이곳에 있는 대지의 배꼽에 앉아 신탁을 노래함으로써사람들에게 현재사와 미래사를 늘 예언해주곤 하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이온(Ion)'의 첫머리에서 제우스의 전령 헤르메스가 델포이를 찾아와 하는 말이다. 델포이는 예언의 성지였다. 그리스 세계뿐만 아니라 당시에 교류하던 주변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 피티아(Pythia)에게 불확실한 국가의 중대사와 개인의 미래에 대해 물었다. 델포이가 어떻게 최고의 신탁 장소가 되었을까?

접신(接神)을 위한 신비한 지세 델포이 성역

앞날을 예측하고 대비하려는 욕구는 나약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본연의 욕구다.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무언가 초월적인 힘에 의지하려는 인간의 속성은 자연스럽게 종교적 믿음이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의존으로 이어진다. 이는 고대 사회의 공통적 특징이었다. 이런 수요에 부응하여 신의 계시를 전해주는 신탁의 장소는 그리스 세계에 여럿이 있었다. 그 가운데 델포이가 가장 유명했던 이유는 뭘까? 델포이의 아폴론 성역에 이르면 그 까닭의 하나를 알 것 같다.

우선 지세(地勢)의 독특함에 먼저 놀라게 된다. 아폴론 성역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스타디온 쪽에서 델포이 성역을 내려다보면, 파르나소스 산의 심산유곡에 둘러싸인 델포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느낌이 저절로 일어난다. 한국의 풍수가들이 본다면 양기(陽氣)가 철철 넘치는 곳임을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다. 산허리의 오목한 비탈에 자리한 델포이 성역은 남쪽으로만 시원하게 열렸고, 좌우와 뒤쪽엔 깎아지른 회백색의 암벽이 둘러쳐져 있다.

델피 성역은 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높은 파이나소스 산의 남쪽 산허리 해발 500미터쯤에 위치하고 있다. 성역의 동쪽과 북쪽을 파이도리아데스 산괴(山塊)가 깎아지른 절벽을 만들어 외호(外護)하고 있다. 멀리 동쪽과 남쪽으로 파이나소스 산계(山系)가 길게 병풍처럼 이어진다. 남쪽으로는 델포이와 마주보는 급경사진 산이 만드는 깊고 긴 협곡의 나무 숲 밑으로 프레이스토스강(江)이 흐른다.

관목조차 거의 자랄 수 없는 정상부의 거친 암벽과 달리 산허리부터 산기슭까지 온통 올리브의 수림(樹林)으로 덮여 있다. 간간히 긴 원추형의 사이프러스 나무가 뾰족 뾰족 솟아있다. 남쪽을 막아선 산을 넘으면 코린토스 만이다. 협곡의 서쪽 끝에서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이테아라는 작은 항구에 이른다. 코린트에서 뱃길로 델포이에 올 때 거치는 항구다. 보이오티아 지방이나 아테네 쪽에서는 파르나소스 산정이 낮아진 남동쪽의 계곡을 넘어가야 했고, 시칠리아나 펠로폰네소스 반도 쪽에서 올 때는 이테아 항을 통해 가파른 오르막길로 델포이에 올랐을 것이다.

어느 길로 접근하든 델포이로 오르는 길은 첩첩산중을 돌고 도는 길이다. 오르는 동안 주변의 경관에 취하다 델포이 성역에 다다르면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터 잡은 작고 아늑하며 성스러운 공간을 마주하며 경건해진다. 델포이는 경이로운 장소다. 3000여 년 동안 지금처럼 언제나 적막하고 고적한 기운이 가득했을 것 같다. 속세의 번잡함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곳이다. 아폴론 신과 접신(接神)하기엔 더없이 안성맞춤인 장소다.

