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홍역 확산은 엄마들 때문?

입력 2015. 2. 23. 10:10 수정 2015. 2. 2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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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때아닌 홍역·때아닌 백신 논란

2000년, 미국은 홍역의 종말을 선언했다. 1963년 백신이 개발되기 전까지 미국에서 해마다 300만~400만명을 감염시켜 그중 400~500명의 목숨을 앗아가던 이 전염병이 퇴치됐다는 소식은 낭보였다. 미국은 더이상 홍역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홍역은 제3세계 가난한 나라만의 질병인 양 미국인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났다.

15년 전 '퇴치선고' 받았던 홍역필리핀 다녀온 여행자가 들여와디즈니랜드 중심으로 전국으로그 배경에는 엄마들 백신기피증"백신 맞으면 자폐증 걸린다"불확실한 논문에 괴담까지 가세부자일수록 주사 안 맞히는 흐름접종률 뚝 떨어지며 엉뚱한 희생면역 없는 신생아·소아암환자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위험 노출

#지난 10일 7살짜리 소년이 자신이 다니는 초등학교 교육구 관계자들 앞에 섰다. "3년 반 동안 나는 나쁜 병균을 쫓아내기 위해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암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어요." 연설을 하기 위해 의자 위에 올라선 소년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소년은 "나처럼 항암치료를 받지 않는 이상 모두가 백신을 맞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며 그것이 실현될 때 "우리는 곧 홍역도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소년은 덧붙였다. "내 이름은 레트입니다. 그리고 내겐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3년 반에 걸친 화학요법 치료를 견딘 소년은 1년여 전에 백혈병 완치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오랜 항암치료로 홍역 등 다른 질병에 대한 면역체계는 무너졌다. 그는 아직 백신을 접종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이 회복되지는 못한 상태다. 소년과 그의 가족들이 교육 관계자들에게 '개인적 소신에 의한 접종 면제권'을 박탈하고 의무적으로 예방접종을 받도록 강제하는 새 법안에 대한 지지를 구하는 까닭이다. 레트는 전체 유치원생의 84%만 예방접종을 받은 캘리포니아주 북부의 마린 카운티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캘리포니아는 소신에 의해 예방접종을 하지 않아도 되는 20개 주 가운데 한곳이다.

미국의 새해는 홍역 집단감염과 확산 소식으로 떠들썩하게 시작했다. 한달 새 100여명의 발병자가 보고됐다. 진원지는 '어린이들의 천국'으로 불리는 캘리포니아 놀이공원 디즈니랜드였다. 이곳에서 첫 홍역 감염 사례가 발견된 지 두달이 채 안 된 15일 현재 미국 17개 주에서 120명 이상이 홍역에 감염됐다고 미 보건당국은 집계했다.

'국가 공인 퇴치 선고'를 받았던 이 바이러스는 어떻게 다시 미국인들의 삶 한복판으로 귀환했을까?

실마리는 지금 미국을 달구고 있는 논쟁에서 찾을 수 있다. 예방접종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필수적인 의무인가, 아니면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인가? 홍역 백신을 포함해 특정 백신을 맞으면 아이가 자폐증에 걸릴 수 있다고 믿는 부모들의 예방접종 거부 움직임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생후 4개월 된 모비어스 루프는 홍역 백신을 맞기에는 너무 어리다. 그렇다고 홍역이 그를 피해가지는 않았다.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 사는 크리스토퍼와 에어리얼 루프 부부의 악몽은 지난 1월31일 시작됐다. 루프 가족이 디즈니랜드에 다녀온 지 13일 만의 일이었다. 간호사인 엄마 에어리얼은 아이가 부쩍 자주 눈을 비비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알레르기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곧 아이는 열이 펄펄 끓었다. 호흡 장애를 보이고 급기야 울긋불긋 발진이 돋았다. 병원에서 홍역 감염 판정을 받았다. "정말 끔찍했어요. 계속 아이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아이가 평생 감내해야 하는 장애를 입거나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하면…. 백신을 안 맞히는 부모들을 정말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라고 아빠 크리스토퍼는 <시엔엔>(CNN)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모비어스는 다행히 큰 탈 없이 홍역을 이겨냈다. 하지만 모비어스가 감염된지 모른 채 돌아다닌 식당들과 상점들에서 얼마나 많은 감염자가 발생했을지 몰라 루프 부부는 가시방석이다.

