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인사이드] 대선 때마다 존재했던 '제3 후보'..매번 들러리

2014. 11. 7.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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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깨끗 이미지로 선거 초반 돌풍
조직력에 한계.. 당선자 한 명도 없어

역대 대선에서 여야 1, 2당의 선수가 아닌 '제3의 후보'는 매번 존재했다. 그러나 당선자는 한 명도 없다. 국민의 정치 불신을 등에 업고 대선 열기를 끌어올렸지만 결국은 들러리에 그친 셈이다. 의도치 않게 '킹메이커' 역할을 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제3의 후보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정 회장은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경제대통령', '통일대통령'을 외치며 대선에 출마했다. 현대건설 설립자인 정 회장의 '반값 아파트' 공약은 서민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경제와 정치권력을 다 잡으려 한다'는 비판과 반기업정서의 역풍을 불러 3위로 낙선했다.

제15대 대선에선 박찬종 후보가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에 힘입어 각종 지지도 조사에서 부동의 1위로 앞서 나갔다. 박 변호사는 1997년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에 들어갔다. 그는 당내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조직력 미비 등으로 승리가 불투명해지자 폐쇄적인 경선규칙과 이회창 후보의 돈 선거를 주장하며 경선 마지막 날 후보에서 사퇴했다. 결과적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선 승리에 기여를 한 셈이다.

2002 한·일월드컵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던 제16대 대선에서는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으로 월드컵 유치에 성공한 정몽준 전 의원이 급부상했다. 당시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당내 호불호가 갈리면서 정 전 의원으로의 후보 단일화 요구가 거세게 일어나며 대선 구도가 출렁거렸다. 그러나 단일화 방법 등으로 진통을 겪는 과정에서 정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해 노 후보로의 단일화가 이뤄졌다. 이후 정 전 후보가 대선 전날 지지철회를 선언하면서 오히려 노 전 대통령의 승리를 이끌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제17대 대선에서는 고건 전 국무총리와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가 떠올랐다. 고 전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소추안 의결로 직무가 정지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의 역할을 무난하게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총리와 서울시장을 각각 두 차례씩 지내며 '행정의 달인'이란 수식어를 얻은 고 전 총리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유력 후보로 꼽혔으나 선거를 11개월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하며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유한킴벌리 대표이사를 지낸 문 후보는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와 대립각을 세우며 차별화를 시도했다. 정 후보의 단일화 제안에 "실정한 사람들과 단일화를 할 수 없다. 사과하고 후보를 사퇴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환경운동단체 등 시민사회단체가 적극 지지했으나 대선 결과는 4등이었다.

18대 대선을 한 달여 앞둔 2012년 11월 6일 야권 후보단일화 논의에 나선 민주통합당 문재인(오른쪽 두 번째), 무소속 안철수 대선후보가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안 후보는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 진통을 겪은 뒤 후보직을 사퇴했다.세계일보 자료사진

제18대 대선에서는 '안철수 신드롬'이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이번 '반기문 대망론'과 마찬가지로 높은 여론조사 지지율이 원동력이 됐다. 언론은 '가상대결'을 통해 당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차기 대선 주자로 기정사실화했다. 실제 그는 한때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여론조사에서 압도했다. 안 후보는 대선을 석 달 앞둔 2012년 9월 출마 선언을 했지만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진통을 겪다 11월23일 후보직에서 사퇴했다. 그는 문 후보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박영준 기자 yj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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