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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벅지의 거미 문신, 10년 미궁 성폭행범 잡아내다

입력 2015. 05. 27. 03:00 수정 2015. 05. 2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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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자살로 미제될 뻔한 사건.. 30대男, 다른 범죄 조사받다 덜미유전자 분석 등 과학수사도 진화.. 오래되고 미세한 흔적으로 범인 색출
[동아일보]
“제가 강간했다고요?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지난해 9월 주거침입 강간 혐의로 재판을 받던 강모 씨(36)는 법정에서 9년 전 범죄 혐의에 대해 딱 잡아뗐다. 그는 2005년 10월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한 주택에 들어가 피해자 A 씨(당시 22세·여)의 얼굴을 때리고 성폭행한 범인으로 지목됐다. A 씨가 자살한 탓에 피해자 진술이라곤 당시 출동한 경찰에게 접수된 피해 사실이 전부였다. 미제로 남을 뻔한 이 사건은 강 씨가 다른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우연히 풀렸다. 그의 허벅지에 새겨진 거미 문신이 결정적인 열쇠가 됐다.

사건 당일 A 씨의 주택 현관 철문 근처에서 강 씨와 몸싸움을 벌인 남성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증인은 “팬티 차림이었던 강 씨의 허벅지에서 거미 문신을 봤다. 용이라면 몰라도 거미라서 특이해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범인이 사용했던 생수병에서 채취한 지문이 강 씨와 일치하고 강 씨의 직장 숙소가 사건 현장 근처였다는 점도 신빙성 있는 증거가 됐다.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6부(부장판사 김우수)는 올해 1월 강 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고,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9부(부장판사 이민걸)도 “채택된 증거들을 살펴보면 충분히 강간 사실이 인정된다”며 강 씨의 항소를 기각했다고 26일 밝혔다.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아 처벌을 피했던 오래전 성범죄 사건의 진범들이 다른 사건으로 조사받다가 덜미가 잡혀 법정에 서고 있다. 범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건 현장에 남긴 지문, 체액 등이 자료로 보관돼 있을 경우 대조를 통해 가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 성범죄 전담 형사재판부의 한 판사는 “과거에는 7, 8개 특징점으로도 지문에 의한 신원 파악이 어려웠는데 최근에는 훨씬 적은 특징점만 갖고도 범죄 혐의자를 추출해 내거나 검색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전했다.

2010년 7월 시행된 이른바 ‘DNA 채취법’의 영향도 크다. 살인, 강도, 강간 등 11개 강력범죄의 경우 DNA 감식 시료를 채취해 보관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미 형이 확정돼 수감 중인 자도 소급 적용해 채취 대상에 포함시켜 위헌 논란도 있었지만 “데이터베이스 검색을 통해 오래된 성범죄 사건 재범을 검거하는 데 유용한 것은 사실”이라는 게 대검찰청 과학수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다른 사건으로 조사를 받던 중 유전자 대조 결과 4년 전 저지른 강도강간 혐의가 밝혀져 재판에 넘겨진 김모 씨(44) 사례가 대표적이다. 특수강도강간죄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형기를 마친 김 씨는 2011년 4월 교도소 수감 동기와 함께 서울 송파구 송파동의 B 씨(37·여) 집에 들어가 백화점 상품권과 현금을 훔친 뒤 B 씨를 강간한 혐의로 기소됐다. 사건 직후 피해자에게서 채취한 체액에서 남편과는 다른 남성의 염색체가 발견됐고, 유전자 염기서열이 김 씨의 것과 모두 동일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법정에서 B 씨는 커튼을 사이에 두고 김 씨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 사람이에요”라며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9부(부장판사 윤승은)는 김 씨에게 징역 18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기억이 안 난다. 그곳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피고인들도 교통카드 기록, 지문 흔적 등을 통해 입증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무너진다”며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처벌받을 수 있다는 일종의 경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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