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8) '동아시아 역사상의 한국' 토론회

박민관 | 한국연구재단 인문학대중화 사무국 팀장 2014. 7. 27.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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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은 역사공동체.. 작은 중국 아니다" "독자적 실체 증명 어렵다"

'동아시아 역사상의 한국'을 주제로 3주간 진행된 김한규 서강대 교수의 석학인문강좌를 마무리하는 토론이 지난 19일 서울 서초구민회관에서 진행됐다. 권만우 경성대 교수의 사회로 임지현(한양대)·이삼성(한림대) 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한 종합토론회에서는 동아시아 역사의 구조적 특성에 대한 깊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요동'의 개념, 역사공동체의 성격을 놓고 주제발표자와 토론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지난 19일 서울 서초구민회관 강당에서 열린 석학인문강좌에서 권만우 경성대 교수(사회), 김한규 서강대 교수, 이삼성 한림대 교수, 임지현 한양대 교수(왼쪽부터)가 '동아시아 역사상의 한국'을 주제로 토론을 하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 "역사공동체, 민족과 다른 뜻 역사적 체험·의식 공유 개념""만약 만주국이 남아 있다면 중국사라 주장할 수 있겠나"

임지현 한양대 교수 = 지금 동아시아에서 첨예하게 전개되는 역사논쟁은 동아시아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19세기 이래 근대적인 역사서술에서 다양하게 비슷한 현상들이 발견됩니다. 동유럽을 보면 큰 산맥이나 큰 강이 없이 전쟁이나 조약을 통해 경계가 끊임없이 변화했기 때문에 서로 자기네 땅이나 역사라고 주장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내셔널한 역사, 일국사의 틀에서 벗어나 트랜스내셔널한 역사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과 폴란드는 슐래지엔, 폴란드어로 쉴롱스크라고 하는 지역을 두고 1960년대까지도 서로 자기네 역사라고 싸웠는데, 지금은 게르만족과 슬라브인들이 같이 가꾸어온 역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김한규 선생님의 요동사를 접했을 때 가졌던 관점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만약에 만주국이 요동지역에 독립국가로 남아 있었다면'이라는 생각입니다. 만약에 만주국이 2차 대전 때 망하지 않고 존속하고 있었다면, 중국이 요동사를, 고구려사를, 발해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주장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태국의 역사학자 위니카출이 만들어낸 지리적 신체(geo-body)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민국가는 신성한 영토이고 수천년 동안 한번도 바뀌지 않고 이어져왔다는, 역사적으로 맞지 않는 믿음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데 누군가가 역사적 사실을 들어 다른 역사공동체의 영역이었다고 할 때, 사람들이 마치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절단된 것과 같은 아픔을 느끼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지요. 일종의 영토순결주의입니다. 예컨대 한사군의 영토가 지금의 대동강 유역이었다고 했을 때, 많은 분들이 굉장히 불쾌함을 느껴본 경험이 있으실 텐데요. 그런데 그건 우리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19~20세기 초 유럽역사를 보면, 모든 근대적인 역사서술은 이런 식입니다. 아마 우리가 역사를 보는 생각 속에도 알게 모르게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세 번째, 김한규 선생님은 고구려와 발해가 있던 요동지역을 하나의 독자적인 역사공동체로 보고 계신데요, 변경사라든가 트랜스내셔널 역사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유럽의 경우처럼 이런 문제를 이해할 때는 국사(내셔널 히스토리)가 아니라 변경사 혹은 오버래핑 히스토리, 선이 딱 그어진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지역의 역사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 요동, '부속' 개념 아닌 완결성 갖춘 존재

김한규 서강대 교수 = 광범위한 주제를 짧은 시간에 강연하다보니 오해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토론을 통해 보완하게 되어 참 다행입니다. 첫째, 역사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위해서는 역사적 가정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예로, 중국 학계에서는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을 기준으로 역사적 중국과 중국사의 범위를 규정하고 있는데, 만약 중국이 동북 3성을 상실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이 지역에 대한 역사까지 포기할 수 있는가 하는 가정을 해 볼 수도 있겠지요. 둘째, 영토의 순결성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 개념과 역사공동체 개념을 엄격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국가의 영토와 역사공동체의 공간적 범주는 일치되지 않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은 수다한 역사공동체들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는가 하면, 한국 같은 경우는 하나의 역사공동체가 두 개의 국가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런 상황은 굉장히 불안정합니다. 이러한 양자의 불일치에서 오는 불안정성이 항상 국제적인 영토분쟁을 낳고 역사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의 하나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요동을 변경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가라고 지적하셨는데, 사실 중국 사람들과 한국인들도 요동이 자기 나라의 변경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요동은 중국이나 한국에 부속되어 있던 변경의 개념이기보다는 그 자체가 독자적인 완결성을 갖는 역사공동체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네 번째로, 요동에 있었던 역사적 행위자들의 교류, 접촉, 융합 등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전적으로 찬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많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 고구려는 왜 거란과는 같은 공동체이면서 백제와는 아닌가

