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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 부당"

입력 2015. 04. 02. 16:29 수정 2015. 04. 02.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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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이관술 유족에 국가배상 판결

[오마이뉴스 박현주 기자]

▲ 이관술 선생

▲ <이관술 1902-1950>(2006,사회평론) 표지에 있는 이관술 선생의 얼굴. 1932년 반제동맹으로 수감되었을 때의 사진이다. 모진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 사회평론

대법원이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이관술의 유족에게 국가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사건 희생자 유족들의 유사한 국가배상 청구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이관술(1902~1950)은 1946년 7월, 미군정하에서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으로 붙잡혀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6월 말 또는 7월 초, 군경에 의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살해됐다. 법원이 이를 부당하다고 판결한 것이다.

대법원은 지난달 31일 판결을 통해 "수감 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부당하다"며 "국가는 유족에게 1억 6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관술의 막내 딸이자 유일하게 생존해있는 자녀인 이경환 여사(81)는 여러해 전부터 아버지의 억울한 체포와 죽음을 밝히기 위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하는 등 노력해왔다.

또 정판사 위폐사건의 누명을 쓰고 수감됐다며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에도 나섰다. 이번 소송을 도왔던 이관술 선생의 외손녀 손옥희 (55)씨는 "국가기록원에 여러 차례 정판사 사건 관련 자료를 요청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며 안타까워했다.

▲ 대법원 판결

대법원은 피고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고 승소를 최종 판결하였다

ⓒ 박현주

정판사 위폐 사건은 1946년 서울에서 일어난 위폐 범죄 적발 사건이다. 경찰은 일제 강점기 조선은행의 지폐를 인쇄하던 인쇄소인 정판사(精版社)에서 조선공산당의 당원인 은행 직원이 이관술의 지휘하에 위조지폐를 찍어 유포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조선공산당의 활동 자금 마련과 남한 경제의 교란을 위해 위폐를 유통시켰다고 주장했다. 이관술 등 조선공산당은 조작 사건이라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지난 2006년, 이관술의 일대기 <이관술 1902~1950,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를 발간한 안재성 작가는 이관술 유족의 소송에 대하여 "대법원의 판결이 올바른 법리적 해석을 내려준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정판사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자금이 풍족했던 조선공산당이 위폐를 찍어낼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고, 발견된 위폐도 없었다"며, "검찰 측 증인이었던 인쇄공이 고문으로 허위 진술을 했음을 호소하며 재판정에서 증언을 번복했다"고 말했다. 안 작가는 이어 "정판사 위폐 사건은 미군정과 우익이 조작한 사건으로 확신한다"며, "이관술 선생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했다.

대법원의 판결은 위폐사건의 진위를 밝히는데 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이관술 선생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은 일에 대해서는 국가의 명백한 잘못임을 분명히 했다.

이관술은 경남 울산 출신으로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동덕여고 교사로 재직했다. 1930년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후로는 넝마주이, 구두닦이, 농부, 솥땜쟁이 등으로 위장하여 전국을 돌며 조직 활동을 했다. '경성트로이카'의 혁명가 이재유는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활동한 둘도 없는 동지이기도 했다. 이관술은 '경성콤그룹'을 조직하였고, 1940년대 국내 독립운동세력의 절멸을 가져온 엄혹한 전시 체제를 견디며 비밀활동을 지속했다.

▲ 교사시절 이관술

동덕여고에서 이관술은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다.

ⓒ 박현주

그는 일제강점기 동안 여러 차례 옥살이를 하고 일경에 쫓기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했고, 1946년 2월 민족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건국 활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1946년 5월,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에 연루되어 그해 7월 경찰에 체포,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군경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복역수, 예비검속자, 보도연맹원(최대 7천명까지 추정)을 학살했다. 이관술도 이때 총살당했고, 당시 나이 48세였다.

한편 이관술이 생을 마감한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지난 2월 24일부터 지난 달 1일까지 7일 동안, 시민단체 주도로 매장지로 추정되는 일부 구역에 대한 유골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이를 통해 약 20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하지만 나머지 유해는 매장돼 있는 것을 확인하고도 되묻어야 했다.

▲ 산내학살지 유골 발굴

지난 2월 24일부터 일주일간 진행되었던 산내학살 유골 발굴 현장

ⓒ 심규상

[미니인터뷰] 이관술 선생 외손녀 손옥희씨 인터뷰

- 축하드린다. 소송은 언제 제기하였나?

"2012년 말에 소를 제기하여 경주지방법원에서 1심 승소하고, 대구고등법원에서 2심도 승소했다. 정부에서 항소, 상고를 하여 대법원까지 가게 되었다. 이번에 최종 승소 판결을 받았다."

- 소송을 낸 이유는 무엇인가?

"어머니(이관술 선생의 딸, 이경환 여사)가 평생 한을 안고 사셔서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만져드리고 싶었다."

- 감회가 어떠한가?

"해방이 되자, 외할아버지(이관술 선생)께서 집에 안 계셔도 면민들이 몰려와 잔치를 벌이곤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법원 승소 판결을 받으니까 유족회를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축하 전화를 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신다. 해방 후의 울산집의 잔치 분위기가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니었나 싶다."

- 소송하며 힘들었던 점은?

"증거자료를 찾는 것이 어려웠다. 국가기록원이 일제시대 자료는 주는데 해방 후 자료는 주지 않았다."

- 앞으로의 계획이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번 소송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셨던 산내학살유족회 회원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분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저도 다른 분들을 돕고 싶고, 유족회에 힘을 보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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