홍역은 전염성이 강하기로 악명 높다. 직접적 신체 접촉이 없어도 감염될 수 있다. 홍역 감염자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면역이 없는 사람의 90%가 옮을 수 있다. 감염자가 떠난 공간에서도 병에 걸릴 수 있다. 보균자가 재채기·기침을 할 때 나온 홍역 바이러스는 공기 또는 물체의 표면에서 길게는 2시간까지 살아남아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다. 홍역에 감염되면 고열과 콧물이 나고 목이 부으며 눈이 충혈되고 온몸에 붉은 발진이 돋는다. 홍역 백신은 12~15개월 영아 때 한 차례, 4~6살에 한 차례 접종이 권장되고 있다. 따라서 12개월 미만의 영아와 레트처럼 의료적 이유로 백신 접종을 받을 수 없는 암 환자들, 백신 알레르기 환자들 등은 이 바이러스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미 연방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미국에서 홍역에 감염된 1000명의 아동 가운데 1~3명이 숨진다고 집계했다. 합병증으로는 폐렴과 뇌손상 그리고 청력 상실이 있는데, 특히 백신을 맞지 못하는 영아들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면역 시스템을 갖추는 '집단 면역'(herd immunity)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자신뿐 아니라 주변에 피치 못할 이유로 면역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까지 보호하기 위해 다수의 면역력이 필요하다는 이론이다. 시디시는 92~94%의 집단면역이 유지돼야 이번 사태와 같은 집단 발병을 막을 수 있다고 보고 있는데, 현재 미국의 홍역 예방접종률은 91%를 기록하고 있다.

왜 부모들은 자녀들의 예방접종을 거부하는 것일까?

이야기는 1998년 영국에서 발표된 한편의 논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앤드루 웨이크필드 박사는 홍역·볼거리·풍진 혼합 백신(MMR)이 자폐증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세계적 의학학술지 <랜싯>에 발표했다. 그는 엠엠아르 백신을 맞은 환자들에게서 장내 이상을 동반하는 자폐증이 발견됐다며, 이 혼합 백신이 자폐증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논문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백신에 대한 불안감은 높아졌고, 소아 백신 접종률은 떨어졌다. 이후 엠엠아르 백신과 자폐증 관련성에 대한 수십건의 연구가 이어졌지만 과학자들은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

논란이 가라앉지 않자 2008년 영국 일반의학위원회(GMC)는 특별조사에 들어갔다. 2년 반의 조사 끝에 위원회는 웨이크필드의 의사 면허를 박탈했다. <랜싯>도 그의 논문을 취소했다. 영국 언론은 웨이크필드가 논문에 게재한 환자 12명의 발병 시기와 엠엠아르 백신 접종 시기까지도 조작했다고 보도했다. 영국 의학학술지 <비엠제이>(BMJ)는 웨이크필드의 논문을 "사기"라고 규정했다. 그래도 웨이크필드의 입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지자들은 웨이크필드가 제약업계와 결탁한 정부·과학계로부터 탄압받는 양심적 지식인이라며 그를 떠받들었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는 또다른 백신 논란이 일었다. 몇가지 종류의 백신에 포함된 티메로살이라는 성분이 소아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일반적으로 독성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메틸머큐리와 다른 성분이지만, 미국은 '수은(머큐리) 백신이 접종되고 있다'며 발칵 뒤집혔다. 미 소아학회는 1999년 티메로살과 소아 자폐증은 관련이 없으며 무해하다면서도 소아용 백신에 티메로살을 첨가하지 않도록 요구했다.