더구나 고대 그리스인이 보기에 델포이 성역이 대지의 중심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이미 제우스신이 델포이가 대지의 배꼽이라는 '사실'을 시험으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두 마리의 독수리를 각각 반대 방향으로 날려 보냈는데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바로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신화가 이를 입증한다. 아무튼 델포이의 지리적 중심성은 이곳의 신비로운 지형지세가 주는 느낌만으로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 아폴론 성역에서 가장 꼭대기에 있는 스타디온 쪽으로 오르다 내려다본 델포이 성역의 주변 지세다. 델포이를 심산유곡에 꼭꼭 숨겨 놓은 형상이다. 왼쪽 절벽 바로 아래로 보이오티아 지방과 아테네 쪽으로 이어지는 접근 도로가 보인다. ⓒ박경귀

◇ 신탁이 이루어지던 아폴론 신전 터다. 기둥이 남아 있는 쪽에 정문이 있었다. 깎아지는 절벽이 외호(外護)하듯 장엄하게 둘러싸고 있다. '빛나는 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듯이 이 암벽들이 석양빛을 받을 때면 황금빛으로 물들었었을 것 같다. ⓒ박경귀

◇ 아폴론 성역의 북쪽을 둘러싼 험준한 파르나소스 산줄기. 금방이라도 바위들이 쏟아져 내려올 것 같이 위태롭게 보인다. 거대한 암벽 병풍이 델포이 성역을 차가운 북풍으로부터 막아준다. ⓒ박경귀

정의의 여신 테미스, 문명의 산파가 되다

흔히 많은 이들이 델포이를 '대지의 배꼽'이자 '문명의 배꼽'이라고 일컫는다. 정말 델포이에 오면 이곳이 바로 우주의 중심이자, 대지의 중심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왜 '문명의 배꼽'이라 말하는 이유에 대해선 뚜렷하게 설명하는 이가 없다. 델포이는 단순히 세계의 중심에 위치한 신탁의 장소만은 아니었다. 문명을 탄생시킨 근원적 요인이 어딘가에 있을 법하다. 그 연원을 추적해 보자.

신탁을 위해 마련해 둔 천혜의 장소 델포이. 아폴론(Apollon)이 처음 이곳에 당도하기 이전부터 델포이는 신탁의 장소였다. 오랜 전부터 이곳에 주재하며 인간사를 살피고 신탁의 장소로 활용한 주인이 있었다. 바로 여신 테미스(Themis)다. 그녀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Uranus)와 대지의 신 가이아(Gaia)가 교합하여 낳은 12명의 티탄 가운데 하나다.

테미스는 전통과 관습, 법률과 정의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그녀는 오른 손에 칼을 쥐고, 왼손엔 죄와 벌, 정의와 부정의를 재는 천칭을 들고 있었다. 칼은 사실과 진실을 흐리게 하는 거짓을 단호히 잘라내는 데 쓰였다. 테미스는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이런 엄중한 소임을 주재할 중요한 신들을 낳아 자식들과 함께 그 책무를 수행했다. 헤시오도스는 '신들의 계보'에서 이렇게 전했다.

"그 분께서는(제우스) 윤이 나는 테미스와 결혼하셨고,그녀가 호라이 여신들(Horai, 계절의 여신), 에우노미아(Eunomia, 질서의 여신), 디케(Dike, 정의의 여신), 번영하는 에이레네(eirene, 평화의 여신)를 낳으니, 이들이 필멸의 인간사를 관장한다."(901~903)

테미스는 인격화된 관념의 신들을 낳았던 것이다. 이런 신들을 통해 인간 사회의 법과 질서, 관습, 정의와 평화를 주재했다. 테미스는 법과 질서를 해치고 정의를 파괴하는 인간에겐 보복의 신 네메시스(Nemesis)를 통해 징벌했다.

무질서와 혼란에서 빠져있던 인간사회에 질서와 정의, 평화를 바로 세우는 것은 야만에서 문명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제우스와 올림푸스의 신들이 티탄족과 전쟁을 통해 신의 세계를 평정한 후 비로소 인간사회의 질서와 정의, 평화의 주재자로 테미스를 보내준 것이 아닐까.

