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다

한국일보 입력 2015. 6. 16. 11:01 수정 2015. 6. 16.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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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 모든 사람은 두 번씩 죽는다. 게티이미지뱅크

아침을 열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얼굴에 비누를 가득 칠한 채 중얼거리는 거다. '나는 이미 죽었고 내가 속한 정치공동체도 이미 죽었다' 라고. 무슨 말이지? 나는 멀쩡히 살아서 이렇게 세수를 하고, 정부는 어김없이 세금을 걷어가고,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변함없이 그다지 질이 높지 않은 쇼가 상연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을 열면서 공동체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일단 실제로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이미 죽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부고는 늘 죽음보다 늦게 온다. 밤하늘의 별이 반짝여도, 그 별은 이미 사라졌을 수 있다. 별이 폭발하기 전에 발산한 빛이 지구까지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 때문에 우리가 그 별을 지금 보고 있을 뿐. 나와 공동체는 이미 죽었는데 현재 부고가 도달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일 뿐.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 작년만 해도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압도적 1위였으며, 통계상 37분당 1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중에는 투신을 했다가 채 목숨이 끊어지지 않아 부서진 몸을 끌고 옥상으로 올라와 몸을 다시 던진 경우도 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옥상으로 올라가던 그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지 않았던 그 하루를 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지 않고 있다. 낙태가 금지된 상태에서도 한국의 낙태율은 OECD 최상위권이고 출생률은 전 세계적으로 최하위권이다. 인구감소로 인해 한국은 2750년 즈음 왜소한 공룡처럼 멸종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누군가 그토록 태어나고 싶지 않았던 그 하루를 사는 것이다. 이미 태어난 사람들도 애써 이 공동체의 소멸에 공헌하고 있다. 이를테면 일정 규모의 경제를 유지하는 국가들 가운데 해외 이민을 떠난 뒤 모국의 국적을 포기하는 비율은 한인이 2014년 이래 가장 높다.

그리고 사람은 두 번씩 죽는다. 자신의 인생을 정의하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삶의 의미가 사라졌을 때 사회적 죽음이 온다. 그리고 자신의 장기가 더 이상 삶에 협조하기를 거부할 때 육체적 죽음이 온다.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수명은 전례 없이 연장되고 있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회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 사이의 길고 긴 연옥 상태이다. 이것은 어쩌면 새로운 관광자원이다. 한국으로 여행 오시면 멸종 위기의 공동체를 구경할 수 있어요, 한국은 사라지는 중이에요, 상영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고도성장을 통한 중산층 진입, 절대악 타도를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과거 수십년간 이 사회에 에너지를 공급했던 두 약속에 대해 사람들은 이제 낯설어 하게 되었다. 이것이었던가, 우리가 열망했던 것은? 민주화와 경제발전이라는 구호가 낯설게 느껴지게 된 이 공동체의 선택은 이제 무엇인가? 마치 형식상 승진은 끝났으나 진정한 연구로부터는 마침내 스스로 소외된 교수들을 바라보는 기분으로 이 공동체의 다음 선택을 바라본다.

이러한 시절에 아침을 열 때는 공동체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첫째, 이미 죽어있다면 제 때 문상을 할 수 있다. 둘째, 죽음이 오는 중이라면, 죽음과 대면하여 놀라지 않을 수 있다, 셋째, 죽음이 아직 오지 않는다면,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대해 보다 성심껏 선택을 할 수 있다. 넷째, 정치인들이 말하는 가짜 희망에 농락당하지 않을 수 있다. 다섯째, 공포와 허무를 떨치기 위해 사람들이 과장된 행동에 나설 때, 상대적으로 침착할 수 있다. 그렇게 얻은 침착함을 가지고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과 이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는 거다. 화전민이나 프리라이더가 아니라 조용히 느리게, 그러나 책임 있는 정치주체로 살아보고야 말겠다는 열정을 가져보는 거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열정이란 그 자체로 지나치게 큰 야망처럼 보인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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