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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한국인의 '시간 빈곤'] 나·가정 돌볼 시간 부족이 '더 가난한 삶' 부른다

조민영 기자 입력 2014. 11. 05. 03:49 수정 2014. 11. 05.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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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하는데 왜 형편 안 나아지나

33세 김혜정(가명)씨는 결혼 3년차에 18개월 아들을 둔 맞벌이 '워킹맘'이다. 비교적 제도가 잘 갖춰진 대기업에 다니고 있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1년을 다 쓰고 복직해 회사를 다니고 있다. 오전 7시 집에서 나와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보통 저녁 7시 반에서 8시쯤 된다. 그나마 퇴근시간이 규칙적이어서 월 150만원에 출퇴근 아주머니를 고용해 아이를 맡기고 있다. 밖에서 하루를 보내고 회사에서 돌아오면 아주머니는 퇴근한다. 아이를 씻기고 재우고, 집안정리 등 마무리를 하는 것은 김씨 몫이다. 최소 3시간은 필요하다. 야근이 잦아 200만원 육박하는 비용을 내고 입주 아주머니를 쓰는 친구들을 보면 그래도 '나는 나은 편'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꾸역꾸역 용쓰며 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남편과 함께 열심히 살아왔지만 결혼 초 전세를 얻으며 받은 마이너스통장 대출액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열심히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팍팍한 삶의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누구나 겪지만 무시해 온 '시간 부족'…'시간 빈곤'을 초래하다

2014년 대한민국에서 김씨의 이야기는 결코 특별하지 않다. 일을 가진 사람이라면, 게다가 아이까지 둔 여성이라면 더욱이 심각하게 겪는 일상이다. 너무 바빠 '나'는커녕 내 아이와 가정도 돌볼 겨를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시대다. 그런데 '삶의 질'을 포기한 대가로 딱히 돈이 모이는 것도 아니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들었던 이야기 '시간은 돈'이라는 가치가 감안되지 않아서다.

4일 한국고용정보원 권태희 박사가 미국 레비(Levy)경제연구소와 공동 연구해 발간한 '소득과 시간빈곤 계층을 위한 고용복지정책 수립 방안' 논문을 보면 이 문제가 명확해진다. 연구팀은 논문에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 보장되지 않아 시간 부족이 발생하는 것을 '시간 빈곤'으로 정의했다.

통계청의 2009년 한국인 시간사용 조사에 따르면 18∼70세 개인이 평균 1주일에 자신을 돌보는 데 필요한 '개인돌봄시간'은 최소 76시간이 필요하다. 잠자고, 씻고, 먹고, 최소한의 휴식 등을 취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다. 여기에 주말 여가 등 개인이 쓰는 필수 레저시간은 평균 주당 14시간으로 조사됐다.

한국인 평균 1주일 총 168시간에서 이 두 가지 필수시간을 빼고 남는 시간은 78시간이 된다. 하루 12시간을 근무하는 사람도 주 5일 기준으로 60시간을 일하는 것이니 시간이 남을 법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된 부분이 있다. 바로 한 가구가 유지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여성의 평균 가계생산시간은 23.74시간으로 조사돼 있다. 아이 등을 고려하지 않은 전체 평균이기 때문에 아이가 있는 경우 이 시간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

평균 시간을 적용해도 일하는 여성이 근로할 수 있는 가용 시간은 54.26시간에 불과해진다. 김씨의 사례로 돌아가보자. 통근시간을 포함해 하루 13시간을 근무하는 김씨는 주당 근무시간이 이미 60시간을 넘어선다. 최소 6∼7시간은 부족한 것이다. 김씨의 경우 아주머니를 '돈'을 주고 구매해 이 부족을 충당하고 있다.

여성 근로자, 맞벌이 가정, 저소득층 등 '시간 빈곤' 위험 높아

김씨의 경우에서 나타나듯 여성이 시간 빈곤 상황에 처할 가능성은 남성보다 훨씬 높다. 연구팀에 따르면 주당 근로시간이 36∼50시간 수준인 상용직 근로자의 경우 여성의 시간부족률은 70%로 남성 36%의 2배에 달했다.

현재 정부가 여성 고용률을 높이기 위해 확대하고 있는 시간제 근로에서도 여성의 시간 부족은 높게 나타났다. 35시간 미만 근무를 하는 여성의 25%가 시간 부족을 겪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소득이 낮아질수록 시간 부족이 심해진다는 데 있다. 저소득층은 생계유지를 위해 여성도 노동시장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 혼자 버는 가구의 비중도 소득이 낮을수록 높아진다. 그런데 이들은 김씨처럼 자신의 부족한 시간을 메워줄 '대타'를 구할 능력이 안 되거나 어쩔 수 없이 구할 경우 소득의 상당 부분을 여기에 쓰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소득 빈곤과 시간 빈곤을 동시에 겪고, 소득 빈곤이 더 심화되는 상황에 내몰린다.

연구팀이 시간 부족을 고려해 소득 부족액을 계산한 LIMTIP 모형을 적용해본 결과 소득 빈곤층(최저생계비 수급 가구)은 80%가 시간 빈곤을 겪고 있었으며, 이들이 실제 부족한 소득액도 공식 통계에서 나타나는 금액보다 크게 높아졌다. 이들 중 부부가 모두 일하는 맞벌이 가정은 시간 빈곤율이 88%에 달했다.

가사 노동 시간·비용 고려한 고용·임금 정책 필요성 높아져

그러나 여성 고용률을 높이기 위한 고용·보육 정책이나 저소득층의 생계지원금 책정 등에서 시간 부족은 아직까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시간 부족 개념을 연구한 것 자체가 국내에선 이번이 처음이다.

권 박사는 "연구 결과에 따르면 비정규직 근로자, 맞벌이 등은 빈곤 함정에 빠져 있지만 사회적 지원 없이 바깥 언저리에 있는 계층이 많다는 것이 드러난다"면서 "특히 여성 취업자가 소득 빈곤인 경우 시간 빈곤의 위험도가 더 높아진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실질적인 여성 고용률을 높이려면 가사노동에 따른 비용을 실질적으로 계산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의 공식 가계생산 통계에 보조지표로 성별을 반영하는 '가계 위성 지표'를 마련하자는 논의에도 힘이 붙을 전망이다.

조민영 기자 my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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