◇ 테미스 여신, 아티카 지방의 네메시스 신전에서 발굴되었다. 오른손에 정의의 칼을 왼손에는 천칭 저울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BC 300년 경 작품,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 사진 Ricardo Andre Frantz

대지의 배꼽에서 문명의 배꼽으로

인간사를 관장하는 중차대한 소명을 이행하기 위해 테미스 여신이 델포이에 맨 처음 터전을 잡았다는 것은, 테미스가 인류 가운데 그리스인에게 맨 처음 개명된 세계를 열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과 질서는 문명의 상징적 고안물이다. 테미스 여신이 인간 사회의 질서와 정의, 평화를 주재하며 인간을 계몽하고 문명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테미스가 추구한 세계는 분명 문명의 세계다. 혼돈과 어둠의 세계가 아니라 질서 있는 조화와 광명으로 빛나는 세계였을 것이다. 이러한 지향 가치와 사유 방식이 그리스 문명의 원천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나아가 서양 문명의 근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테미스가 전파하고자 하던 가치와 사유의 원천은 인간사회에서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무질서와 전쟁과 혼란으로부터 스스로 질서와 평화로 복원해 내도록 추동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듯싶다. 델포이가 대지의 배꼽에서 문명의 배꼽으로 승화될 수 있는 이유다.

로마인들이 정의의 여신을 유스티티아(Justitia) 여신으로 섬기고, 서양인들이 테미스와 유스티티아를 '레이디 저스티스(Lady Justice)'로 숭배한 이유도 이런 때문인 것 같다. 대개 유스티티아는 많이 알려졌지만, 실상 그 정의의 여신(Lady Justice)의 현신(現身)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미스 여신에서 유래된 사실은 덜 알려진 것 같다.

유럽 어느 나라를 가든 테미스 여신과 유스티티아 여신으로 형상화된 정의의 여신상을 여기저기서 만나게 된다. 프랑크푸르트의 뢰머 광장에서도, 스위스 베른의 구시가지에서도 테미스를 만날 수 있다. 정의의 여신상은 법원, 검찰 등 사법부 건물이나 법과 대학의 교정 등에서도 때때로 만날 수 있다. 한국의 대법원 건물에도 정의의 여신상이 있다. 하지만 전형적인 정의의 여신상의 형상과 가치를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과 이를 본 딴 유럽의 정의의 여신상들이 모두 서서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반면, 우리 조각상은 좌식이다. 게다가 옷차림과 얼굴 형상도 국적이 모호해 보인다. 특히 정의의 여신을 상징하는 칼 대신 법전과 들고 있는 점도 본래의 신화적 상징성과 가치를 떨어뜨린다. 물론 법전이 법에 의거 사건을 재단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는 있다.

하지만 정의의 여신의 칼이 사람을 해치는 무기가 아니라 진실과 사실을 가리는 거짓을 단호하게 끊어낼 수 있는 추상같은 기개와 예리한 정신을 의미한다는 점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법률은 당연히 심판에 활용되는 수단이다. 하지만 법전으로 대체할 수 없는 더 높은 차원의 가치와 정신이 칼로 상징되고 있다는 점을 놓친 건 아닐까. 서양의 가치를 수용할 때 어설픈 한국화를 시도하다가 본래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하는 예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이 든다. 작가가 테미스 신화의 심층적 배경과 상징성에 대해 숙고가 부족했던 것 같다.

아무튼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테미스 여신은 설치자마다 테미스 여신이 상징하는 법과 질서,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자신들이 지향하고 있음을 대외에 과시하면서 한편으로 사회 구성원들에게 이런 가치를 수용하고 숭상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테미스의 정신이 얼마나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말이다.

◇ 독일 프랑크푸르트 뢰머 광장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테미스 여신을 로마인들은 유스티티아(Justitia) 여신으로 불렀다. ⓒ박경귀

◇ 스위스 베른 구 시가지에 있는 분수대 위에 설치된 다채로운 색상의 정의의 여신 조각. 공정한 심판을 위해 눈을 가리고 있고, 오른손엔 정의의 칼을 쥐고 있고, 왼손에 죄와 벌을 균형 있게 가늠하는 천칭을 들고 있다. Hans Gieng(1525-1562) 1543년 작, 사진 TheBernFiles

인간세계를 재창조한 테미스 여신

델포이는 단순히 인간들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곳만은 아니었다. 테미스가 법, 질서, 정의, 평화라는 문명의 소중한 씨앗을 나누어주던 '문명의 배꼽'이었다. 다만 질서와 평화로운 삶 속에서 인간이 알 수 없었던 불확실한 미래를 예견하고 인간들을 정의로운 길로 인도하기 위해 신의 계시를 전하는 신탁의 행위가 가미되었을 뿐이다.

