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지옥을 만들어놓았다"

2015. 5. 2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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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21]

기획 연재_죽어도 떠나는 사람들

② 오스트레일리아 난민정책

'퍼시픽 솔루션'에서 '캄보디아 솔루션'까지 주변국들과 난민 '거래'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난민보호협약국 중 보트 난민 '기약 없이' 가두는 유일 국가, 난민감호소 내 자해·자살·성추행 보고 잇따라

바랏 알리 바투르(32)는 아프가니스탄 소수민족 하자라(Hazara)다. 바랏의 부모님은 아프간과 국경을 맞댄 파키스탄의 발루치스탄 지방 퀘타에서 난민살이를 했고 바랏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바랏 가족이 아프간으로 돌아간 건 2005년,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지 4년 만이다.

9·11 공격 뒤 외신기자 통역으로 경험을 쌓아온 바랏은 아프간에서 포토저널리스트로 성장했다. 신변에 위협이 온 건 그의 포토 스토리 '댄싱보이'가 2012년 4월 <워싱턴포스트>에 게재되면서다. '댄싱보이'는 아프간 권력층을 장악한 군벌들이 10대 소년들을 납치, 여장시켜 댄서와 성적 노리개로 이용한다는 현실 고발 작업이었다.

살해 협박이 계속되자 바랏은 가족과 함께 7년 만에 퀘타로 돌아왔다. 그러나 퀘타는 떠날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때 하자라들이 평화롭게 북적대던 도시는 종파 폭력으로 얼룩졌고 시장에서도 학교 가는 길에도 '시아파 하자라'를 겨냥한 자살 공격이 잦아졌다.

"배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지역에서 난민을 받아줄 곳은 오스트레일리아밖에 없으니까." 바랏은 <한겨레21>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보트피플' 개인사를 한 줄씩 풀었다. "비자? 우리 같은 사람에게 오스트레일리아 비자는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했다. 밀항선을 타는 거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보트로 도착한 난민들은 기약 없는 감호소에

바랏의 말대로 난민 신청이 절박한 이들에게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한 '부자 나라들'의 비자를 받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이들을 박해하는 본국에서는 대사관 접근조차 어려울 때가 많다. 주소도 공개하지 않는 카불의 오스트레일리아 대사관은 물어물어 갈 필요도 없다. "우리 대사관은 비자 업무가 없습니다"라는 공지가 이미 대사관 홈페이지에 걸려 있다.

물론 오스트레일리아에도 몇몇 유럽 국가들처럼 '난민-인도주의 비자' 제도가 있다. 그러나 아프간 국적자라면 두바이 주재 오스트레일리아 영사관으로 신청해야 하고,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가까운 친·인척이 있어야 하는 까다로운 비자다.

2013~2014년 제3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난민 비자를 받은 사람은 1만1016명이다. 반면 같은 기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보트난민에게 발행한 비자는 545건에 불과하다. 보트난민의 90%가 '난민 인정'을 받긴 하지만, 온전한 재정착 비자는 소수의 몫일 뿐, 나머지는 재심사 여지를 남겨둔 '브리징 비자'나 '임시보호 비자'를 받아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무엇보다 보트로 도착한 난민 신청자(Asylum Seeker)들은 대부분 기약 없이 감호소에 갇히게 된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난민보호협약국임에도 보트난민을 철조망 감호소에 가두는 지구상의 유일한 국가다. 2015년 3월31일 현재 오스트레일리아의 다양한 난민감호소에는 3555명이 갇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난민동맹행동(RCA)에 따르면, 이 중 80%가 3개월 이상, 60%가 1년 넘게 갇혀 있다.

어린이도, 임산부도, 갓난아기도 예외 없다. 2015년 2월 발표된 오스트레일리아 국가인권위원회 보고서는 800명의 어린이들이 난민감호소에 갇혀 있으며, 그중 186명이 '나우루 감호소'에 갇혀 있다고 밝혔다. 그 감호소에서 1년여를 보낸 이란 난민 피루잔(30대·가명)은 <한겨레21>과의 전화 통화에서 나우루 감호소를 "지옥 같은 감옥"이라고 정의했다.

