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영 기자의 一日一識] <40> 허주(虛舟) 김윤환 11주기에 부쳐

입력 2014. 12. 15. 10:05 수정 2014. 12. 1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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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중재자'였던 그의 삶을 기리며

기자는 허주 김윤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언론계 선배이며, 문학을 좋아한 분이었다는 점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빈 배'라는 그의 호가 뜻하듯 김윤환 전 신한국당 고문이 지향하던 정치는 물 흐르듯 타협하는 모습을 표방했습니다. 드라마 미생에 나온 대사처럼 '애는 쓰는데 자연스럽고 열정적인데 무리가 없는' 사람 그 자체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정당과 파벌을 뛰어넘는 그의 외교적 역량은 서로 이해관계와 지분은 공유하지만 가치와 철학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예술의 경지였다고 사람들은 회고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허주는 '양지'만을 지향하는 사람이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민주화가 시대의 과제였던 시절, 그는 독재정부라고 비판 받는 여당 측에 서서 살았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철저히 주류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해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어릴 적 친구이자 유력 언론인이라는 이유로 젊은 나이에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노태우 정권을 출범시킨 주역이자 김영삼, 김종필, 그리고 노 대통령 3자 간의 합당을 이뤄내 사실상 여당의 역사를 연장시킨 사람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은 허주가 군사 정권 세력의 생명을 민주화 이후로까지 확장시키는 데 성공한 주범이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기자는 자신이 소속한 집단의 힘이 쇠퇴하지 않게끔 노력하는 그의 모습에서 '마키아벨리'가 떠올랐습니다. 일찍이 마키아벨리는 지도자에게 사자와 같은 공포와 여우와 같은 교활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도는 덜할 지 몰라도 허주의 정치 인생은 마키아벨리의 그것과 매우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정치 역정은 97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대선 실패와 2000년 공천 탈락, 그리고 탈당 후 민국당 창당이라는 길을 걸으면서 초라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유력 정치가들 사이의 대타협과 지분 공유, 그리고 그럴듯한 구도 창출이라는 구시대의 정치 공학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정치는 허주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대와 크게 달라졌습니다. 다양한 사람의 감성적 지지와 코드가 중요한 경쟁력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가 지향했던 정치적 기술 자체가 미학적 경지에 이르렀을지는 모르겠으나, 대중들을 감동시키는 방법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내용적 고민 없이는 그 능력을 펼치기도 전에 거부당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허주의 마키아벨리즘은 현실의 정치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치 무대에서 생산자 위주의 전략을 발휘하다 보니, 소비자인 국민들을 어떤 방식으로 지혜롭게 껴안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소 고민이 부족했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날의 정치를 보고 있노라니 작고한 허주 김윤환 선생의 덕목이 더욱 더 절실해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의 인물로만 보이던 그가 지금 있었더라면 모든 것이 아수라장인 지금 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자연스러움과 매끄러움을 지향하는 그의 처신이 다른 국면을 제시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 박근혜 대통령 주변의 비선그룹 논란은 최 경위가 숨진 채 발견되면서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수사결과야 곧 나오겠지만, 이 사건이 이후의 정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정리해 주는 정치인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은 상당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허주는 이처럼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들이 어떤 방식으로 균일점을 찾아갈 지 치열하게 고민한 정치가였습니다. 그리고 그 통로가 바로 네트워크라는 점을 잘 깨닫고 있는 사람이었죠. 미디어가 정치인에 대한 선호를 결정하는 시대에 저마다 '배우'가 되려는 정치인은 있지만 촬영, 제작, 감독과 같은 스태프 노릇을 하려는 정치인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무대를 큰 시야에서 연출할 줄 알았던 허주 같은 인물의 혜안과 능력이 못내 아쉽습니다. 정치는 힘을 토대로 자원을 배분하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그 힘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결과가 무엇인지 깨닫지 않은 채 권한을 사용한다면 폭력을 휘두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김윤환 전 신한국당 고문의 11주기입니다. 그의 타협과 조화에 의한 정치를 기억하며,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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