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여 명 희생자 낸 이리역 폭격.."왜 잊히고 있나"

전북CBS 김은태 기자 2015. 7. 1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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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수백 명이 희생된 이리역 폭격사건은 60여 년 만에 미군의 폭격으로 발생했다는 진실이 규명됐다.

하지만 진상조사위원회가 결론 내린 오폭에 대해 유족들은 의도된 폭격으로 희생자들이 훨씬 많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정확한 진상규명이 여전히 과제로 남겨지고 있는 가운데 위령제가 중단되고 유족들도 세상을 떠나고 있어 점차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다.

1950년 7월 11일 오후 2시에서 3시 30분 사이 발생한 이리역 폭격사건은 그 당시 사망자가 최소 91명 이상으로 밝혀졌다.

신원 확인이 안 되거나 사체조차 수습하지 못한 경우를 감안하면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유족들의 주장이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미군 B-29폭격기 2대가 오폭을 해서 철도원과 승객, 주민 등 수백명이 집단 희생된 사건으로 결론지었다.

권고사항을 통해 정부는 미국과 협상을 벌여 관련 자료 제공과 책임 있는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언급했다.

또, 국가는 희생자 유족에게 사과하고 지자체와 함께 희생자에 대한 위령제 사업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제도적 방안 마련을 권고했다.

하지만 권고사항이 이행되기는커녕 위령제도 2008년을 끝을 더 이상 열리지 않고 있다.

익산시 관계자는 국가가 나서지 않고 있는데다 유족들도 주관적으로 나서지 않아 자치단체가 앞장서 위령사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미군기의 오폭에 대해 앞뒤가 맞지 않다며 여러 가지 정황적으로 판단할 때 의도된 폭격이라는 주장이다.

희생자도 당시 91명을 훨씬 넘는 500여 명에 이르고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리고 있다.

이리역 미군폭격 유족회 이창근 회장은 "당시 희생자 가운데 10살 이하의 어린이 비율이 높은 것은 투하되는 폭탄이 삐라인 줄 알고 주우러 가다가 변을 당했으며 일부는 아군기로 확인하고 태극기를 들고 환영하다 피하지도 못하고 희생됐다"고 말했다.

또, 이 회장은 역에 있던 200여 명의 군입대 신병들이 떼죽음 당했으며, 더욱이 그날이 5일마다 우시장이 열리는 장날이어서 민간인 희생자가 많아 적어도 500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한 날 한 시에 부모를 잃은 16세 소년가장 이 회장이 어린 동생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짐작이 간다.

동생인 창규 씨마저도 올해 세상을 떠났으며 본인도 투병중이어서 진실 규명을 위한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이 사건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또, 관심사에서 잊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실된 역사적 사실 그 한줄을 제대로 써내려가기 위해 평생을 거리에서 보낸 유족들, 그들의 눈물을 누가 닦아줄 것인지 국가에게 묻고 싶은 대목이다.

[전북CBS 김은태 기자] ket88026@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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