적도 부근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나우루공화국과 파푸아뉴기니 영토인 마누스섬 등 제3국에 오스트레일리아달러로 지은 감호소를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지역난민심사센터'(RPC)라 부른다. 흔히 '오프쇼어 (Offshore) 감호소'라 불리는 곳이다. 보트를 타고 도착한 이들을 본토 밖 시설에 가두고 난민 심사를 하기 때문이다.

오프쇼어 감호소는 2001년 8월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을 들썩이게 했던 '탐파 어페어'* 이후 당시 존 하워드 자유당 정부가 채택한 '퍼시픽 솔루션'의 산물이다. 퍼시픽 솔루션은 해상 난민을 오스트레일리아 땅에 들이지 않고 파푸아뉴기니 등 남태평양 섬나라로 보내는 정책이다. 그해 10월부터 보트난민들은 크리스마스섬 감호소나 나우루 혹은 마누스섬 감호소로 이송됐다. 감호소 정책을 처음 도입한 건 1992년이지만, 보트난민 오프쇼어 감호소 시대가 열린 건 이때부터다.

2001년 8월, 존 하워드 정부가 438명의 하자라 난민을 태운 노르웨이 선박 탐파호(MV Tampa)의 입국을 거부하며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이 떠들썩했던 사건이다. 탐파호는 국제수역에서 좌초한 보트 위 난민을 전부 구조했고, 난민들이 원하는 오스트레일리아 크리스마스섬에 정박 허가를 여러 날 요청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거부에도 탐파호가 난민들의 간청대로 '불법 입국'하자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특수부대를 보냈고 노르웨이 정부와 외교적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하워드 정부는 '국경보호법안'을 발효했고 재선에도 성공했다. "누가 이 나라에 들어오고 누가 거주할 수 있는지 결정하는 건 오스트레일리아의 주권이다." 탐파 어페어의 전설로 남아 있는 하워드의 성명이다. 한편 난민을 구조한 탐파 선원들은 2002년 유엔난민기구(UNHCR)가 수여하는 '난센난민상'을 받았다.

더러운 음식과 물, 밀착감시…

2008년 정권이 교체됐다. 케빈 러드 노동당 정부는 열악한 시설과 인권침해로 비판받아온 '퍼시픽 솔루션'을 포기한다며 나우루와 마누스 시설을 폐쇄했다. 그러나 2012년 8월, 같은 당 줄리아 길라드 총리는 '퍼시픽 솔루션'을 부활시키고 '오프쇼어 심사'도 재개했다. 보트난민 수가 사상 최대를 기록하던 해였다(표참조). 오스트레일리아 난민운동가 이안 린툴은 "(보수) 자유당 정부나 (노조 지지를 받는) 노동당 정부나 정책적 차이는 없다"고 말했다.

피루잔이 크리스마스섬에 도착한 것도 이즈음, 난민정책이 나날이 강경해질 때다. 크리스마스섬 감호소까지는 견딜 만했는데 나우루 감호소는 달랐다. "우리더러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지옥을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피루잔의 말이다.

"음식, 물, 전기, 위생시설 모두 더럽고 부족한 것투성이에다 운동장도 없고 에어컨도 없고 밀착 감시까지 감옥이 따로 없다. 병원에 가고 싶으면 감호소 당국에 등록을 해야 한다. 한번은 감기에 걸려 등록했더니 5~6일 뒤에 기회를 줬다. 치통으로 고생하던 친구는 거듭 요청했지만 13개월 동안 의사를 못 봤다."

피루잔의 '지옥 스토리'는 이어졌다. 감호소 문제는 단순히 기본 물자 부족에 그치지 않는다. 자살 시도, 자해, 성폭력 등이 오스트레일리아 난민감호소의 상징어가 돼버렸다. 피루잔은 "일상"이라 표현했고, 난민운동가 린툴은 "아무리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그런 일이 발생한다고 했다.