테미스는 어떤 예지로 인간을 도왔을까. 테미스는 인간 이전에 신들의 왕 제우스가 태어나도록 돕고 그가 올림푸스 신족의 제왕으로 계속 군림하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특히 제우스가 바다의 여신 테티스를 사랑하여 결혼하고자 할 때, 테미스는 만약 제우스가 그녀와 결혼해서 자식을 얻게 되면 그 자식한테 아버지인 제우스가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제우스 가계는 올림푸스 신족의 제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패륜을 서슴치 않았다. 크로노스(Kronos)는 아버지 우라노스(Uranus)의 성기를 잘라 바다에 던져 버리고 내쫓았다. 하지만 크로노스 역시 막내아들 제우스에게 쫓겨나 지하세계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이런 가계의 불행한 비사(秘史)를 알고 있는 제우스가 테티스와 결혼했다간 아들에게 쫓겨나게 되리란 테미스의 예언에 질겁했을 것이다.

제우스는 결국 테티스를 펠레우스와 결혼시키고 그 결실로 아킬레우스가 태어나게 된다. 제우스가 올림푸스 신족의 제왕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테미스의 경고가 결정적으로 기여한 셈이다. 테미스가 신들의 세계에서 더 이상의 혼란과 무질서가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테미스는 신들의 세계를 바로 잡은 후 인간 세계를 창조하는 일까지 계시해 준다. 인간들이 전쟁을 일삼고, 신을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자 제우스는 인간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대홍수를 일으킨다. 세상이 모두 물에 잠겼지만 파르나소스 산 꼭대기만 잠기지 않았다. 평소 신실했던 프로메테우스의 아들 데우칼리온(Deucalion)과 그의 아내 피라(Pyrrha)는 프로메테우스의 조언으로 미리 배를 만들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홍수가 휩쓸고 간 대지는 황량했다. 거의 모든 생물이 절멸했다. 데우칼리온과 피라는 테미스 신전에 제사를 올리며 다시 인간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간구했다. 테미스 여신은 인간을 재창조할 수 있도록 방책을 내려준다. "어머니의 뼈를 등 뒤로 던지라"는 신탁을 내린 것이다. 최초의 신탁은 너무나 실행하기 어렵고 애매모호했다. 어떻게 어머니의 유골을 집어던질 수 있단 말인가? 불효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데우칼리온은 고민 끝에 대지가 곧 어머니요, 돌이 어머니의 뼈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데우칼리온과 피라가 대지의 돌을 주어 등 뒤로 던지자, 각각 던진 돌이 아들과 딸이 되었다. 그 맏아들이 바로 헬렌(Hellen)이다. 그리스인들은 '헬렌의 자손'이란 뜻으로 헬레네스(Hellenes)로 불리게 된다. 테미스 여신은 인간을 다시 창조하고 이들에게 문명의 씨앗을 나누어 준 것이다.

테미스 여신이 신탁을 내린 신전은 어디에 있었을까? 현재의 델포이 성역 어딘가였을까? 아니면 파르나소스 산의 다른 산허리에 있었을까? 델포이에 테미스 여신의 흔적은 없다. 델포이와 연관 지어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테미스는 광명의 신 아폴론에게 자신의 소임을 인계하고 오래 전에 떠났다. 하지만, 델포이에서 그녀가 인간 사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열정을 바쳤던 자취와 온기를 회고하지 못하고 온다면 델포이 답사는 반쪽짜리에 머물고 말 것 같다.

