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大局을 보라'는 日本에 答한다

이용식기자 2014. 7. 28.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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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식/논설실장

다시 8월이 온다.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이라는 한·일 관계를 생각하면 그 의미가 더 각별하다. 내년은 한·일 수교 50년, 광복 및 일제(日帝) 패망 70주년이 되는 해다. 앞으로 1년 동안 이를 기리는 많은 행사와 성찰이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장기적 한·일 관계의 기조가 정해지고, 올 8월은 그 출발점이다.

이웃 나라끼리 정상회담도 열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비정상이다. 다행히도 이를 타개하기 위한 공식·비공식 노력들이 진행중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원로 일본통' 유흥수 전 의원을 주일대사로 발탁한 것도 그 일환일 것이다. 일본에서 '최악의 시기에 최선의 대사' 얘기를 들은 이병기 전 주일대사가 국가정보원장에 기용됨으로써 대일(對日) 외교의 경직성을 보완할 수 있게 됐다. 일본 측은 한·일 정상회담 성사에 더 적극적이다. 그러나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다.

① 일본의 '혼네'

필자는 최근 도쿄를 방문, 일본 지도층의 '혼네(本音·속마음)'를 들을 기회를 가졌다. 아베 총리를 비롯, 96세의 최고 정치원로인 나카소네 야스히로, 현 부총리이자 재무상인 아소 다로, 민주당 소속 노다 요시히코 등 전직 총리 세 사람을 만났다. 연립여당인 공명당 대표, 여야 의원, 중견 언론인, 재계 요인, 전문가 그룹과도 솔직한 얘기를 나눴다. 직책, 정당, 세대에 따라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지만 관통하는 입장이 있었다. 한국은 눈앞의 현안에만 집착하지 말고, 대국(大局)을 보면서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선, 역사적으로 긴 안목을 강조했다. 전직 총리는 "1500년 이상의 긴 역사를 함께하고 있음을 잊고, 최근 100년만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다른 원로 정치인도 "과거 한국으로부터 문화적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 그럼에도 근세 들어 무례한 짓을 했음을 잊지 않고 있다"면서 "두 나라는 형제국"이라고 했다. 고위 인사는 "일본이 '평화국가'로서 걸어온 70년의 역사를 보면서 일·한·중 3국이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시장을 상대로 양국 기업이 협력할 분야가 많다고 했다. 한 경제인은 "두 나라의 여러 기업이 어깨동무하고 제3국으로 공동 진출하려 하고 있고, 분위기도 좋다"고 했고, 다른 경제인은 미얀마에서의 구체적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지정학적으로 동병상련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한 인사는 "한국은 미·일·중 사이에 끼어 있다고 하는데, 사실은 미·중 사이에 한·일이 끼어 있는 것"이라며 공동 대응의 필요성을 밝혔다. 더 근본적으로는 두 나라가 자유시장과 민주주의, 인권과 법치라는 대의(大義)를 함께하는 나라임을 내세웠다. 한국은 중국보다 일본과 가까워야 한다는 주문이다.

② 무신불립(無信不立)

'대국'도 중요하지만 '디테일'도 중요하다. 상호 불신이 심각한 경우엔 더욱 그렇다. 바둑에서 대국을 염두에 둔 포석이 중요하지만, 한 수만 삐끗해도 낭패를 당한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수순도 중요한 것이다.

각론에 들어가면 일본은 한국에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한 자민당 의원은 "얼마나 더 사과하면 되느냐 하는 스트레스가 반한(反韓)의 뿌리"라고 했다. 한국에 우호적인 공명당 의원도 최근 헌법재판소의 '위안부 협상 관련 결정'을 거론하며 "1965년 한일협정 자체를 흔들려는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한국 경제발전 이면에는 일본의 '관대한' 기술·자본 제공이 있었는데,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식의 보도까지 나오고 있다.

관계 악화 원인에 대해서도 일본 측은 한국 헌재의 위안부 관련 결정, 이명박-노다 교토 정상회담에서의 '소녀상' 언쟁, 대법원의 징용 관련 판결,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및 일왕 사죄 발언, 여기에다 박근혜 대통령의 친중반일(親中反日) 경향 탓으로 돌린다.

한국 입장에선 그 이상으로 할 말이 많지만 말꼬리 잡기식으로 따질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일본이 한사코 외면하는 문제들은 지적하고 싶다. 패전국 일본의 조속한 재기는 6·25전쟁 덕분에 가능했다. 한국의 조선·자동차·반도체 산업은 되레 일본의 견제 속에서 성장했다. 일본은 대일 청구권 자금 5억 달러를 강조하지만, 한국으로부터 매년 수백억 달러의 무역 흑자를 내고 있다.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는 당시 한국 내 일본 자금 150억 달러를 회수해 간 것이 결정타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국회 청문회에 보낸 답변서 내용이다. 이번 도쿄 방문 기간에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정치인에게 물었더니 "당시 한국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며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했다.

이런 문제들은 닭과 계란의 선후(先後)처럼 얽혀 있어 딱 부러지게 결론 내기가 쉽지 않다. 꼭 그럴 필요도 없다. 서로의 입장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 된다. 문제는 '진정성'이다. 일본 지도자들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군국주의 미화, 고노담화 검증, 평화헌법 수정, 집단적 자위권 추구 등으로 주변국을 자극하면서 '대국을 보자'고 하면 설득력이 없다. 역사적 피해자에겐 최소한 위선으로, 심하면 '재침 야욕'으로까지 비친다.

③ 박정희·김대중 결단의 교훈

한·일 관계에서 국가적·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대국적 결단을 내린 지도자는 박정희·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6·3사태 등에도 불구하고 1965년 6월 한·일 회담을 타결지은 뒤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못한다면 제2의 을사조약이 된다"고 걱정했었다. 정권과 나라를 걸고 감행한 셈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때일수록 정상 간 대화가 필요하다는 아베 총리의 주장에도, 정상회담 해서 잘못되면 하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는 박 대통령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해결의 열쇠는 아베 총리가 가지고 있다.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만 결단하면 된다. 독일처럼 무릎 꿇고 사죄하거나 무한 배상하라는 요구도 아니다. 역사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실천하면 된다. '적극적 평화주의'를 외치는 만큼 '적극적 역사주의'에도 관심을 갖는 것이 일본을 보통국가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이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대국을 보자는 식은 사상누각을 세우자는 말과 다름없다.

동북아는 '21세기 화약고'로 불릴 정도로 구조적 갈등기에 접어들고 있다. 일본의 역사인식 퇴행은 인화성이 매우 높은 기폭제다. 일본의 국내 사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베 총리가 박정희·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이를 극복하면서 일본을 올바른 길로 이끈다면 현재의 한·일 관계는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대국을 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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