요 며칠 나우루가 들썩이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5월16일, 23살의 이란 여성 난민 신청자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이 여성은 낮에 감호소 밖으로 외출을 나갔다가 귀가하던 중 변을 만났다. 옷이 전부 벗겨지고 구타와 절도를 당한 채 거의 무의식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별일 아니"라고 쉬쉬하던 나우루 경찰은 5월19일 50여 명의 난민 여성들이 시위를 벌인 뒤에야 "이란 여성이 공격받은 걸 인정한다"고 말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두 나라가 체결한 양해각서(MOU)에 따르면, 나우루 감호소는 나우루의 시설이고 난민 심사 절차도 나우루 정부의 책임하에 있다. 나우루의 법무 및 국경통제부 장관과 오스트레일리아 이민 및 국경보호부가 사설 용역업체의 도움을 받아 관리 책임을 맡는 형태다. 모든 재정은 오스트레일리아달러로 뒷받침된다. 따라서 책임의 시작도 끝도 결국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에 있다고 강조하는 린툴은 "트란스필드(감호소 운영 용역업체),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성 그리고 나우루 정부와 경찰 모두 감호소 난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아동정신건강 전문가 "감호소는 정신병 공장"

자국의 난민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해온 녹색당 세라 핸슨 영 상원의원은 감호소 폭력과 인권침해 사례를 꾸준히 모아 공론화해온 인물이다. 영 의원이 지난해 10월 이민 및 국경보호부 장관과 언론에 공개한 내용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아이 머리를 감기기 위해 경비에게 샤워 시간 2분을 더 요구하자 "전라의 몸을 보여주면 물 사용 시간을 늘려주겠다"는 답변을 들었다는 여성도 있다.

담배와 마리화나를 얻으려는 여성 난민들이 용역경비들에게 '몸'으로 대가를 지불하는 현실은 우울증이 모두의 만성질환이 돼버린 난민감호소의 풍경이다. 정부 진상조사팀은 3월에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일부 사례의 증거 수집에 어려움을 토로했고 일부 사례에는 '높은 개연성'을 부여했다. 뒤이어 상원의원 진상조사팀의 청문회가 5월19일 시작됐지만, 난민감호소를 "정신병 공장"이라고 부른 오스트레일리아 아동정신건강 전문가 패트릭 맥고리 교수의 말은 여전한 메아리로 남아 있다.

'지옥'을 견뎌낸 피루잔은 지난해 하반기에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거주시설만 옮겼을 뿐 아직 나우루에 '갇혀' 있다. 2013년 7월19일 노동당의 '돌아온 총리' 케빈 러드가 발표한 'PNG(파푸아뉴기니) 솔루션' 때문이다. 보트난민들은 난민으로 인정되더라도 오스트레일리아가 아닌 파푸아뉴기니 혹은 나우루에 재정착시킨다는 안이다.

"펜스도 없고 경비도 없고, 공식적으로는 이동의 자유가 있다. 하지만 좀체 나가질 못한다. 나우루 현지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아 안전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피루잔의 두려움은 과장이 아니다. 넉넉지 않은 제3국에 대규모 난민을 방치해놓은 건, 난민과 현지인들의 갈등을 키웠다. 지난해 2월 마누스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 역시 이런 구조적 위험에서 출발했다.

2014년 2월17일, 마누스 감호소에서는 언론이 '난민들의 폭동'이라 보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난민동맹행동(RCA)은 보고서를 통해 "(마누스 감호소 경비 용역업체인) G4S 용역들이 총과 장칼, 파이프와 몽둥이를 들고 난민을 공격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이 과정에서 이란 쿠르드족 난민 레자 바라티(23)가 사망했고 62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 난민은 엉덩이에 총을 맞았고, 시력을 상실한 이도 있다. 당시 목격자인 이민성 소속 통역에 따르면 혀를 잘린 이도 있다.