괴물 피톤을 물리친 아폴론, 델포이 입성하다

아폴론의 델포이 입성은 쉽지 않았다. 대지의 중심에 똬리를 튼 피톤(Python)이 델포이 신전을 수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폴론은 활을 쏘아 피톤을 처치한 후 대지의 배꼽 아래로 던져버리고 입구를 큰 돌로 봉쇄했다. 사람들은 그 돌을 '배꼽'을 의미하는 옴파로스(Omphalos)라고 불렀다. 옴파로스는 지구의 중심을 상징했다. 따라서 아폴론 신전의 지하층의 피티아가 신탁을 전하는 비밀의 성소에 놓여있었다. 델포이 성역 여기저기에도 대지의 중심임을 알리기 위해 옴파로스의 복제품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아폴론이 피톤을 물리친 신화는 그리스 예술은 물론 서양 조형예술과 회화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테마다. 그 가운데 벨베데레(Belvedere) 궁전에서 발견된 아폴론 상은 최고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피톤 처치 이후의 아폴론의 당당한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치렁치렁 아름다운 고수머리, 절제된 자긍과 기쁨이 절묘하게 표현된 얼굴 표정, 완벽하리만큼 균형 잡힌 몸매, 망토의 자연스런 주름 표현, 긴장과 이완이 대조를 이루는 다리와 종아리 근육의 섬세한 표현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대리석 복제품이 주는 감상이다. 이 작품은 '라오콘의 군상'과 함께 바티칸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이다. 만약 BC 330년에 그리스 조각가 레오카레스(Leochares)가 제작한 원작 청동 조각상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 대지의 배꼽을 상징하는 옴파로스(Omphalos)다. 원추형의 대리석 외피를 마치 탯줄과 같은 매듭 문양이 둘러싸고 있다. 델피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 '벨데베레(Belvedere)의 아폴론상' 델포이에서 피톤을 처치한 후의 아폴론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BC 330년 그리스 조각가 레오카레스(Leochares)가 만든 청동 조각을 모각하여 로마시대에 대리석으로 만든 복제품이다. 바티칸 박물관 소장 ⓒ박경귀

◇ '아폴론과 피톤', 아폴론이 처치한 피톤을 발로 밟고 있다. Jan Boeckhorst(1604-1668) 작, 벨기에 현대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소장, 사진 Ophelia2

피티아 제전과 승리의 월계관

피톤을 물리친 아폴론은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여 피티아 제전(Pythia games)을 창설했다고 한다. BC 590년에 처음 열린 경기는 전차경주를 비롯하여 올림피아 제전에서 겨루던 여러 종목이 추가되면서 그리스 4대 제전(올림피아 제전, 네메아 제전, 이스트미아 제전, 피티아 제전)의 하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다른 제전과 달리 특이했던 점은 피티아 제전에서는 음악 경연이 함께 벌어졌다는 점이다. 음악의 신인 아폴론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피티아 제전에서 우승자에겐 월계수 관이 주어졌다.

델포이 성역의 맨 꼭대기 산 암벽의 바로 아래엔 피티아 제전이 열렸던 경기장, 스타디온(Stadion)이 자리 잡고 있다. 델포이 성역 입구에서부터 아폴론 신전에 이르는 '신성한 길'을 지나 이곳까지 가파른 길을 걸어 오르려면 숨이 가쁘다. 스타디온 관람석 바로 뒤로 깎아지른 절벽이 인상적이다. 그리스 경기장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다. 계단과 운동장 모두 매몰되었던 것을 2세기경에 그리스의 대부호였던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가 자비를 들여 발굴하고 재건축했다. 이때 관람석과 동쪽의 아치형 출입문도 설치되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조국 그리스의 찬란했던 고대 문화와 유적을 복원하는데 헌신적으로 공헌한 인물이다. 그는 거금이 드는 유적 복원 사업을 여러 곳에서 시행하여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되살려 놓았다. 그는 코린토스에 극장을 건립하고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아래에 음악당을 세우기도 했다.

◇ 델포이 성역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스타디온이다. ⓒ박경귀

◇ 스타디온 동쪽의 출입문이다. 아치형의 문이 있었다고 한다. ⓒ박경귀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은 현존하는 원형극장 가운데 최고의 걸작 중 하나다. 일부 시설이 개조되어 지금까지 오페라와 각종 음악 및 예술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신의 부를 스러져가던 조국 그리스의 문예 진흥에 아낌없이 쏟아 부을 수 있었던 그리스 문명에 대한 그의 자부와 사랑, 그리고 열정이 부럽다. 기업의 이미지 제고 차원에서 접근하는 측면이 강한 우리 대기업들의 빈약한 사회공헌 활동에 비하면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진정성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하늘아래 첫 원형극장, 환상의 예술 공연

