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무척 '뇌가 청순한' 사람들을 보았다

신윤영 입력 2014.12.17. 10:27 수정 2014.12.17.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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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병인지 그냥 태생이 까칠한 탓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표현'에 민감한 편이다. SNS에서 낯선 사람으로부터 밑도 끝도 없는 욕설 댓글을 받으면, 그 저열한 내용보다 엉망진창인 맞춤법('그럼 너는 남한보다 북한이 낳냐?' 따위)이 신경 쓰여서 괴로워하곤 한다.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출연자가 '제가 아시는 분이' 같은 이상한 존댓말을 쓰면 '으으…' 하며 편두통 환자처럼 신음한다. 하지만 요 몇 년 사이 가장 거슬리는 표현은 이것이다. '당신은 동성애에 찬성합니까?'

성 정체성은 찬성과 반대의 대상이 아니다. 그야말로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게 '당신이 이성애자 여성인 것을 찬성할 수 없다'라고 진지하게 말한다면,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페이스북에다 '오늘 뇌가 무척 청순한 사람을 만났다'로 시작하는 글을 쓸 거다. SNS에서는 남의 뒷담화를 안 한다는 게 원칙이지만 이런 웃기는 얘기를 어떻게 안 쓰고 그냥 넘기겠나! 오지랖 넓게 남의 성 정체성에 격렬히 반대하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사람들이 몇 년째 꾸준히 나를 웃기고 있다. 정말 웃기고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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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얼마 전 조금도 웃기지 않는 일이 있었다. 서울시민 인권헌장이 폐기될 위기에 놓였다. 이 인권헌장은 성비와 연령 등을 안배해 선발한 총 180명의 시민위원과 전문위원이 6회에 걸친 난상토론 끝에 도출해낸 '시민의 의사'다. 시민위원회는 45개 조항에 만장일치로 합의했고, 단 5개 조문에 대해서만 일부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단한 성과다. 하지만 서울시는 '합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위원회가 의결한 인권헌장을 선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서울시민 인권헌장의 제4조는 다음과 같다. '서울시민은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 지역,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용모 등 신체 조건, 혼인 여부, 임신·출산, 가족 형태·상황, 인종, 피부색, 양심과 사상,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 학력, 병력 등 헌법과 법률이 금지하는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이것은 일부 보수 기독교 단체들이 '동성애를 조장한다'며 반대한 조항 중 하나이기도 하다. '동성애를 조장한다'라…. 맞춤법은 맞지만 틀린 표현이다. 성 정체성은 남이 권한다고 휙휙 바꿀 수 있는 게 아닐뿐더러, 종류가 무엇이든 '사랑'이 누가 조장한다고 널리 퍼지는 것이었다면 존 레넌이 '이매진(Imagine)' 같은 노래를 굳이 만들 필요도 없었을 거다. 하지만 정말 심각하게 이상한 표현은 '합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서울시의 해명이었다.

무슨 권리로 한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를 반대하나

인권은 합의의 대상이 아니다. 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인정되는 보편적인 권리'다. 그리고 이 인권에 반하는 차별은 선택이나 의견의 차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범죄다. 대체 무슨 권리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권리를 부정하고 반대한단 말인가. 서울시의 해명처럼 '사회적 갈등과 논란이 야기'되고 '합의가 되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보류해야 하는 게 인권이라면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아직도 목화밭에서 채찍으로 맞아가며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 여자들에게는 여전히 투표권이 없을 것이다. 기존 편견과 불합리를 깨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진통이 수반된다.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위해 모인 시민위원들은 그 진통을 얼마나 성숙하게 치러낼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서울시와 박원순 시장은 앞으로 이 사회가 치러야 할 진통이 꽤 만만치 않을 것임을 실감했을 것이다.

요즘 인권헌장을 둘러싸고 '옳은 것이라곤 문법뿐'인 이상한 표현이 난무한다. 뉴스를 보면서 한숨 쉬는 일이 많아졌다.

신윤영 (<젠틀맨> 피처디렉터)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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