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에서 중국, 다시 한국으로 넘어온 식해의 기원

입력 2014. 8. 21. 09:01 수정 2014. 8. 2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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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송 때 유명한 시인인 소동파(蘇東坡)는 필화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다. 소동파는 옥에 면회를 온 아들에게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식해를 들여보내 이를 알려달라고 당부를 했는데, 소동파의 아들이 옥바라지할 돈을 구하러 간 사이에 이를 알지 못했던 친척이 대신 옥바라지를 하다가 소동파의 옥에 식해를 넣어주는 일이 발생한다. 소동파는 식해를 아들이 보내는 죽음의 신호라 착각하고 비통한 마음을 담아 시를 한 편 지은 뒤 왕에게 바친다. 이를 본 왕은 시에 감동해 소동파를 죽이지 않고 좌천시키는 데 그쳤다. 잘못 전달된 식해 한 단지가 소동파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소동파의 목숨을 구한 식해는 곡식의 식(食)자와 어육으로 담근 젓갈 해(醢)자를 합친 말로 중국, 한국, 일본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음식이다. 식해는 동남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타이, 미얀마, 라오스의 강에서는 생선이 많이 잡히지만 바다와 멀어 소금이 귀했기 때문에 염장보관 할 수 없었고 우기가 길어 생선을 말릴 수도 없었다. 때문에 소금을 조금 넣고 비교적 흔했던 쌀을 넣어 숙성시키는 형태의 생선 보관법이 발달했다. 소금과 곡식을 함께 넣고 숙성시키면 곡식의 전분이 분해되면서 유산이 생기는데, 이 유산이 생선의 부패를 막아주고 독특한 맛이 들게끔 하는 것이다.

동남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식해는 2세기 초엽의 중국문헌에 처음 문서로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조선 중엽부터인데, 이보다는 더 이전부터 식해를 먹어왔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국내에서 식해를 담가 먹는 지역은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등으로 모두 동해안에 위치해 있다.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로 인한 염전이 발달해 해산물을 주로 염전에서 나는 소금을 활용해 염장보관 할 수 있었지만 동해안은 소금이 귀했기 때문에 소금과 곡식을 섞은 저장법인 식해가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지역에 따라 사용하던 생선은 조금씩 달랐는데, 주로 명태, 가자미, 도루묵 등이 사용됐다. 황해도의 연안에서는 대합을 사용에 식해를 만들기도 했다.

지방마다 차이가 있지만 식해를 만드는 방법은 밥을 지어 고춧가루로 버무리고 여기에 손질한 뒤 소금에 절인 생선과 절인 무, 파, 마늘, 생강 등의 향신료와 엿기름 물을 넣고 버무려 항아리에 숙성시키는 것이다.

'식해'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식혜'는 식해가 변형된 음식이라고 보기도 한다. 식해가 생선, 곡물, 소금, 향신료(고춧가루)의 조합에서 생선, 곡물, 엿기름, 향신료로, 다시 곡물, 엿기름의 조합으로 분화됐다는 것이다. 이런 변천 과정에 있는 음식이 안동식혜다. 안동식혜는 식해의 조리법에서 생선이 빠졌을 뿐 기본적으로 사용되던 생강이나 무, 고춧가루 등이 사용되고 숙성시켜 먹는다는 점도 같다.

조선닷컴 라이프미디어팀 정재균 PD jeongsan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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