아폴론 성역에 있는 원형극장에서도 피티아 제전이 열렸다. 주로 음악 경연이 여기에서 벌어졌던 것 같다. 이런 험하고 가파른 돌산에 최대 5000명이 입장할 수 있는 규모의 극장이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것도 경이롭다. 객석에 앉아 아래로 확 트인 파르나소스 산의 기슭과 프레이스토스강(江)이 흐르는 숲에 쌓인 협곡을 내려다보는 경치는 실로 장관이다. 이곳에서 벌어진 음악 경연에 못지않게 풍광에 먼저 도취하고 말 것 같다.

한번 상상해 보라. 극장 바로 아래엔 38개의 웅장한 도리아식 기둥이 받치고 있는 아름답고 거대한 아폴론 신전이 자리하고 있다. 또 성역의 입구에서부터 아폴론 신전에 이르는 '신성한 길'가엔 수많은 도시들의 보물 창고들이 들어서 있다. 연도에도 각종 기념비와 조형물들이 즐비했을 것이다. 이 모든 건축물과 봉헌물들이 어우러져 델포이 성역 전체를 성스럽고 신비로운 기운으로 가득 채웠을 것 같다.

◇ 아폴론 성역의 추정 복원 모형이다. 중앙의 가장 큰 건물이 아폴론 신전이다. 그 위로 원형극장이 보이고, 맨 아래쪽에서부터 아폴론 신전에 이르는 갈지자 모양의 길이 '신성한 길'이다. 이 길의 연도에 늘어선 건물들이 여러 나라에서 세운 보물창고들이다. ⓒ박경귀

저녁의 석양빛이 델포이 성역을 둘러싼 동쪽의 석회암 암벽을 물게 물들일 때면, 관객들의 예술적 감동과 정서적 감흥이 절정에 달했을 것 같다. 당시 이렇게 신성하고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예술 공연을 즐기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특별한 경험은 그리스 세계의 동질감과 정체성을 드높이는 계기를 만들었을 듯싶다.

섬세한 감성과 뜨거운 열정을 가진 예술가라면 이런 환상적인 무대에서 공연해 보고 싶은 욕망을 참기 어려울 것 같다. 그리스인들은 1930년에 이곳에서 '프로메테우스'를 공연했다고 한다. 당시 배우와 청중들이 누렸을 최고의 낭만적 분위기를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 음악 경연 등이 벌어졌던 원형극장이다. 객석의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박경귀

◇ 이 극장에서 1930년 프로메테우스가 공연되었다. 2500여 년 전 고대기의 공연 분위기를 얼마나 재현해 냈을지 궁금하다. ⓒ박경귀

◇ 한 여성 관광객이 원형극장의 오케스트라 영역(무대 부분)에서 춤사위를 펼쳐 보이고 있다. ⓒ박경귀

델포이가 질서와 정의의 수호신 테미스 시대에서 아폴론 시대로 바뀌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폴론은 광명과 예언, 의술의 신이자, 이성과 음악의 신, 가축과 궁술의 신이기도 했다. 테미스가 인간 사회의 근본이 될 질서를 닦았다면 아폴론은 문명을 더욱 풍요롭고 다채롭게 만드는데 기여했다. 델포이의 아폴론 숭배는 문명을 풍성하게 할 다채로운 기술을 전수해준 아폴론 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찬미다.

아폴론은 델포이에 자신만의 신탁소를 만들었다. 델포이 신탁이 최고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대지의 배꼽에 위치해 있다는 중심성 그 자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실질적으로 신탁의 예언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아폴론 신탁은 피티아(pythia)라는 여사제가 전했다.

그녀가 전하는 아폴론의 계시는 여느 신전의 신탁보다 특출하게 영험했다. 아폴론의 계시에 따라 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테네가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나 살라미스 해전 승리를 계기로 기사회생하게 되는 것도 한 예다. 델포이의 영험한 신탁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다음 호에는 신탁의 구체적인 사례와 피티아 신탁의 비밀에 대해 소개할 예정입니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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