사건 직전, 난민 신청자들은 자신들의 난민 심사를 조속히 진행해줄 것을 요구하며 장기 시위를 벌여왔다. 결국 2014년 7월 파푸아뉴기니 경비요원과 감호소의 또 다른 용역 구원군대(Salvation Army) 직원 등 2명이 구속됐다. 당시 이민성 장관 스콧 모리슨은 "파푸아뉴기니 경찰, 감호소 현지 직원, 특히 구원군대가 레자 바라티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뒤늦게 인정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도 현지인들은 난민에 대한 공격을 공언해왔다. 폭력 사태 발생 3개월 뒤인 5월27일에는 다수 현지인들이 장칼을 들고 감호소 밖에서 축구하던 난민들을 위협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마누스섬 감호소를 "고문실과 마찬가지"라고 표현했다.

애벗 정부와 캄보디아의 경악할 만한 MOU

이란 난민 파시드(20대·가명)는 그 '고문실' 같은 감호소에서 여러 해를 보내며 지난해 폭력 사태를 겪었다. 홀로 집을 떠나 배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는 미성년자였다. 정부 지원금으로 매주 받는 100키나(약 4만원)가 그가 버는 돈의 전부다. 물론 기본 생활에 어림도 없다. "이란에 살던 시절의 나와 우리 가족은 직업도 존엄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고, 여기 와서도 나는 아무것도 없는 난민이다. 여긴 마실 물조차 제대로 없다."

대내외 비판에도 불구하고 토니 애벗 현 자유당 정부의 강경 노선은 난민보트처럼 멈출 줄 모른다. 지난해 9월 애벗 정부와 캄보디아 정부가 MOU를 체결하며 내놓은 '캄보디아 솔루션'은 난민사회와 인권단체를 경악하게 했다. 캄보디아에 약 40억오스트레일리아달러를 지원하는 대가로 나우루 난민을 캄보디아로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4월, 피터 더턴 이민성 장관은 나우루 난민에게 비디오 메시지를 보냈다. "캄보디아 경제는 안정적이며 종교적·인종적으로 다양하고 고용 기회가 널려 있는 박해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라고 설파했다. 캄보디아를 여행하는 자국민들에게 "치안 불안"과 "각종 사건·사고 주의"를 주문하는 여행 지침과 전면 배치됐다. 더턴 장관의 메시지는 "어떠한 경우에도 당신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재정착할 가능성은 없으며 생각도 말라"는 경고로 끝났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캄보디아보다 부자 아닌가. 왜 여기로 난민을 보내나. 여기 사람들은 그 정책에 불만이 많다. 말레이시아, 필리핀, 한국…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들도 거부한 걸 캄보디아 정부가 수용했다고 캄보디아 사람들은 불평하고 있다"고 캄보디아 시민 아룬(30대·가명)이 말했다.

5월21일 현재 나우루에서 캄보디아행에 동의한 난민은 로힝야 1명, 이란인 3명 등 4명이다. 이들은 약 1만~1만5천오스트레일리아달러의 '정착비용'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캄보디아에 재정착할 것으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일단 나우루 감호소를 벗어나고, 캄보디아에서 다시 밀매단을 만나 이동을 꾀할 것이라는 게 모두의 추측이다.

"배 타고 도착했다는 이유로 처벌하는 것"

한편 보트난민을 결심한 포토저널리스트 바랏은 어디쯤 갔을까. 바랏이 퀘타를 떠나 타이까지는 비행기로, 그다음부터는 육로와 배로 불법 월경해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건 2012년 7월이다. 한 달 뒤 바랏은 밀항선에 올랐다. 30여 명이 탈 만한 배에 93명이 탔다. 둘쨋날 밤 11시께부터 다음날 해 뜰 무렵까지 거친 풍랑을 만난 배는 바다 위에서 널을 뛰었다. '죽는구나' 생각하며 바랏이 열중한 건 셔터 누르기였다. 두려움을 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누군가 내 메모리카드를 발견하면 우리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 수 있을 테고 기적처럼 살아남으면 보트난민의 경험을 직접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서." 우여곡절 끝에 바랏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재정착했다. '캄보디아 솔루션' 등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난민 정책에 대한 바랏의 쓴소리는 명료했다. "보트피플은 죽지 않으려고 어딘가로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단지 숫자로만 기억되어선 안 될, 당신과 나와 똑같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단지 배를 타고 도착했다는 이유만으로 보트피플을 '처벌'하고 있다."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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