이 해묵은 논란에 할리우드 여배우 제니 매카시의 입담도 한몫했다. 2007년 자신의 아들이 엠엠아르 백신을 맞은 뒤 자폐증에 걸렸다고 공개한 뒤 그는 예방접종 거부 운동의 '아이콘'이 됐다. 그의 주장은 전염병처럼 전파됐다. 미 공중보건국에서 발행하는 공중보건리포트를 보면 예방접종을 거부하는 부모들 가운데 10명 중 6명은 자폐증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접종을 미뤘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뚜렷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미국 내 소아 자폐증이 급증하고 있어, 부모들 사이에서 엠엠아르 백신이 자폐증과 관련돼 있다는 의혹이 굳어졌다고 분석했다. 시디시는 2000년 이후 2년마다 자폐증 조사를 시행하는데, 지난해 8살 어린이 68명 가운데 1명꼴로 자폐증을 앓는다고 발표했다.

실제 자폐증 등 예방접종 부작용에 대한 부모들의 우려는 크다. 캘리포니아주 마린 카운티에 사는 켈리 맥메니먼도 같은 이유로 8살짜리 아들에게 단 한 차례도 예방접종을 하지 않았다. 그가 사는 지역은 미국에서 소아 예방접종률이 가장 낮은 곳 중 하나다. 맥메니먼은 <시엔엔>과의 인터뷰에서 "내 선택이 다른 아이들에게 해가 된다고 믿지 않는다"며 "아들이 다른 아이에게 병균을 옮길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오리건주에 사는 4자녀의 엄마 제니퍼 마걸리스와 두 아이를 키운 린 바턴도 같은 입장이다. 그들은 "다른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내 아이의 안전을 희생할 수 없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앞서 홍역 감염을 두려워하는 레트·모비어스 가족도, 홍역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맥메니먼도 모두 북부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다. 이처럼 현재 미국에서는 특정 지역 공동체 단위로 예방접종률 저하 현상이 나타났다. 미국 언론은 "부자일수록 예방접종률이 떨어지는 위험한 새 흐름"이라고 분석했다. 부모들의 경제 수준과 교육 수준이 높은 '부자 동네'에서 아동 예방접종률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의 웨스트사이드 월도프스쿨에서는 권장 시기에 맞춰 예방접종을 받은 유치원생은 21%뿐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150개 학교에서 예방접종 면제 비율이 8% 이상 됐다. 모두 평균 가구 연수입 9만4500달러(약 1억400만원)에 달하는 지역 학교들로 미국 중간값보다 60% 높다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지난해 보도했다.

홍역 논란이 계속되자 정치권도 가세했다. 리버테리언(국가의 개입을 거부하는 극단적 자유방임주의자)으로 유명한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 랜드 폴은 "멀쩡히 걷고 말하던 아이들이 백신을 맞은 뒤 정신 장애를 겪는 안타까운 사건들을 보면서 자녀들에 대한 예방접종을 미뤘다"고 말했다. 의사 출신인 폴은 여론의 뭇매를 맞은 뒤 직접 예방접종을 받는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며 꼬리를 내렸다. 같은 당의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도 "예방접종 여부는 가족들이 선택할 문제"라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미국을 뒤흔든 홍역 사태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 이번 홍역 사태는 필리핀을 방문했던 한 여성이 디즈니랜드에 가면서 시작됐다. 지난해 미국 내 홍역 발생이 644건으로 급증한 것도 필리핀을 다녀온 여행객들이 촉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에서는 지난해 홍역 감염자가 5만명 이상으로 보고됐는데, 2013년 태풍 하이옌의 피해를 입어 40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 필리핀에 이어 중국도 5만건 이상의 홍역 감염자가 확인됐고, 올 1월에만 2700건이 확인됐다고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가 전했다. 확인되지 않은 추정치는 10만건이 넘는다. 국경을 넘나드는 홍역이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까닭이다.

김지은 기자 mir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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