이삼성 교수 = 선생님이 제기하신 핵심 개념은 '역사공동체'와 '요동'입니다. 중국의 '변강(邊疆)'을 가리키는 것으로 세계학계에서는 오래전에 '내륙아시아' 개념이 정립되어 있습니다. 이는 몽골, 만주, 중국령 중앙아시아 및 티베트로 구성됩니다. 내륙아시아는 변강을 네 부분으로 나누면서도 그들 지역과 중국과의 관계 전체상을 개념화할 수 있습니다. 내륙아시아 세력들은 중국과 책봉조공을 매개로 위계적 평화를 수립하면서도 중국과 권력경쟁을 벌였습니다. 세력관계가 변하면 언제든지 주종이 전복되는 동적인 질서였지요. 반면에 통일신라 이후의 한국과 월남 등 중화권은 중국과 권력경쟁이 없이 위계적 평화관계로 일관하는 정적인 구조였습니다. 역사공동체론은 같은 지역을 다섯 개 역사공동체로 나누었으나 총괄하는 개념이 없습니다. 차이에 대한 심층분석은 가능하지만 총괄하는 개념화는 어렵습니다. 또한 내륙아시아론은 몽골과 만주를 분리해 이해하지만, 역사공동체론은 몽골까지도 요동에 포함시키고 있어 납득하기 쉽지 않습니다. 또 정치공동체, 경제공동체, 문화공동체와는 달리 역사공동체는 그 실체가 모호합니다. 예컨대 고구려는 어떤 역사경험과 어떤 역사의식을 얼마나 공유했기에 거란과는 동일한 '요동역사공동체' 소속이 되고, 백제와는 동일한 공동체 소속이 안되는 걸까요.

선생님은 '만주'는 일본이 1930년대 만주국을 세우며 내세운 개념으로 간주하고 대신 '요동'을 만주 전체를 가리키는 광역 개념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주'는 서양의 여러 지도에서 보이듯, 19세기에 이미 서양 열강과 러시아에 의해 지리적 개념으로 정착됩니다. 중국인들의 요동 개념은 혼란스럽지만, 전통시대 한국에서 요동은 한반도와 북중국 사이의 남만주 평원지대, 즉 박지원의 '요동벌' 개념으로 주로 쓰였습니다. 이 지역은 기후조건과 경제양식에서 북중국의 연장으로 간주됩니다. 진한제국 이래 한족이 대거 유입되고 그 문화양식이 많이 한족화됩니다. 그래서 요동벌은 특정한 '역사공동체'의 근거지라기보다는 북방민족들이 중국과 패권을 다투면서 중국적 정체성과 내륙아시아적 정체성이 충돌하는 곳이었습니다. '동쪽의 오르도스'였던 것이지요. '요동역사공동체'의 독자적 실체성을 증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김한규 교수 = 역사 이해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선생님도 아주 치열하게 이 문제에 접근을 하셨는데, 저하고는 거의 전 부문에 걸쳐서 생각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누구 말이 맞고 틀렸다기보다는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문제라고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첫째, '역사공동체'보다는 '내륙아시아' 개념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으냐고 하셨는데, 제 눈에는 일반성이나 공통성보다는 오히려 그 특수성과 차별성이 더 많이 보였습니다. 특히 티베트나 막북의 유목사회, 요동의 역사공동체들이 각각 다르게 보이는 차별성들이 훨씬 두드러져 보였기 때문에, 이렇게 나누어서 이해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둘째, 제가 사용한 '역사공동체'라는 말은 '민족'의 대체어가 아닙니다. '중국'과 '한국'이라는 말이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 분석해보니, 적어도 전통시대에는 '역사적인 체험이나 역사의식을 공유했던 특정한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민족을 대체할 수 있는 학술 용어라기보다는 설명어의 준말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셋째, 요동을 요동벌을 가리키는 말로 국한해서 쓰자고 제안하셨는데, 김육불의 < 동북통사 > 에서도 논급했듯이 실제로 '요동'은 광의의 뜻으로 사용되어 찬성하기 힘듭니다.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동호계나 예맥계, 숙신계 역사공동체들의 활동범위가 광의의 요동 범위와 일치된 까닭에, 이들 역사의 무대였다는 의미에서라도 광의의 요동 개념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주'란 말은 근현대에 와서야 사용된 말인 데 반해 '요동'은 선진시대부터 장기간, 광범하게 사용된 역사적 용어이기 때문에 '요동'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요동벌이 '작은 중국'이라고 불리는 특수성을 갖고 있었다고 강조하셨는데, 이 역시 찬동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전국시대 연나라, 진·한 시대 때 그곳에 요동군을 설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국 세력이 그 지역으로 거의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 지역에 중국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들어간 것은 근대에 와서입니다. 중국인들이 만주의 봉금 정책을 뚫고 들어간 뒤부터, 이 지역에서 중국인의 비율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문화적으로도 중국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지역을 '작은 중국'이라고 일컬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요동 사람들 고유의 활동 무대였다고 보는 게 정확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 석학인문강좌의 다음 강연은 8월2일부터 23일까지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의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가 이어집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문공감 홈페이지(http://inmunlove.nrf.re.kr)를 참고하거나 인문학대중화 사무국(02-739-1223)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주최 교육부 | 주관 한국연구재단 >

< 박민관 | 한국연구재단 인문학대중화 사무국 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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