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33명이 비운의 애국시인 윤동주의 고향 연변을 찾아가다

2014. 9. 16.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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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왕 용 시인(부산대학교 명예교수)

필자(사진)가 지난 8월 14일부터 19일까지 5박6일 동안 한국문인협회(이사장 정종명, 소설가)가 추진한 백두산 및 동북 3성의 우리 역사문화탐방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윤동주 시인 유적지와 안중근 의사 유적지, 그리고 백두산 천지. 국내성 고구려 유적지 등을 다녀왔다.

비운의 애국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유적을 찾아 용정과 명동촌을 방문한 일정은 8월 16일로 아침 일찍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접경도시 도문에서 두만강 유람선을 타고 북한땅을 가까이 접근해 본 후 용정으로 이동했다. 용정중학교라고도 불리는 대성중학교에 마련된 윤동주 기념관에 들려 안내원으로부터 설명도 듣고 책과 기념품도 사고 성금함에 장학금을 기부했다. 기념관에는 윤동주 자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의 중요 인물들이 다 소개되어 있었다. 특히 윤동주의 고종사촌으로 복강형무소에서 함께 죽은 송몽규의 자료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기념관 옆에 헤이그 밀사로 알려진 이상설 열사 기념관이 크게 지어져 있었다. 이러한 유적들로 보아 일제강점기 용정이 독립운동(獨立運動)의 구심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성중학교 기념관 앞의 '서시' 시비 앞에서 단체사진과 기념사진을 찍은 후 윤동주의 출생지 명동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명동촌은 용정서 12킬로 정도 떨어져 있었으나 차로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1차선 시멘트 포장길을 달려가다가 윤동주 생가 입구에서 버스에서 내렸다. 자칫하면 지나칠 뻔한 한적한 농촌마을이었으며, 생가에 대형버스가 접근할 수 없었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 생가가 나타났다. 이미 사진으로 여러 번 보았기에 곧 알 수 있었다. 우리의 방문을 알고 관리하는 분이 나와 안내를 시작하였다.

윤동주의 출생지 생가가 있는 명동촌은 송우혜의 '윤동주평전'(2004, 푸른역사)에서 '지사들의 마을 명동'이라는 부분으로 70여 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소개되어 있지만 안내원 역시 비교적 정확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1899년 두만강변 도시 함경도 종성에 거주하던 남평 문씨 가문과 윤동주의 외삼촌인 김약연 전주 김씨 가문, 김약연의 스승 남도천 학자의 가문 등 세 가문과 회령 출신인 김하규 김해 김씨 가문 등, 도합 네 가문이 대소가 스물두 집의 141명의 대이민단을 이끌고 청국의 대지주로부터 땅을 사들여 정착한 일종의 계획도시였다. 그들은 돈을 낸 비율로 땅을 분배하고 학전(교육전)이라는 명목으로 따로 내어놓아 그 소출을 기반으로 세 군데 서재를 세웠다.

윤동주의 가문은 이들보다 먼저 1886년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1844∼1906)이 42세의 나이로 아내와 4남 1녀를 이끌고 고향땅인 함경도 종성 맞은편 자동으로 이주하여 부지런히 농토를 일구어 부농이 되었다. 그러다가 명동촌이 이루어진 이듬해인 1900년 이들 네 가문과 합류한 것이다. 말하자면 앞의 네 가문에 윤동주 가문이 합류하여 명동촌을 일구었던 것이다. 1906년 용정에서 서전서숙을 세운 이상설 열사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어 그 후유증으로 서전서숙이 1907년 문을 닫자 명동 사람들이 세 서재를 통합하여 명동서숙, 즉 명동학교를 1908년에 세웠다. 그리고 이곳이 이 일대의 독립운동과 개화운동(開化運動)의 거점이 되었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다섯 가문을 포함한 명동촌의 마을들은 도합 3천 가구가 넘도록 번성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윤동주는 이곳에서 1917년 12월 30일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25년 명동학교에 입학했다. 명동학교는 애초에 중학부도 있었으나 삼일운동의 후유증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윤동주가 입학할 당시에는 소학교만 있었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명동학교가 정부의 인가를 받지 못하여 윤동주는 명동에서 동쪽으로 10리쯤 떨어진 화룡현 현청 소재지 대립자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였다. 이 학교는 중국인 학교였다. 1932년에는 대립자소학교를 졸업하고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때에 윤동주의 교육을 위하여 윤동주 일가는 농토는 소작인에게 맡기고 명동을 떠나 용정으로 이사를 했다. 따라서 명동은 1917년부터 1932년까지 윤동주가 머문 고향이다. 윤동주는 명동과 용정의 민족적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부터 비록 외유내강의 내성적 성격이지만 애국심(愛國心)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윤동주 외할아버지 김약연은 이상설의 뒤를 이어 용정과 명동의 애국지사의 대표자였다. 그는 명동학교의 교장으로 동만(東滿)의 대통령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우리 일행이 가서 본 명동촌은 안내자가 소개한 번성의 흔적은 없어지고 한적한 농촌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사진으로 본 명동학교의 우람한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명동교회는 100년이 훨씬 넘는 원형을 가진 명동촌의 유일한 건물로 보수되어 김약연, 윤동주를 비롯한 명동출신 애국지사들의 생애를 전시한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옆에 있는 윤동주 생가는 필자가 보기는 원래의 모습과 위치가 아닌 것 같았다. 윤동주의 생애에 관련된 사진에 나오는 1945년 3월의 장례식이 거행된 곳은 여기가 아니라 1932년 윤동주가 용정의 은진중학교로 진학하면서 옮겨간 용정의 집이라 그것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으나 시인이자 부산대와 성균관대 공과대학 색채학 교수를 지낸 윤일주 교수(1927∼1985)의 회고('나라사랑' 23집, P.152,1976년)와 윤동주보다 한살 아래이나 명동소학교 동기생인 외사촌 김정우 시인의 회고('나라사랑' 23집, p.118∼119)에 의하면 그렇게 교회와 가깝게 붙어 있지는 않았던 것 같고 규모도 축소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교회 건너편에 교회당과 비슷한 규모의 나지막한 기와집을 지어 윤동주전람관을 꾸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엄격한 의미에서 용정의 대성학교 전시관이나 명동촌의 교회 전시관은 윤동주 시인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나 개인 전시관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 전시관이 간도의 유일한 윤동주전시관이 될 것 같았다. 윤동주관람관은 이미 지어졌지만 그 전시내용을 내실화하기 위하여 국내에 조직되어 있는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가 나서야 할 것 같았다. 정부 차원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한국의 중요 기업체 중 하나가 나서서 비록 옛날의 영광을 재현하지는 못하겠지만 명동촌의 규모와 도시개척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기념관도 짓고, 다섯 가문을 중심한 명동촌의 번성과정과 나라사랑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점에 대한 통합적이고 학제적 연구재단도 발족시켜야 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냥 두면 윤동주 시인도 중국 소수민족 시인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본 포럼(상임의장 최진호, 한림원 종신회원)은 한국문인협회의 문인 33명이 백두산 및 동북 3성의 옛 고구려 역사문화탐방의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면서 이번 행사에 초청연사로 참가한 양왕용 시인(부산대 명예교수)의 "윤동주의 신앙 형성과 시인의 길"이라는 문학특강과 윤동주의 생가 방문을 통해 윤동주 시인의 나라사랑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끝)

출처 : 문학과학통섭포럼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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